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발레냐’ 해도…누구나 즐기는 무대 만드는 게 목표”[헤경이만난사람①]

최진수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인터뷰
韓 최초 컨템포러리 발레단…독창성이 무기
좋은 작품·무용수가 향후 30년 경쟁력


최진수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상하이의 밤을 불면으로 숙성시킨 자들, 시대의 우울 뒤집어쓴다, 청춘들은 대한독립의 결기로 가득했고, 애국애족의 날이 가고 해가 떴다 (중략) 피 끓던 청춘들은 무명의 전사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 전설의 시대를 ‘화양연화’라 부른다.”

곱게 땋은 댕기 머리의 소녀들이 분홍빛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봄날의 꽃송이가 돼 일제 강점기 경성에 흐드러진다. 비극의 시대를 살아낸 숭고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서울발레시어터의 ‘화양연화’. 독립운동가 김상옥을 주인공으로 한 ‘화양연화’는 한 편의 뮤지컬 같기도, 한 편의 영화 같기도 하다.

누군가는 질문을 던진다. “이게 발레가 맞냐?”라고. 엄격하게 구분된 장르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끄는 최진수(51) 단장은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나 경계가 모호한 이 작품에 대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저건 발레가 아니라 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발레라 할 수도 있죠. 우리가 해온 것은 발레를 기반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에요.”

최진수 단장이 안무를 맡은 ‘화양연화’ [서울발레시어터 제공]


‘창단 30년’ 한계 벗은 창작 발레…“누구나 좋아하는 콘텐츠”


말이 없던 ‘몸의 언어’ 안으로 대사가 들어왔다. “무용수도 감정이 격해지면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열린 판단은 콘텐츠의 영역을 확장했다. 말을 품은 춤은 정형화된 ‘고전의 몸짓’도 벗었다. 그러자 춤은 자유로워지고, 장르는 한계를 넘었다.

1995년 창단한 서울발레시어터는 국내 최초의 컨템포러리 발레단이자, 국내 최초의 창작 모던 발레단이다. 2018년 취임한 최진수 단장은 “1990년대 외국의 전설적 안무가의 작품을 학습해 무대에 올리던 기존 발레단과 달리 서울발레시어터는 스스로 창작하는 단체로 시작헸다”며 “누구나 시도할 수 없는 것을 한다는 정체성이 서울발레시어터의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다.

국내 양대 발레단 중 하나인 유니버설 발레단에 몸담으며 클래식 발레로 자신을 증명해 왔던 최 단장은 서울발레시어터로 이직해 무용수로 활동하다, 단장까지 맡게 됐다.

서울발레시어터는 독창적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독특하고 새롭다. 일례로 발레계의 연말 스테디셀러 공연인 ‘호두까기 인형’도 서울발레시어터가 하니 달랐다. 클래식 발레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두드러지는 차별성을 둔 것. 양대 발레단인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이 눈송이춤을 러시아의 원작 안무를 기반으로 보슬보슬 내리는 흰 눈을 보여줬다면, 서울발레시어터에선 눈보라가 휘몰아치듯 빠르고 거센 눈송이춤을 춘다. 2막에서 길게 자리하고 있는 ‘세계의 춤’에선 기존 안무에선 등장하지 않는 춤을 창작해 삽입했다.

최 단장은 “해당 부분은 극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등장하는 의미 없는 춤을 뜻하는 디베르스티망 구간”이라며 “세계의 춤이 나오는데 한국춤은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넣었다”고 말했다. 발레 애호가라면 많게는 수백 번을 봐왔을 ‘호두까기 인형’의 재창작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클래식을 재해석해 동시대 감각을 입혀 ‘오늘의 관객’에게 다가서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창작한 총 100여개의 작품은 서울발레시어터 역사 그 자체다. 플라멩코 풍의 기타 음악에 남녀 다섯 커플이 나와 춤을 추는 발레단의 최장수 레퍼토리인 ‘도시의 불빛’부터 분홍색 달이 뜨는 밤에 마법을 부리는 ‘신데렐라’까지 모든 작품이 발레단만의 감각을 입고 태어났다. 최진수 단장을 비롯해 단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주어진 안무만을 숙지해 무대에서 펼쳐내야 했던 여느 발레 무용수와 달리 서울발레시어터의 단원들은 모두가 ‘자신의 춤’을 가진다.

최 단장은 “춤추는 것을 좋아해 발레를 시작했고, 어떻게 움직여도 나의 춤이길 바라는 단원들은 대부분 안무를 할 줄 알고, 엄청난 끼와 능력치가 갖춰져 있어 어떤 작품에서도 자신을 풀어 던질 줄 아는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2018년부터 서울발레시어터를 이끌고 있는 최진수 단장은 “좋은 무용수와 좋은 콘테츠가 우리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임세준 기자


“좋은 콘텐츠, 좋은 무용수가 향후 30년의 경쟁력”


서울발레시어터의 독창성은 이 단체의 정체성이면서 전략이다. 사실 클래식 발레는 ‘취미’ 활동으로 확장할 만큼 탄탄한 팬덤이 있지만, 컨템포러리 발레는 소외 장르에 가깝다. 게다가 국내 발레계에선 민간 발레단의 흑자의 경영 구조를 갖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발레를 보러올 때 예쁜 무용수가 나와 화려한 옷을 입고 추는 우아한 춤을 꿈꾸고 와요. 그렇기에 때론 저희 작품이 관객의 니즈에 맞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게 발레냐’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죠. ‘새롭다’는 생각을 할 만큼 경험치가 많지 않아서죠.”

그럼에도 최 단장의 전략은 ‘우리만의 것’, 즉 서울발레시어터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흉내 내면서 따라가기보단 ‘선택과 집중’으로 차별점을 만들자”는 전략이었다.

“사실 클래식이든 컨템포러리 발레든 자본이 부족하면 망할 수밖에 없어요. 돈이 없으면 좋은 무대와 의상, 그리고 좋은 몸을 가진 무용수들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죠.”

현실적 한계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서울발레시어터만이 가져야 할 ‘무기’를 고민했다. 그래서 최 단장이 구상한 ‘독특한 원칙’은 바로 ‘스몰 럭셔리’ 전략. 작품 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고, 빛나야 할 부분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남들이 흉내 내지 못할 정도의 무대”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다. 최 단장은 “우리나라 공연 장르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가 뮤지컬이다. 종종 발레는 말이 없어 답답하고, 버라이어티하지 않다는 관객들이 많다”며 “관객의 니즈를 충족하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장르간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발레와 연극이 결합한 형태의 장르를 보여주고, 때론 무성영화처럼 기발한 몸짓과 표정을 더한 장면들을 더하면서 몸짓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웠던 ‘춤의 세계’가 선명해졌다.

“누구든 좋아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운 콘텐츠로 발레 장르의 저변을 확대하고 관객을 개발하고자 했어요. 진입장벽을 낮추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내놓지 못하면 유통을 할 수 없고, 상업 예술로는 실패하게 되는 거죠.”

서울발레시어터의 ‘호두까기인형’ [마포문화재단 제공]


작품적으로는 서울발레시어터만의 색깔을 갖되, ‘투트랙 전략’으로 국내 대다수 기초자치단체가 요구하는 가족 발레 작품에도 힘을 줬다. ‘피터팬’, ‘신데렐라’와 같은 작품이 그 예다. 31명의 ‘직업 예술가’에게 ‘생존’과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는 다양한 시도를 하되 단원들의 예술적 갈증을 해소할 작품을 동시에 올리는 것이다.

최 단장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민간 단체에선 재정의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쌓기까지 쉽지 않았다”고 돌아본다. 민간 예술단체가 경제적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선 국가공모 지원사업에 의존한다. 그 과정에서 경쟁은 치열하고 지속적 지원은 미흡하다. 창작 단체로서 새로운 작품을 올려도 재연, 삼연으로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운영 노하우가 쌓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그의 취임 직후였던 2018~2019년 서울발레시어터는 흑자 구조로 전환됐다. 당시엔 한 해 동안 공연을 100회 이상 올렸다. 코로나19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지만, 서울발레시어터의 저력과 경쟁력은 이미 증명됐다. 지난해엔 마포문화재단의 상주 단체로 선정된 데 이어 서울발레페스티벌까지 이끌었다.

지난 30년은 앞으로 나아갈 30년을 위한 기반 다지기였다. 1995년 창립해 올해로 30주년. 오는 5월엔 마포아트센터에서 30주년 기념공연 ‘에이지 오브 이노센스(순수의 시대)’를 올린다. 발레의 기원과 서울발레시어터의 순수한 시작점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담는 작품이다. 국립발레단의 강효형, 애틀랜타 발레단 출신의 김유미와 최진수 단장 등 총 5명이 안무가로 참여해 서울발레시어터의 30년과 현재를 조망한다. 최 단장은 서울발레시어터의 향후 30년은 ‘좋은 콘텐츠’와 ‘좋은 무용수’가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처음엔 (단원) 아이들을 보는 것이 너무 재밌었어요. 개성도 강하고, 다른 단체에 비해 안무력도 뛰어나고, 체격과 외모도 좋은 친구들이 많거든요. 앞으로는 이 친구들이 만드는 좋은 콘텐츠가 우리의 경쟁력이 될 겁니다. 우리 단원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만족할 수 있는 춤을 추게 하는 것이 제 몫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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