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미미한데 시장서 막강 영향력
정치권서도 우려 “제도 정비 필요”
“적대적 M&A, 기업가치 훼손 우려”
국내 사모펀드(PEF)가 올해로 도입 21년째를 맞았다. 도입 초기에는 부정적 인식이 컸지만, 주식투자자 증가와 함께 기업 지배구조 개선 이슈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순기능적 역할이 주목받았다. 하지만 최근 1~2년 사이 일부 공룡 사모펀드가 재계의 이른바 ‘알짜기업’들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잇따라 시도하며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각종 규제와 승계작업 등으로 기업들의 ‘약해진 고리’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이에 정치권과 경제계를 중심으로 양자 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헤럴드경제가 3회에 걸쳐 사모펀드 관련 제도의 현황과 문제점, 해결책 등에 대한 집중 분석해본다.
“사모펀드(PEF)는 시장 주도 구조조정과 부실 기업에 신성장 동력 제공 등에 기여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적대적 인수합병(M&A), 경영권 분쟁 유발, 그리고 국가핵심기술의 해외 유출 우려까지 제기되면서 사모펀드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부와 국회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없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사모펀드의 적대적 M&A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 같이 강조했다.
국가기간산업 등 이른바 ‘알짜 기업’을 겨냥한 사모펀드의 적대적 M&A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경제계 안팎에서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가기간산업에 대해서는 연기금이 의결권 행사에 적극 나서 기업의 경영권 방어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와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2004년 12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개정으로 국내 사모펀드 제도가 도입된 지 올해로 21년을 맞았다. ‘해외 거대 자본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겠다’는 것이 당초 사모펀드 제도의 도입 취지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론스타 등 외국계 사모펀드가 대거 국내에 진출하면서 이에 대한 대항마 격으로 ‘토종 사모펀드’를 키워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이에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이뤄지며 국내 사모펀드 시장은 지난해 말 기준 펀드수는 1126개, 출자 약정액은 136조4000억원으로 커졌다. 약정액 기준 19년 동안 연평균 27.1%에 달하는 성장률이다.
20여년간 토종 PEF가 대기업의 긴급 유동성 공급처를 자처하거나, 오너 일가 대신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등 순기능으로 작용하는 사례도 많았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사모펀드는 도입 이후 우리나라 자본시장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며, 특히 M&A 시장은 재무적 투자자인 사모펀드가 주도하는 시장으로 변모해 M&A를 통한 기업구조조정 시장의 형성에 일조한 바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근 일부 대형 사모펀들이 ‘단기 엑시트’를 위해 무리한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 등으로 잡음을 내면서 이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다시금 확산하는 모양새다. 여기에 업계 1, 2위를 다투는 ‘공룡 사모펀드’ MBK 파트너스가 글로벌 기업인 한국앤컴퍼니그룹에 이어 지난해부터는 비철금속 분야 세계 1위인 고려아연과 지분 확보 경쟁을 벌이는 등 대립각을 세우면서 재계 안팎의 우려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사모펀드가 국가 전략산업이나 기간산업까지 무차별적으로 영역을 확장할 경우 해당 산업의 경쟁력이 훼손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통상 사모펀드는 국내외 금융기관과 연기금 등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고, 이 자금으로 투자 대상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한 뒤 기업가치를 높여 비싼 값에 되판다. 수익은 연기금 등 출자자(LP)들과 나눈다. 이를 위해 사모펀드는 10년 안팎의 투자 기간 내 기업을 매각해 자금을 회수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기간산업의 경우 이 같은 사모펀드의 비즈니스 모델과 성격 자체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국가기간산업과 함께 당장의 수익보다 장기적인 투자와 인내가 필요한 일부 산업의 경우 사모펀드에 대한 적대적 인수를 제한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내용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지난해 11월 고려아연과 경영권 분쟁 중인 MBK파트너스에 대해 “과거에는 당국이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면, 이제는 금융자본의 산업자본 지배에 대한 부작용을 고민해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원장은 또 “특정 산업군은 기간을 20~30년으로 길게 봐야 한다”며 “5년, 10년 이내에 사업을 정리해야 하는 형태의 구조를 가진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게 됐을 때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주주가치 훼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화두로 삼아서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사모펀드의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연기금이 의결권 행사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8일 국회 토론회에서 기조발제자로 나선 이정환 한양대 경제금융대학 교수는 “국가기간산업의 경영권 분쟁 또는 단기 이익 실현을 위한 구조조정안이 국민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이를 방어하기 위해 (연기금이) 적극적으로 반대의견을 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토론에 참여한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명예교수도 “국가기간산업에 관련해서는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적극 행사해야 한다”고 했다.
시민이 사모펀드를 비롯한 금융자본의 적대적 M&A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도 늘고 있다. 지난달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가 전국 만 18세 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58.4%가 사모펀드의 기업 M&A가 산업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아울러 사모펀드의 M&A에 대한 대응방안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45%가 ‘규제 강화’를 선택했고, 33.6%가 ‘경영권 방어 수단 강화’를 꼽았다. 재계에서는 “일부 사모펀드가 기업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실상은 경영권 분쟁에만 잇따라 참여하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의 오너가 승계가 3∼4세대째로 접어들면서 지배 지분이 희석하고 있다”면서 “중국 등 해외 자본을 등에 업은 대형 사모펀드들이 결국 이를 노리고 공세에 나설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영국의 거버넌스 리서치업체 딜리전트마켓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지난해 1년 동안 한국에서 발생한 행동주의 캠페인의 타깃이 된 기업 수는 77개사로, 전년 대비 57% 늘어 미국(160개사), 일본(103개사)에 이어 전 세계에서 3번째로 많았다.
정치권 관계자는 “20년 전 해외 자본에 맞서게 하기 위해 토종 사모펀드를 정부에서 지원해 왔는데, 이제는 되레 국내 대기업들의 목줄을 쥐는 형국”이라며 “특히 일부 대형 사모펀드의 경우 중국 등 해외 자본이 대거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국가적 이익과는 상충된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큰 만큼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를 재정비하는 방안 등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서재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