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하얼빈’ 안중근 역의 배우 현빈야마가타 아리토모지난해 12월 24일 개봉된 영화 ‘하얼빈’이 2025년 1월 11일 4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장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얼빈’은 대한민국 역사 소재 영화로는 드물게 전 세계 117개국에 판매돼 순차 개봉됐다.
‘하얼빈’은 엔터테인먼트로 보는 영화가 아니다. 진지하고 엄숙하고 묵직하게 만들어 재미는 떨어질지 몰라도 결코 지루하지 않다. 누아르적인 긴장을 끌고가는 힘은 강렬하며 큰 울림을 준다.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김윤석)이 조총을 맞고 전사한 후에 계속 북만 쳐도 깊은 울림을 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민호 감독도 “안중근 영화라서 오락영화로 찍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대한민국에서 세종대왕, 이순신, 안중근은 관점과 무드의 변주가 가장 어려운 역사적 인물이다. 학술논문도 아닌 대중영화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절대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며, 숭고함까지 느끼는 분들이기 때문. 지금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일상을 선사해주신 분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영화로 만들 때 직면하게 되는 점
혼란의 시대를 보내는 우리가 그 분을 통해 다시 한번 위로와 힘을 얻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겠다. 하지만 이 분들을 주제로 영상물을 만들려고 하면 배우나 감독의 부담감이 적지 않다. 우민호 감독은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로부터 대본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감당이 안된다고 사양했다. 안중근 역을 맡은 현빈도 “처음에는 감독님이 제의를 해주실 때 너무 큰 인물이라 거절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 ‘하얼빈’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909년,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현빈) 등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안중근과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등이 대한제국 국권 강탈을 단계적으로 진행하던 일본의 제국주의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내적 갈등, 인간관계, 고통, 슬픔 등 인간적인 감정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이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안중근이 이끄는 독립군들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뒀음에도 안중근이 만국공법(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인 모리 다쓰오 육군소좌(박훈) 등 일본군들을 풀어주는 에피소드가 된 것도,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군 사이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의심과 함께 균열이 일어나면서 보여진 내적 갈등을 다루기 위함이다.
안중근이 만국공법의 전쟁포로 규정에 따라 풀어준 모리 등 일본군들이 안중근이 속한 부대를 재공격해 사상자를 내자 독립군 사이에서도 안중근에 대한 의심과 함께 혼란과 동요가 발생한다. 이와 함께 동지들 중에는 밀정이 있음이 확인되면서 독립군 내의 큰 위험요소가 됐다. 이런 설정들은 역사적 사실임과 동시에 내적 갈등과 균열을 보여주는 데 좋은 소재다. 그것은 독립운동이라는 대의명분을 향해 나아가는 데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나 구한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을 담은 한국의 역사물은 상대국인 일본에서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과거에는 한류스타들이 이런 작품들에 출연하는 걸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기 의병 활동이 담긴 영화 ‘전,란’(2024)에 이어 ‘하얼빈’은 일본에서도 별로 불편해 하지 않는 듯하다.
국뽕 냄새가 덜 나면서(국뽕 냄새가 조금도 안날 수는 없다) 전쟁에 임하는 의병이나 독립군의 심리와 의식, 사고 방식 등을 더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 역에 일본의 유명한 배우이자 소설가, 방송인인 릴리 프랭키(61, 나카가와 마사야)가 캐스팅 된 것만 봐도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우민호 감독은 이토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릴리 프랭키에게 많은 부분을 맡겼다고 하지만 이토를 통해 중요한 이야기는 절대 빠트리지 않는다.
“내가 조선병합을 왜 망설이는지 아는가? 백성들때문. 이상하게도 받은 것도 없는데 힘이 있다. 도요토미의 임진년때도 조선 의병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어리석은 놈들, 내가 통감한 3년간 얼마나 발전했는데 나를 노려? 조선 유생들 300년 역사보다 내가 더 발전시켰는데”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평가는 엇갈린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사람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에게 이토는 구한말 침략의 원흉이자 대륙 침략을 기도하던 인물이라고 알고있지만, 일본에서는 평가가 나눠진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를 가장 잘 파악해 선견지명을 갖춘 선각자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부정적 평가의 근거는 메이지 신정부에서 조선반도와 만주 시베리아 동남아시아로 확장해나가기보다는 내치(內治)에 주력하며 ‘작은 정부’를 구상해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문란한 여자 문제’도 부정적 평가의 근거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가 아니라 아예 마이너스다.
이토 히로부미는 “나는 돈도 권력도 필요없다. 그냥 여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 메이지 최고의 호색가다. 여성을 좋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여성에게 함부로 대했다. 이토는 영국 유학 시절 부부 동반 파티에서 영국인 부인에게 추근대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는 초대, 5대, 7대, 10대 등 총리대신을 4차례나 했다. 최연소내각총리 기록(44세)도 가지고 있다. 이 기록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이 지난해 43세(1981년생)로 일본 최연소 총리에 도전했지만 이시바 시게루 현 총리에게 고배를 마신바 있어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가
이토 히로부미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하급무사가 되고, 마침내 총리대신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일본의 모든 사회적 계급을 다 경험해본 사람이다. 이토는 출생지인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에서는 이름이 하야시 리스케였지만, 열심히 일하는 농부였던 이토 아버지를 양자로 삼은 양부가 이토 가문에 양자로 가게되면서 하야시 두 부자도 성을 ‘이토’로 바꾸고 아시가루(하급무사) 신분을 얻게 됐다.
그래서 이토는 조슈번 하기시의 사설학원 쇼카 손주쿠에서 공부했고,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배워 서양을 몰아내자는 ‘대양이(大攘夷)’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조슈5’의 일원으로 영국 런던대학(University College London)으로 유학을 갔다. 이토는 국비로 술을 먹고 여자를 만나는데 쓰기도 했지만 영어 하나만은 잘했다. 서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구주와 미주를 1년 10개월간 견학한 이와쿠라 사절단의 멤버로도 발탁됐다. 이토는 자신보다 11살 어린 메이지 천왕에게도 영어를 써 영어를 잘못하는 덴노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어를 잘해 덴노의 총애를 받았다.
이 점은 조선의 매국노 이완용과 유사하다. 이완용도 28살인 1886년(고종 23)에 조지 윌리엄 길모어 등 서양 선교사가 교사로 있는 육영공원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혔다. 여기서 이완용은 영어를 가장 잘해 고종이 끼고 돌았다. 그 덕에 이완용은 1888년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을 따라 참찬관으로 워싱턴DC로 가 미국공사관 개설 작업의 실무자가 될 수 있었다.
영어를 잘하는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 중재, 교섭에도 능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국내에서 입자가 약화되면 외교에서 힘을 발휘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암살된 1909년에도 제정 러시아의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의 회담을 위해 하얼빈에 갔었다. 이 때는 조선에서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1905)과 조선 군대를 해산시킨 정미 7조약(1907) 체결을 끝내고 주변 강대국중 하나인 러시아에 협조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이토는 ‘유신3걸’중 한 사람으로 메이지 초기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보다는 내치 중심주의를 편 ‘행정의 대가’ 오쿠보 도시미치 밑에서 그의 신임을 얻었다.
이토가 정한론을 반대한다고 해서 제국주의자가 아닌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더 무섭다. 조선을 침략하면 조선내에서 ‘반일’ 정서가 강하게 일어나게 돼 조선을 통치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 그래서 조선을 야금야금 먹는 전략을 쓴다. 그렇게 해서 결국 식민화를 달성하지만 조선 군대는 조선인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용하게 하는 전략을 쓰겠다는 게 이토의 복안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국내에서는 강력한 ‘정적’(政敵)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라는 인물이 버티고 있었다. 이토가 하얼빈에서 암살당하자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일행이 저지른 사건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강하게 대두될 정도였다.
두 사람은 야마구치현 하기시가 고향이다. 1841년생인 이토가 1838년생인 야마가타보다 3살 어리다. 둘은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는 다다미 여덟 폭의 쇼카손주쿠학당에서 공부했다. 다카스기 신사쿠,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막내 이토 히로부미 등 ‘존왕파’가 학생이었다.
기헤이타이(奇兵隊)를 만들어 막부군을 격파한 다카스키 신사쿠가 둘의 롤모델이었다. 다카스키는 고(故)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토는 자신보다 늦게 기헤이타이에 합류한 야마가타를 선배로 인정하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일본 계파정치의 뿌리를 만든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렇다고 육군경(육군대신의 전신) 출신으로 3, 9대 총리대신을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야마가타는 일본 육군을 중앙정부가 통솔하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지닌 프로이센 군대로 개혁해 일본육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일본군대를 내각의 지휘에서 벗어나 천황의 직할조직으로 만들어 군국주의로 치닫게 만든 이도 야마가타다.
지모와 전략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수위였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을 군국주의로 몰고가면서 강력한 정치 파벌을 형성했다. 현재 일본의 계파정치도 야마가타가 뿌리를 내렸다고 보면 된다. 자기 계파 사람은 한번 봐주면 끝까지 책임진다. 그는 조슈번(야마구치 현) 지역을 기반으로 주로 군인을 각료로 입각시키곤 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슈번이라는 지역 이기주의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단, 이토 히로부미와는 동향이지만 ‘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야마가타가 정치를 은퇴한 것도 지역주의가 작용했다. 히로히토 황태자의 황태자비로 사쓰마번의 당주인 시마즈 가문의 고준 황후가 황태자비로 간택되자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다 정치생명을 잃은 것이다. 고준 황후(나가코 여왕)는 대한제국의 황태자였던 영친왕의 비가 된 이방자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이토는 자신보다 5살이 많지만 동향 친구인 이노우에 가오루가 강력한 동지였다. 이토는 아리토모의 견제로 동지인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물려주지 못했다. 이노우에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지만 조각(組閣)에 실패했다. 그래서 이노우에는 ‘무늬만 총리’다. 그 틈을 타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총리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일본 외무대신과 대장대신 외에도 조선 주재 일본공사를 역임하였고, 1894년 조선 주재 일본공사 자리를 미우라 고로에게 넘겼다. 그리고 1895년 미우라는 일본 낭인들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렇게 착착 일을 진행시킨다는 건 이노우에와 이토도 배후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관여돼 있다는 방증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1909년까지 독립군의 활동은 매우 중요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그후 조직된 친일내각(제 4차 김홍집 내각)의 급진적 개혁으로 반일 감정이 격화되면서 구한말 최초의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어 제 1차 한일협약, 을사늑약, 한일신협약, 기유각서 등으로 조선의 주권을 야금야금 박탈했다. 외교, 내정, 군대, 경찰권이 모두 박탈당했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테라우치 마사다케, 하야시 곤스케 등이 앞장서 활약했다.
“안중근 효과”
이에 항일 의병의 구국항전이 이어지고 전국적으로 확대돼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각지 의병장들은 일본군대에 점령당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1만여 의병으로 13도 창의군을 편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 때가 1908년 1월이었다.
이제 의병은 산간 벽지로 옮겨 게릴라 전법으로 전환됐다. 동시에 만주와 연해주로 대일 항전의 무대를 옮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의 연장선에서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이’(이토)를 저격한 것이다. 안중근은 심문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한국의 3천리 강토를 일본의 속국으로 삼으려했고, 동양의 평화를 영영 파괴하고 수많은 인종이 장차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일 등 15가지 죄악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당시 우리가 일본측의 의도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구체적으로 세우며 준비했어야 했다. 대한제국은 그런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지만 그속에서 30세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숭고한 정신은 있었다. “우리 앞에 어떤 역경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독립권을 회복하는 날까지 불을 들고 어둠속을 걸어들어갈 것이다” 실제로 안중근의 이토 저격이후 잔뜩 겁을 먹은 일본관료들이 조선통감부 등 조선에 부임하기를 꺼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것이 ‘안중근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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