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원 위협하는 환율 안정이 더 급해
금리인하땐 환율 뛰고 물가불안 우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6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한국은행이 16일 새해 첫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3.00%로 동결한 것은 당장 고환율 위기를 막기 위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미국과의 금리 차가 지금보다 더 벌어지면 환율은 물론 물가에도 큰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비상계엄·탄핵 여파로 소비심리가 얼어붙으면서 내수가 위축되고 1%대 저성장이 전망되고 있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은 더욱 시급해졌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번 기준금리 동결의 주된 배경은 단연 1500원을 위협하는 고환율이다. 한은은 당장 금리를 낮춰 원화 약세를 부추기기보다는 한 박자 쉬어가며 환율 안정을 되찾는 게 우선이라고 봤다.
한은 금통위는 “세계경제는 국가별로 경기 흐름이 차별화되는 가운데 미국 신정부의 경제정책 향방 및 연준의 금리인하 속도, 주요국의 정치 상황 등에 따른 성장 및 물가 전망의 불확실성이 증대됐다”며 “이에 영향받아 국제금융시장에서는 미 달러화가 강세 흐름을 지속하고 장기 국채금리가 상승하는 등 주요 가격변수의 변동성이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계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은 미국 신정부의 경제정책 추진양상, 주요국의 통화정책 및 정치 상황, 지정학적 리스크 등에 영향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10월까지 1300원대에서 움직였던 원/달러 환율은 11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12월 비상계엄·탄핵 정국을 맞으며 급등했다. 장중 1480원대까지 치솟았던 환율은 여전히 1460원대 전후를 달리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문제는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오는 20일(현지시간) 공식 출범하면 달러 강세가 증폭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국내 정치적 혼란이 길어지며 한국 경제에 대한 글로벌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원화 약세 요인이다.
장기간 경기침체가 누적된 상황에 국내·외 리스크까지 산적해 있어 지금의 불안정한 환율 흐름이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고 한은은 판단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순대외금융자산이 지난해 3분기 기준 약 1조달러에 육박하는 등 외환 관련 건전성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어 환율이 일정 수준까지 오른다고 해도 과거와 같은 외환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미미하다. 그러나 환율 상승은 가까스로 잡은 물가를 자극할 수 있고 금융시장에도 충격이 불가피하다.
통상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를 높여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원화 기준 수입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2.4% 올랐다. 이는 석 달 연속 상승한 것으로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
환율 상승은 가계는 물론 기업에도 상당한 부담이다. 원자재 가격 증가에 글로벌 투자비 부담이 늘고 외화 부채가 많은 경우 대규모 환 손실까지 발생할 수 있다.
환율 상승에 따른 자금 유출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난해 12월 한 달간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 자금은 25억8000만달러를 빠져나갔고 이들은 채권도 12억8000만달러어치 팔아치웠다. 이러한 외국인 투자자 이탈은 특히 원화 가치 하락 폭을 키우는 요소로도 작용할 수 있어 환율 추가 상승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작년 말부터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기준금리 인하 속도 조절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도 이번 기준금리 동결 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글로벌 투자은행(IB)을 중심으로는 미 연준이 올해 말까지 기준금리를 동결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미국은 금리 인하에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입장이다.
실제 지난해 12월 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공개된 새 점도표(향후 금리 수준 전망을 표시한 도표)에 따르면 연준 위원은 올해 말 기준금리 전망치로 3.9%를 제시했다. 이는 지난해 9월 전망치(3.4%)보다 0.5%포인트 높은 것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만 기준금리를 낮추면 환율 상승 압박은 더 커지게 된다. 현재 한미 양국의 금리 차는 1.5%포인트다.
금통위는 이와 함께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요 정책 윤곽을 우선 파악하고 국내 재정 집행 상황을 살펴보는 등 연초 시장 흐름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봤다.
3회 연속 금리 인하에 대한 부담감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준금리 인하가 시장금리, 대출금리 인하로 이어져야 경기에 도움이 되는데 지금은 두 차례의 금리 인하에도 대출금리가 되레 오르는 등 시장에서 통화 정책 완화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에 당장 추가 인하 카드를 쓰기보다는 시장 내 정책 효과를 지켜보면서 적절한 인하 시기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일각에선 빠른 금리 인하가 시장에서는 경기가 그만큼 악화됐다는 신호로 읽히면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제대로 된 경기 부양을 위해선 정부가 통화 정책 수단을 비축해 둘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금통위는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을 비롯한 소비, 투자, 고용 등 경제 상황 전반의 흐름을 조금 더 지켜보고 기준금리 인하의 폭과 시점을 재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금통위에선 기준금리 인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비상계엄·탄핵 여파로 소비와 투자 등이 위축된 데다 수출 둔화 전망도 뚜렷해지고 있어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내외 주요 기관은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 성장 전망치를 잠재 수준(2%)을 밑도는 1%대 중후반으로 예상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주요 글로벌 투자은행(IB) 8곳이 제시한 우리나라의 올해 평균 경제 성장률은 1.7%다. 국가미래연구원은 그보다도 낮은 1.67%를 올해 성장률로 제시했다. 김은희·홍태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