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노 전민철, 강박 벗고 조각에 깃든 사연은 [요즘 전시]

두산아트랩 젊은 작가 6인전 전시
35세 이하 신진작가들 작품 선보여


발레리노 전민철의 다리와 발을 본떠 만든 조각. 고요손의 ‘전민철, 추운 바람과 모닥불(온기)’(2025). 이정아 기자.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전시장에 들어서자 굳은살이 박힌 두 발과 팽팽한 결이 빚어낸 다리의 자태가 시선을 붙든다. 세계 최고의 발레단인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을 코앞에 둔 발레리노 전민철(21)의 신체 일부를 본뜬 조각이다. 손끝에 닿은 무릎 조각은 뜻밖에도 온기를 머금은 듯 따스하다.

“민철에게 요즘의 소원을 물었는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불멍을 때리고 싶다’였어요. 어떻게 보면 정말 시시하게 느껴지는 소원이잖아요.”

그렇게 조각가 고요손(30)은 불멍하듯 아무 생각 없이 쉬는 민철의 조각을 빚었다. 작가는 무대 위에서 강인해야만 하는 강박을 가진 발레리노의 인간적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굉장히 가벼운 재료인 스티로폼으로 모양을 만든 뒤 단단한 알루미늄으로 주물을 떠 작품을 완성한 이유다.

‘두산아트랩 전시 2025’ 전시 전경.


두산아트센터가 해마다 공모를 통해 선정하는 35세 이하 신진작가들의 작품들이 서울 종로구 두산갤러리에 개막한 ‘두산아트랩 전시 2025’에 공개됐다. 발레리노와 협업한 고요손을 비롯해 김유자(30), 노송희(33), 장다은(31), 장영해(31)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장영해는 이른바 ‘명품’ 골프클럽으로 덮여 버린 경북 경산시 코발트광산 학살 현장을 집요하게 추적해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44분 분량의 영상 ‘annie, cobalt’을 소개한다. 이승만 정부는 이곳 코발트광산에 지역 보도연맹들과 대구형무소 정치범 등 3500여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끌고 와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여러 명을 줄로 묶어 수직갱 앞에서 밀어버렸고, 사람들을 가둔 뒤 폭약을 터뜨렸다.

그런데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유해로 뒤덮인 잔혹한 학살 현장이 탁 트인 풍경의 평화로운 필드로 은폐됐다. 골프채에 공이 맞는 ‘딱’ 소리가 마치 총성이 울리는 듯한 소리로 연상되는 작품 속 장면마다 그 자체로 현재에 감춰진 폭력의 무게를 소름끼치게 되살려낸다.

폴댄스 퍼포먼스 촬영 영상 프레임 사이마다 AI가 만들어낸 프레임을 끼어넣었다. 장영해의 ‘blur, blur’(2025). 이정아 기자.


그의 또 다른 작품은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낸 왜곡되고 뒤틀린 호러물을 연상케 한다. 작가는 1초마다 24개 프레임으로 이뤄진 폴댄스 퍼포먼스 영상 프레임 사이마다 AI가 만든 영상을 넣었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춤추는 댄서의 표정과 몸짓이 일그러지고 뒤틀리면서도 언뜻 보면 유려하게 이어지는듯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본능적 움직임과 비인간적인 기계 왜곡 사이에 존재하는 영상 속 댄서는 그 자체로 우리가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형상이다.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경계는 어디에 있나, AI가 인간의 경험을 대체할 수 있나, 혹은 AI가 인간의 감정이나 신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0분간 상영되는 작품 앞에서 이처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되는 데는, 감각과 인식을 흔드는 장면마다 관람객에게 주는 충격이 깊고 지속적이어서다.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작품 사이에는 용지, 소재, 크기, 두께가 저마다 다른 김유자의 사진 작품이 걸렸다. 그는 우연히 찍은 필름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에서 사진 속 피사체가 사라져 있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됐다. 그가 사용한 유통기한 지난 필름이 공항의 엑스레이(X-ray) 검색대를 거치면서 훼손된 까닭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눈으로 본 것을 사진으로 볼 수 없게 됐고,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사진으로 볼 수 있게 됐다”며 “불명료하게 감지되는 어떤 순간을 포착해 눈으로 보는 경험이 다른 감각으로 확장되는 사진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아카이브와 전시 공간을 재료로 삼는 노송희는 실제 두산갤러리 공간을 자신의 지난 작업을 망라하는 새로운 가상의 전시공간으로 재해석한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두 개의 시공간을 만드는 ‘막’을 장치로 쓰는 장다은은 작가가 직접 봤거나 누군가의 시선으로 수집한 여섯 개의 창문들에 담긴 서사를 설치 작품으로 그려냈다.

전시는 3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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