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안호재 대표가 회고하는 안병하인권학교 대표
44년 전 5.18 광주서 군부 진압 거부로 고문
“우리 가족에겐 비극이지만, 광주엔 다행”
“경찰, 위법 명령 거부할 수 있는 선례 생겨야”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은 부친 안병하 치인감과 안 대표의 다중노출 합성 촬영.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이영기 기자] “44년이 흘렀는데도 왜 거부를 하지 못했을까…아직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6.25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자 무장공비를 소탕해 녹조근정훈장을 받은 경찰. 영웅 같은 한 사람의 공직 생활은 고문 후 의원면직을 종용당해 경찰옷을 벗는 것으로 끝이 났다. 고초를 겪은 후유증으로 8년이 지난 후 그는 결국 세상을 등진다. 영웅이었던 그가 고초를 겪은 이유는 ‘시민을 지켰다’는 이유에서였다.
故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의 이야기다. 안병하 국장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발포 및 과잉진압을 거부해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모든 것을 잃었다.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는 점차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현충원 안장, 의원면직 취소 등 안병하 국장의 명예 회복을 그의 아들 안호재(66) 안병하인권학교 대표가 이끌고 있다. 안호재 대표는 아버지의 뜻을 잇고, 경찰이 경찰답게 일할 수 있는 ‘경찰인권’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안 대표를 만나 44년 전 5월의 얘기를 들었다.
안호재 대표는 아버지인 안병하 국장을 “공직에 계실 때 일이 바쁘면 며칠씩 집에 오지 못하셨다”며 “그래서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집에서 단란하게 있었던 기억이 많지 않다”고 회상했다.
안 대표는 아버지 안병하 국장을 ‘참군인’, ‘참경찰’로 그렸다. 아들의 기억처럼 안 국장은 군인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안 대표는 “1948년에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다”며 “그 후 1950년에 전쟁이 일어나고 처음 배치받은 게 춘천지구다. 춘천지구는 6.25 전쟁 당시 유일하게 안 뚫린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아버지는 춘천지역에서 관측 장교를 맡았다”며 “당시에는 관측 장비가 없으니 적진으로 들어가 관측을 하고 동향을 살피고 포격 지점을 파악했는데, 그 임무를 맡으셨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안 대표는 “당시 국군이 집중 포격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며칠간 춘천 지역에서는 북한군 남하를 저지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안병하 국장은 당시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 후로 10여년이 지난 1962년 안 국장은 군간부 총경 특채에 지원해 전장이 아닌 시민 곁을 지키는 경찰로 옷을 갈아입었다. 경찰이 돼서도 안 국장의 활약은 이어졌다.
1968년 제주 서귀포에 간첩이 침투하자 직접 경찰들을 지휘하며 북한군 12명을 사살, 2명을 생포하고 간첩선까지 나포하는 혁혁한 공을 올렸다. 당시 세운 공으로는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안 대표는 아버지를 영웅으로 설명했다. 안 대표는 “부친이 경찰 영웅이기 전에 전쟁 영웅으로 먼저 선정이 됐디”며 “2015년에 전쟁 영웅으로 선정이 되고, 2년 후인 2017년에는 치안감으로 계급이 특진되며 경찰 업적도 인정받아 경찰 영웅으로 선정이 됐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군인과 경찰로 활약하던 안 국장은 혼란의 시기를 1년여 앞둔 1979년 전남 경찰국장으로 취임한다.
1980년 5월 18일 하루 전인 17일 안호재 대표가 전해 들은 광주는 굉장히 고요했다고 묘사했다. 안병하 국장은 광주 민심이 폭발하지 않도록 오히려 최소한의 시민 활동을 보장했다는 게 안 대표의 설명이다.
안 대표는 “당시에 전국 다른 경찰에서는 민간 학생이 주도하는 행사를 막았다”며 “부친만 유일하게 학생 운동을 허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부친은 학생 운동마저 억누르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유일하게 전남 지역 학생들의 시위만 이어지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시위대는 질서가 유지되는 선에서 시위를 이어갔다는 설명이다.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안 대표는 “상황이 급변할 것으로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고 하더라”라며 “인근 지역에서 차출됐던 경찰들은 본대로 돌아가고, 자체 경찰들은 집으로 퇴근할 정도로 평온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당시 안 국장도 보름 만에 관사로 퇴근했던 날이라고 안 대표는 설명했다.
그러나 5월 17일 밤 상황은 급변했다. 18일 자정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곧 학생들이 모여있던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에 7공수여단 공수부대가 대대적으로 투입됐다. 그 후 광주로 내려온 계엄군은 수일째 시민과 대치를 이어갔다.
25일 조급해진 신군부는 광주로 내려왔다. 최규하 대통령,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았다. 그날 자리에는 전남 치안을 담당하는 안병하 전남 경찰국장도 있었다.
안 대표는 “시나리오대로 경찰이 빨리 무장을 해서 광주를 장악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되니 서울에서 급하게 내려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부친에게 ‘경찰도 무장을 해라’, ‘시민을 제압하라’ 등 명령을 했다”며 “그 자리에서 부친이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고 한 것”이라고 상황을 묘사했다.
이어 안 대표는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는 불행이지만 광주 시민으로서는 다행이었던 순간”이라며 “만약 다른 사람이 전남 경찰국장을 맡았으면 부친처럼 저항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부친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관계도 설명했다. 그는 “둘은 육군사관학교 8기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며 “어떻게 보면 좀 친숙한 사이인데도, 계엄사령부가 전남 경찰에 무장하고 시민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안병하 국장은 육사 동기의 비정한 명령을 결국 거부했다.
명령을 거부한 다음날 안 국장은 ‘끝’을 예감했다. 안 대표는 “당시 얘기를 들어보면 명령을 거부한 다음날 부친의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며 “부친이 아침을 거의 안 드셨는데, 그날 아침은 두그릇을 드셨다고 한다. 드시면서 ‘어쩌면 마지막 식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날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안 국장을 서울로 압송해 갔다.
안 국장이 서울로 압송된 다음날 계엄군은 광주 전남도청을 장악했다. 18일부터 열흘간 이어지던 민주화 운동도 계엄군의 도청 장악으로 막을 내렸다.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안 국장은 서울로 압송된 후 8일 만에 가족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 대표는 “부친이 언제 나오는지도 알 수 없으니 배웅을 갈 수도 없었다”며 “당시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니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하더라”고 당시 모습을 설명했다.
안 국장은 보안사에 잡혀있던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 안 대표는 “부친께 듣기로 잡혀간 순간부터 나올 때까지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좁은 방에 가두고 강하게 빛을 비췄다고 하더라”며 “더 자세한 고문은 부친께서도 말을 안 하셨다”고 말했다.
당시 보안사 요원들은 안 국장에게 사표를 쓰게끔 종용했다. 안 대표는 “당시 구속한 상태로 자진해서 사표를 쓰게 했다”며 “부친은 ‘부하들만은 건드리지 말 것’을 조건으로 사표를 썼다”고 말을 이었다.
결국 모진 고문으로 건강을 잃고, 경찰 옷마저 벗어야 했던 안병하 국장은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8년 후인 1988년 10월 10일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안호재 안병하인권학교 대표가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헤럴드스퀘어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은 부친 안병하 치인감과 안 대표의 다중노출 합성 촬영. 임세준 기자 |
계엄과 시민을 지키기 위해 항명한 경찰의 이야기를 옆에서 생생하게 겪은 안호재 대표는 12.3 비상계엄 당시 명령을 따른 경찰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안 대표는 “44년이 지난 2024년인데 이해가 안 간다”며 “왜 아직도 거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냐”고 탄식했다.
그는 “부당한 명령은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줘야 한다”며 “1980년 당시에 결국 계엄이 성공하니깐 그에 동조했던 경찰관들은 문책 받은 사람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번 내란동조 혐의를 받는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했다. 안 대표는 “두 청장도 지시가 부당하다고 했다면 결국 다른 핑계로 끌려갔을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어떻게 보면 참 불쌍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 대표는 선례를 남겨야 향후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 대표는 “급박한 상황에 부당한지 정당한지 판가름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며 “먼저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필요하다. 1980년 5월 위법한 명령을 거부한 경찰관들을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이번 일을 계기로 또 한번 경찰의 인권이 바로 서도록 힘을 보탤 의지를 다졌다. 안 대표는 “경찰의 인권을 지키고, 억울한 경우가 있다면 그 억울함을 풀어서 경찰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고 의지를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