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빛나 기자]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미국 사회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4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를 미국이 장기간 관리·개발한다는 구상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가자지구를 소유할 것”이라며 “중동의 리비에라!”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발언으로 역대 미국 행정부가 수십년간 고수해 온 ‘중동의 정직한 중재자’이미지가 훼손될 가능성도 커졌다. 여기에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행보까지 보이면서 후폭풍은 커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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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워싱턴 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도착했다. [AFP] |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워싱턴DC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회담후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에서 트럼프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요르단과 이집트 등 주변 제3국에 영구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동에서는 주민들을 제3국으로 이주시키고 미국이 가자지구의 소유권을 갖는다는 구상은 일단 이스라엘 극우진영의 숙원을 대신 이뤄주는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크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극우세력에게는 성서에서 차지하라고 기록된 ‘약속의 땅’으로 통한다.
네타냐후 총리를 지지하는 이스라엘 극우진영도 가자지구 전쟁 때 팔레스타인인을 내쫓고 재점령할 것을 주장했다. 조 바이든 전임 행정부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에 강한 반대 입장을 견지했으나 팔레스타인과 주변 아랍국들은 이스라엘의 욕심을 계속 경계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자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양대 자치구를 이루는 요르단강 서안을 이스라엘에 넘기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가자지구를 소유할 것이며 현장의 모든 위험한 불발탄과 다른 무기의 해체를 책임지고, 부지를 평탄하게 하고, 파괴된 건물을 철거하고, 지역 주민에게 일자리와 주거를 무한정으로 공급하는 경제 발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가자지구를 개발하면 ‘중동의 리비에라’(‘호화로운 향락 도시’를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자지구에 미군을 보낼 것이냐는 질문에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할리 소이퍼 유대인 민주평의회의 최고경영자(CEO)는 “미군 배치를 포함해 가자지구를 점령할 것이라는 생각은 극단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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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 근처에서 열린 ‘백악관 집회에 네타냐후 체포’에서 자유의 여신상 복장을 한 활동가가 시위 중이다. [AFP] |
이스라엘에 노골적으로 친화적인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이날 더 선명해지자 중동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아랍권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즉각 성명을 내고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주민 강제이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집트·요르단·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주변 5개국은 지난 1일 외교장관 공동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 주민 이주 구상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반응에는 트럼프 행정부가 통치하는 미국에 대한 신뢰 약화가 강하게 반영돼있다.
과거 미국 행정부는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을 통해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을 위한 보편적 접근법으로 굳혀왔다.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합의를 통해 서로 주권을 지닌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가자지구 주민 강제이주와 재점령 계획은 아랍권과 유대인의 공존을 표방하는 중동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미국에 대한 실망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온정적인 여론과 대규모 난민 유입 같은 현실적 우려도 주변국들의 반미정서를 자극하고 있다.
실제 요르단은 과거 중동전쟁 여파로 자국에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왕가 축출과 국왕 암살 등을 시도해 내전을 치른 경험이 있고, 이어 레바논에서도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이 내전의 배경 중 하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