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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 |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최근 세종관가에서 가장 ‘핫’한 책을 한 권만 꼽으라면, 지난해 12월 말에 출간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노한동 지음·사이드웨이)’입니다. 책을 쓴 이는 지난 10년간 정부부처에서 일하다 2023년 4월 서기관 승진과 동시에 공무원을 그만뒀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지난 10년간 경험하고 관찰한 공직사회의 무능한 일상과 좌절을 보여주는 일종의 에세이이자 르포”라고 소개합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공직사회의 ‘민낯’을 엿볼 수 있지만, “겨우 10년 해보고 마치 공직사회를 다 알고 있는 듯 썼다”며 불편해하는 공무원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저 어깨너머로 공직사회를 관찰해 온 기자 입장에서도 공감이 가는 면면이 적잖습니다. 기자들이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바로 ‘정책 연구용역’에 관한 부분입니다. 노한동 전 서기관은 “직업공무원인 관료는 책임을 싫어한다. 특별히 승부를 걸어야 하는 때가 아니라면, 본인이 있을 땐 결정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하는 것이 공무원의 태생적 속성”이라며 “연구용역과 위원회는 정책의 전문성과 민주성 증진을 핑계삼아 공무원이 시간을 벌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결정의 완충지대”라고 고발했습니다. 책을 읽어본 기자들은 “이 대목은 평소 내 생각과 일치한다”며 입을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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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원 교수 등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12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권고문을 발표하고 있다.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안을 논의해 온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현행 1주 외에 ‘월 단위 이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뉴시스] |
해당 대목에 기자들이 깊히 공감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정책 연구용역’을 근거삼아 편향적인 의사결정을 손쉽게 내리는 상황을 수도 없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정부 초기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 집행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고용부는 ‘미래노동시장연구회’를 구성했고, 연구회는 ‘주52시간’이 아닌 ‘주69시간’까지 가능한 근로기준법 정부개정안의 근거가 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답정너(답은 답은 정해졌으니까 너는 대답만 하면 돼)’식 연구 결과는 결국 여론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좌초됐습니다. 하지만 연구회 뒤에 숨은 공무원 중 책임지는 이는 없었습니다.
“본인이 있을 땐 결정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 연구용역을 의뢰한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가 되면 우리 사회는 ‘지역·업종별 최저임금 차등적용’에 대한 갈등이 불거지면서 한 바탕 몸살을 앓습니다. 대선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이 차등적용을 공약을 내세운 탓에 경영계와 노동계의 갈등은 더욱 격화했습니다. 결론 없이 지리멸렬한 공방만 지속하면서 정부는 또 다시 연구용역을 의뢰했지만, 아직도 명확한 답은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쏘아올린 ‘노동법원 설립’ 같은 이슈 역시 대다수 국민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지만, 연구용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렴 어떠냐는 이들도 있겠지만, 연구용역은 모두 ‘혈세’로 진행됩니다. 노 전 서기관은 “정부가 시간을 벌기 위해, 혹은 책임을 분산하는 면피성 전략을 짜기 위해 연간 수천억원의 예산을 정책 연구용역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은 알고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그 와중에 깨알같이 제 주머니를 챙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공직사회의 이러한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 몇몇은 그 덕분에 연구용역비에 위원회 수당까지 살뜰히 챙기고, 이들은 반복적으로 연구용역에 참여하거나 위원회에 위촉되어, 때로는 실질적인 성과 없이도 보상을 챙기고 자기 자리를 공고히 한다”는 겁니다.
지난해 고용부와 노사정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최저임금위원회와 관련된 13개 회의체 민간전문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3명이 두 개 이상 회의체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노동분야 전문가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들만 ‘중용’되는 걸까요. 정부 ‘입맛’에 맞는 전문가들로 꾸리려다보니 이런 구성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게 다수 기자들의 분석입니다. 실제 A교수는 6개 회의체에 중복 위촉돼 활동했습니다. 3개 이상 회의체에 참여한 위원도 7명이나 됩니다. 지난해 최임위가 시작도 하기 전 새로 꾸려진 ‘공익위원’ 구성으로 몸살을 앓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죠.
노 서기관은 책을 통해 공직사회를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관료는 무수한 비효율적인 관습이 일상화된 공직사회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영리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러한 영리함은 우리 사회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이지 않고, 오히려 단기적 성공을 위해 책임을 회피하고 결정을 미루는 데 집중된다. 이 과정에서 출세를 위한 형식적 업무에 몰두하는 관행이 반복되고 관료의 ‘영리한 무능’은 공직사회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불편하겠지만, 탄핵 국면 속에서 ‘영리한 무능’을 반복하고 있는, 정부세종청사 공무원들도 이 책을 한번 돌려봤으면 합니다.
※[세종백블]은 세종 상주 기자가 정부에서 발표한 정책에 대한 백브리핑(비공식 브리핑)은 물론, 정책의 행간에 담긴 의미, 관가의 뒷이야기를 전하는 연재물입니다. 정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공무원들의 소소한 소식까지 전함으로써 독자에게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