작곡가 손일훈 “공감받는 동시대 창작자로 살고파” [인터뷰]

클래식부터 국악까지, 작곡·음악감독까지
경계 넘나든 시도 · 규정할 수 없는 작곡가
“나와 한국적인 것의 만남이 게임 음악”


손일훈 작곡가는 윷놀이, 스무고개 등 한국을 비롯한 세계 놀이를 주제로 한 ‘게임 음악’을 클래식, 국악관현악으로 선보이는 차세대 음악가다. 그는 “게임음악은 나의 정체성”이라며 “나만의 음악과 한국적인 것을 결합해 선보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처음 음표를 그렸던 것은 중학생 때였다. 예술고등학교에서 일반 중학교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음악교육을 진행한다는 공고문이 붙자 가슴이 뛰었다.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작곡 등의 지원 분야가 눈에 띄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도전해봤어요. 선생님께서 네 마디의 짧은 멜로디를 작곡해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형편 없었죠. 음표도 거꾸로 그리고, 음자리표 위치도 틀리게 그렸어요. (웃음)”

‘소년 작곡가’의 자질은 스승이 먼저 알아봤다. “나름 괜찮다”는 칭찬까지 들었다. 스스로는 “선생님의 응원에 힘 입어 운 좋게” 예고 교육 프로그램의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돌아본다. 작곡가 손일훈(35)의 음악의 길은 그 때 시작됐다.

본업은 작곡가. 그것도 전방위다. 클래식부터 국악관현악은 물론 뉴에이지까지 아우른다. 그는 꾸준히 신작을 발표하면서도 탁월한 기획력으로 음악 페스티벌을 진두지휘하는 예술감독으로도 활약하며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손일훈이 음악감독으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 곳은 지난해 진두지휘한 마포문화재단의 M클래식 축제에서다. 손일훈의 음악세계와 밀도 높은 기획력을 잘 보여줬다. 음악 축제에서 예술감독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감독의 존재가 축제의 질을 좌우하고, 감독의 유무가 축제의 완성도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손일훈은 지난 8년간 6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M클래식 축제의 첫 예술감독이었다.

그에게도 음악제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손일훈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평창대관령음악축제의 음악감독으로 있을 당시 기획자문을 맡으며 나도 음악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그 때 어떤 방식으로 기획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많이 쌓아뒀다”고 말했다.

손일훈이 음악감독으로 진두지휘한 M클래식축제 [마포문화재단 제공]


손 감독이 이끈 M클래식축제의 주제는 ‘보헤미아 숲’이었다. 마포가 가진 지역, 문화적 특성을 음악으로 풀어낸 결과다. 그는 “체코와 독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 숲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문화 교류가 활발한 마포가 교차점이 있다는 판단에서 짓게 된 주제”라고 했다.

보통의 클래식 축제는 1~2주에 마무리되나, 손일훈의 ‘M클래식 축제’는 1년의 긴 호흡으로 이어졌다. 그는 “보통의 음악축제가 일주일 안에 모든 프로그램을 채워넣은 뒤 관객에게 관람 가능한 공연을 택일하게 하는 반면 이번 축제에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오게 하고, 최대한 좋은 아티스트의 공연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유롭게 공연 일정을 잡아 띄엄띄엄 배치한 덕분에 다양한 음악가들이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박종해, 호르니스트 김홍박, 플루티스트 조성현, 이든콰르텟, 비올리스트 이신규 등 다양하다.

축제는 다양한 클래식 음악 공연을 보여준 마포문화재단에도 의미있는 이정표를 남겼다.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선율’이라는 방향성을 중심에 두고 집시의 선율과 보헤미아 지역 음악가들의 명작들을 수면 위로 꺼냈다. 드보르자크, 말러, 야나체크, 마르티누, 슈베르트와 같은 작곡가들의 곡부터 ‘보헤미안 정신’의 상징과 같은 오페라 ‘라보엠’이 무대로 올라왔다.

손일훈은 “정처없이 떠돌며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노래”라는 유대감으로 엮은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어떤 프로그램도 허투루 기획하지 않았지만, 그는 “아무도 모르는 곡을 멋지게 해낸” 이든 콰르텟과 플루티스트 조성현이 연주한 안톤 라이하의 ‘플루트 오중주’, 아시아 피아노 트리오, M클래식 축제의 메인 콘서트에서 선보인 말러 교향곡 1번 ‘거인’과 브람스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을 ‘최고의 공연’ 톱3으로 꼽았다.

손일훈은 늘 경계를 밟았다. 한국(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에서 공부하다, 네덜란드(헤이그 왕립음악원 석사ㆍ최고 과정)로 떠났다. 그는 “‘한예종’에서의 공부를 통해 음악가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을 갖췄고, 왕립음악원에서는 예술가로 살아가기 위한 자세를 배웠다”고 했다.

경계를 넘나든 그는 ‘규정할 수 없는 음악가’다. ‘음악’이라는 한 길을 걷고 있지만, 그 안에 뻗어 있는 미지의 길을 탐색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한 곳에 머물며 답습하는 음악이 아닌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변화를 추구하는 음악을 한다. 재치와 재기가 버무려진 그의 음악은 늘 새롭다. ‘현대음악은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단번에 깨준다.

일례로 음악과 게임을 정교하게 접목한 ‘음악적 유희’ 시리즈는 손일훈이 개척한 새로운 음악이었다. 그의 ‘게임 음악’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의 다양한 놀이를 음악으로 풀어낸 것이다.

손일훈 작곡가 [마포문화재단 제공]


첫 작품 ‘스무고개’는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이 곡에 대해 그는 “가장 많이 연주되는 베스트셀러 작품”이라며 “‘음악적 유희’ 시리즈는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예술에 가장 가까운 음악”이라고 했다. 이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9개의 곡이 작곡됐다. 그는 “생명력을 지닌 곡은 5개”라고 했다.

지난 2022년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협업한 ‘윷놀이 : 모 아니면 도’는 윷놀이를 음악으로 표현한 3분짜리 짧은 관현악 곡이다. ‘살육전’은 아니나, ‘오징어 게임’의 음악 버전인 셈이다. 2014년 첫 위촉을 시작으로 어느덧 12년차가 작곡가가 됐다. 그는 “게임 음악은 나의 정체성”이라고 했다. 그가 전통놀이를 소재로 한 ‘게임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나만의 음악’을 찾기 위해서였다.

“외국에 있다 보면, ‘너는 한국사람인데 왜 서양의 어법으로 작곡을 하냐’, ‘한국에서 왔는데 왜 내가 하는 음악과 비슷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내가 하는 음악은 국악도 서양음악도 아니라는 뚫기 힘든 첫 난관을 마주하게 돼죠.”

서양의 고전음악을 만드는 동양 작곡가의 한계를 벗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학 시절의 그는 “한국적인 것이 아직은 나를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이제와 국악을 한다고 나의 정체성이 바로 서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 무렵 “내 것을 찾는 동시에 한국적인 것을 담기 위해” 발굴한 분야가 바로 ‘놀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대음악은 어렵고 힘들어하는데, 게임 룰을 적용하면 이해가 쉽더라고요. 설사 말도 안되는 사운드라 할지라도 그것이 언어로 작용해요. 제가 어떻게 썼는지 설명하면 음악이 말이 되더라고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오래 고민해 쓰기 시작한 첫 놀이 음악이 스무고개였어요.”

이 곡은 네덜란드에서 말 그대로 ‘빅히트’를 쳤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스무고개’ 연주를 시작했고, 그의 곡을 벤치마킹한 게임 음악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그는 “학생들이 내 논문을 보고 게임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분이 좋다”며 “워낙 진보적인 지역이다 보니 이 음악이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작곡가로서 해마다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며 바쁜 날들을 보낸 그에게 올해는 새로운 창작을 위해 영감을 쌓는 해다. 이미 그간 작곡한 작품들이 올 한 해 대거 초연을 앞두고 있다. 1월 초 스위스와 독일에선 피아니스트 박종해를 위해 작곡한 ‘넘버스 앤 핑거스’라는 새 모음곡 시리즈를 발표했고, 4월엔 ‘스카이트 리의 블루 아워’의 한국 초연, 9월엔 김선욱 음악감독이 이끄는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팡파레’ 초연이 예정돼 있다. 3월부턴 음악 방송 ‘손일훈의 퀘스천스’(한경아르떼TV)가 전파를 탄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다. 스스로를 ‘무언가 창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잘하지는 않더라도 자의 음악과 정체성은 고유하게 나일 뿐 그 누구도 아니에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 이야기하고 싶은 것, 영향받은 것을 나의 방식대로 풀어내는 사람, 그게 바로 저의 정체성이에요. 그것을 지금의 사람들이 좋아하고 공감해준다면, 시대성을 가지게 될 것 같아요. 거창하게 뭐가 되고 싶다는 꿈보다는 창작하는 사람으로 공감받으며 동시대를 살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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