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0원 들고 엄마 찾았던 고아 “아동도 권리가 있다”

‘실종아동 가족찾기 앞장’ 조민호 아동권리연대 대표

어린 시절 갑자기 고아 된 이후
구타 등 지옥 같았던 시간 보내
노동운동 하다 세월호 참사 목도
방황 끝에 ‘아동 권리’ 문제 집중



조민호 아동권리연대 대표가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바닥’에서 ‘반전’은 시작됩니다. 고비에서 발견한 깨달음, 끝이라 생각했을 때 찾아온 기회. 삶의 바닥을 전환점 삼아 멋진 반전을 이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면, 레버넌트(revenant·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반전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이 기사는 헤럴드경제 회원 전용 콘텐츠 ‘HeralDeep’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회원으로 가입하시면 더욱 더 생생하고 유익한 콘텐츠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민호 아동권리연대 조민호 대표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 대략 50대라고 추정한다. ‘고아호적’에서 비롯된 생년월일 ‘1974년 1월 15일’을 여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찾고 있다. 기억 저편에 희미하게 남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필사적으로 붙잡은 채로 말이다. 그렇게 40년이 넘게 흘렀다. 이제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아이가 더는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의 소명이 됐다. 그는 사비를 털어 단체를 만들고 국가로부터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기 위해 긴 항해에 나섰다.

고아가 된 후 펼쳐진 지옥 같았던 시간

조 대표는 부모가 있는 고아였다. 처음부터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분명 어머니 손을 붙잡고 시장에 갔던 순간은 아득한 기억 속에 어슴푸레 남아 있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1977년 5월 어느 날이다. “한 손으론 엄마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소시지를 들고 먹고 있었어요. ‘잠깐 기다려’라는 엄마 말에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안 오는거죠. 옆에 있던 시장 할머니가 소시지를 까주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봐’라고 위로의 말씀을 해주신 것도 기억나요. 하지만 그 이후론 길을 잃어서 더 이상 기억나지 않습니다.”

고아가 된 조 대표는 그 길로 강원 춘천 오순절보육원에 보내졌다. 당초 ‘오순절영아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보육원은 6·25전쟁 직후 만 6살 이하 전쟁고아를 보살피기 위해 설립됐다. 당시엔 보육원과 함께 오순절입양위탁소도 함께 운영됐는데, 이곳에서 보육원생 60여 명 중 대다수가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고 조 대표는 회상했다. 하지만 조 대표는 끝까지 해외로 입양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해외 입양을 굉장히 많이 보내던 시기였잖아요. 길을 잃어 미아가 되는 경우에도 아이를 찾아 원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려는 기본적인 노력이 아예 없었던 때였어요. 고아원에서 새로운 신분, 이른바 ‘고아호적’이 만들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이 고아호적 때문에 자신의 부모와 가족을 다시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게 되는 거죠. 반면 저는 엄마도 기억하고 집도 기억하니까 집에만 다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집으로 가겠다던 조 대표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그는 7살까지 보육원에서 성장했고, 그 이후엔 강원 원주에 있는 성애원으로 옮겨져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권은 무참히 짓밟혔다. ‘집에 보내달라’는 말 한마디에도 곧장 몽둥이가 날아왔다. “말이 좋아 ‘고아원’이지, 사실상 ‘수용소’였어요. 아침 6시에 일어나 체조하고 예배보고 밥 먹고 청소를 해요. 시간에 맞춰 외부에 있는 학교를 가면 늘 ‘고아원 출신’이라는 사회적 시선에 부딪혀야 했죠. 학교 갔다 돌아오면 나이 많은 형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고, 원내에서 정해진 작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밥을 안 줘서 굶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단돈 6700원 들고 고아원 탈출, 부모님 찾아

조 대표는 고교 1학년 무렵 강제노동과 구타에 지쳐 성애원에서 탈출을 결행한다. 가고 싶었던 인문계 고교 진학을 못하게 된 것도 고아원 탈출을 결심 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초·중학교 시절에 공부하는 걸 좋아했어요.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고아원에서는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실업계인 원주농고를 보내줬어요. 그때 당시에는 무상교육 같은 게 없으니까 고아원 출신은 대부분 실업계로 진학했는데, 그때 더 이상 여기 남아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고 한 달 정도 지난 1990년 4월 무렵, 조 대표는 친구에게 빌린 6700원을 가지고 성애원을 탈출했다. 평소와 다름 없이 밖으로 나왔지만, 행선지는 학교가 아니었다. 곧장 춘천 오순절보육원으로 향했다. 보육원에 입소하던 당시 기록 등이 남아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 대표는 부모를 찾을 결정적인 기록들을 찾을 수 없었다. 조 대표는 “부모님 성함이라도 알고 싶어 여러 차례 보육원을 찾아 자료를 요청했지만, 오히려 ‘안굶기고 키워줬는데 배은망덕하다’는 식의 말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생활비를 벌면서 부모님 찾는 일을 이어갔다. 춘천 인근에 있는 칫솔공장에 취업해 1년 6개월 동안 일하며 틈틈이 검정고시를 준비해 합격했고, 1993년 무렵 보육원 동기 소개로 4호선 충무로역 일대 열차 안에서 신문을 팔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신문보급소 총무로 일하며 대입을 준비해 5수를 해 1997년 대학에 들어갔다. 한때 인권변호사를 꿈꾸기도 했다는 조 대표는 “고아원 출신으로 사회에 나왔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을 누구보다 잘 알다보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문제에 관심이 갔고, 인권법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대표는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문제 등으로 1학기만 다니고 중퇴를 한다. 검정고시부터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부모를 찾던 생활에 육체적·정신적 과부하가 걸리면서다.

1997년 IMF 위기까지 조 대표에게 덮쳐왔다. 그는 학업은커녕 건설 현장, 퀵서비스, 택배기사 등을 전전해야만 했다.

“공장·택배·퀵서비스를 하면서 별안간 우리사회 속 ‘노동’이라는 가치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여연대에서 하는 대학생 활동가 모임에 가입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한편 2003년부터 참여연대·민주노총·민주노동당에서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비정규직 차별과 해고 중단을 요구하는 뉴코아·이랜드 파업에 깊이 개입했다가,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확정받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충격에 ‘아동 권리’ 문제 집중

노동운동에 투신한지 10년이 지났을 무렵 조 대표는 다시 한 번 방황한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것에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노동운동이 자신과 이 사회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다고 했다. 조 대표는 그로부터 약 2년 동안 외부활동을 단절했다. 하지만 이때 당시 생활은 오히려 그에게 삶의 전환점이 됐다. “절망 끝에 다가간 그때야 비로소 온전히 ‘고아’라는 나 자신의 정체성과 해결해야 할 문제점, 앞으로의 목표가 명확해졌다”고 조 대표는 말했다.

조 대표는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고아가 된 자신에게 발생한 문제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 아래 2016년부터는 언론에 부모를 찾는 자신의 사연을 알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 생활했던 춘천의 보육원과 관할 지자체 등을 숱하게 오갔고, 2022년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시설 피수용아동 신원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도 요청했다. 진화위에서는 2023년 9월 조 대표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

특히 이 무렵 조 대표는 아동권리연대를 만들어 자신과 같은 고아, 실종 아동 등에 대한 불법 입양 문제 등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조 대표는 “한국은 과거 70년 동안 입양과 관련해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들을 정도로 장시간 많은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며 “그 과정에서 인권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제대로 된 사죄라든가 법적 조치 등을 하지 않고 있어 전세계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조 대표는 해외 불법 입양인 문제를 알리는 캠페인을 비롯해 ‘장기실종아동 가족 찾기 활동’을 여러 유관 사회단체와 함께 주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실종된 딸이 미국에 입양된 사실도 모른 채 44년간 딸의 행방을 찾아 헤맸던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을 지원하고 있다. 조 대표는 이 밖에도 국가를 상대로 한 각종 소송·법률지원,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조 대표는 “과거에는 고아로 신원이 조작돼 원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입양되는 인권 침해가 전반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라며 “진화위에서도 계속 조사를 하겠지만, 아직까지 알려진 건 빙산의 일각이기 때문에 이번 소송을 계기로 더 많은 국가배상청구가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조 대표는 아동권리 보호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판단되는 제도 등에 대해서는 반대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내고 있다. 특히 지난해 7월 시행된 보호출산제에 대해 조 대표는 “아동이 자기 부모를 알고 원가정에서 양육받을 권리를 전면 박탈당하는 폭력적인 법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조 대표는 작은 중소기업에서 비정규 계약직으로 인사·노무 업무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자신과 같은 보호시설 출신 아동 등 아동권리연대 회원들과 모여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는 매순간 아동의 복지와 권리를 생각한다.

이날 인터뷰 말미에도 조 대표는 단 한 명의 아이도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실종아동법상 ‘DNA 등록 제도’를 널리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아동권리보장원과 경찰청은 실종아동법상 DNA를 등록하면 가족을 찾아주도록 돼 있지만 홍보가 많이 안돼 있어요. 국내에 있는 고아든 해외에 있는 입양인이든 상황은 마찬가지인데, 국가가 전폭적으로 이 같은 가족을 찾기 위한 제도를 홍보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용경 기자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