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졸중 병상 투혼에도 “대충 만들지 말자”[헤경이만난사람②]

태권도 하다 고3 때 발레 시작
늘 최초였던 발레 선구자의 길
흑자 힘들어도 “팔리는 예술 고민”


최진수 서울발레시어터 단장.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발레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늦은 나이였다. 춤추는 것은 좋아했지만, 중학교 때까진 태권도를 배웠다. 늦깎이 출발이었지만, 누구보다 두각을 보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늘 선구자로 서있었다.

사실 그에게 발레는 ‘최후의 보루’였다. 영화 ‘더티 댄싱’에서 페트릭 스웨이지가 발레 테크닉을 하는 것을 보며 흉내내던 소년은 마음 속으로 운동이 아닌 춤을 품었다. “주변에선 발레 한 번 해보라”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지만, 섣붙리 시도하지 않았던 갈망이었다.

입시 지옥에 뛰어든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무용학도가 됐다. 발레로 대학에 가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한 1년을 살았다. 그때 그의 성적이 내신 10등급에서 3등급으로 뛰어오를 정도로 열심히 했다. 한성대 재학 시절엔 한국무용협회 신인 콩쿠르에서 특상을 받았고, 재학 중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해 무용수 생활을 시작했다. 콩쿠르 수상으로 병역 특례를 받은 것도, 직업 발레단에 입단한 것도 한성대 무용과에선 그가 처음이었다.

최진수 서울발레시어터 단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남들보다 경력이 짧아 뭘 해야할지 모르던 때에 선배들, 선생님들이 많이 붙잡아줘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고 했다.

발레 무용수는 예술가이면서 운동선수이기도 하고, 감정을 터뜨려 보여줘야할 연기자이기도 하다. 무대 위에선 팔색조여야 하지만, 무대 뒤에선 수행자여야 한다. 그는 “발레 무용수로 사는 것은 사실 스님처럼 도를 닦듯 살아야 하는 직업”이라며 “늘 진지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어느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매일을 수행해야 하기에 굉장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빠른 춤’을 좋아했다던 최 단장은 태권도를 했던 경험이 무용수로서 순발력 개발에도 도움이 됐다고 돌아본다. 클래식 발레단에 몸담은 8년간 그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쌓였다.

“춤추는 것을 좋아해 발레를 시작했는데 어딘가 좀 체조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절제해야 하고, 춤을 추기 보단 테크닉을 잘 수행해야 인정받는 것이 클래식 발레였어요.”

‘나의 춤’을 찾고 싶었던 갈증에 그는 2003년 서울발레시어터로 옮겨 새로운 춤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어떻게 움직여도 내 것이 될 수 있는 춤을 추고 싶었다”고 한다. 그의 첫 안무작은 2014년 한국발레협회에서 신인 안무가상을 받은 ‘쉐도우’. “커다란 나무 뒤 시커먼 그림자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같다”던 어머니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태어난 작품이다.

지난해는 영광과 불운이 동시에 찾아왔다. 마포문화재단의 상주 단체로 선정돼 안정적으로 무대를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서울발레페스티벌의 총예술감독으로 축제를 이끌었다. 이 모든 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때에 생긴 일이다. 그는 지난해 찾아온 일들을 장장 6개월간 병원에 입원하며 병상에서 처리했다. 이때 시작한 안무는 10월 초 퇴원 후에야 마무리하며 축제를 마쳤다. 지난해 그는 한국발레협회가 주는 ‘올해의 예술가상’을 받았다.

발레를 시작하며 그의 인생은 달라졌지만, 가고자 하는 길은 늘 험난했다. “고3 때 실수했던 것 같다”고 농을 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발레를 고민한다. 발레 무용수로 사는 것을 고민했고, 발레 무용수들이 살아갈 길을 함께 고민하며, 발레 콘텐츠의 저변 확대를 고심한다. 민간 예술단체의 수장은 “답조차 찾을 수 없는 외로운 길”이라면서도 예술의 토양을 다지려 매일의 터전을 닦는다. “민간 예술단체가 왜 필요하냐”는 시선 앞에선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라는 백범 김구의 ‘문화국가론’을 되새긴다.

“늘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아요. 아무리 활동을 해도 흑자가 나지 않는 운영 구조이니까요. 하지만 그럴수록 ‘대충 만들지 말자’고 되새겨요. 대충 만드는 순간 지속가능성이 없어지니까요. ‘팔리는 예술’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진정성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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