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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연합] |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7일 오전 향년 78세로 별세한 가수 송대관은 한국가요사에서 어떻게 기록될까?
송대관은 1967년 노래 ‘인정많은 아저씨’로 데뷔했다. 하지만 10여년을 무명가수로 전전했다. 60년~70년대 음악구도를 살펴보면 송대관의 성장과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6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는 남진과 나훈아다.
여자는 이들보다 약간 선배인 이미자가 ‘동백아가씨’ 이후 오랜 기간 ‘엘레지의 여왕’으로 트로트신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70년대에는 하춘화도 독보적인 사랑을 받았다.
트로트신과는 달리 팝 계열 음악은 얼마전 고인이 된 한명숙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에서 시작돼 패티김과 현미, 정훈희 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60년대에 남자가수 양대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와는 다르게 해서 확실하게 차별화에 성공한 남자 가수는 배호 정도다. 임진모 평론가가 특히 좋아하는 배호는 특유의 중저음으로 ‘돌아가는 삼각지’ 등을 불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그는 요절했다.
송대관은 배호보다 4살 아래다. 동시대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중가수가 노래를 불러도 10년간이나 반응이 없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송대관은 10년 넘게 참고 견뎌냈다. 중앙 무대에서 불러주지 않아도 밤무대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고생해서 ‘가수왕’이라는 타이틀을 따내고 생존에 성공하게 한 노래가 1975년에 낸 신곡 ‘해뜰날’이다. 자신이 직접 작사했으니, 가사들은 모두 송대관의 이야기다. 일종의 ‘서민판 성공 스토리’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비켜라. 안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해뜰날’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 개발독재시대에 어두운 부분 보다는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살면 좋은 날도 온다는 삶의 긍정성과 희망을 노래해 힘들게 고생하는 서민들에게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당시 ‘무작정 상경’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노래를 들으면 고향의 부모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송대관은 몇 년후 미국 이민을 떠나 10년만인 1989년 귀국해 ‘정 때문에’, ‘네가 뭔데’, ‘차표 한 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유행가’, ‘네박자’ 등 평범하면서도 삶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는 신곡들을 계속 발표했다.
트로트 가수는 히트곡 하나로 10년 넘게 먹고 사는 법인데, 매번 신곡을 발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 기조는 조금 뜸해지기는 했지만 나이 70대에 접어들어서도 이어졌다. 최근에도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등 방송 뿐만 아니라 행사 출연도 활발하게 했다. 집값을 내야 한다며 의욕적으로 일했다.
송대관은 태진아, 현철,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사대천왕’으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던 것도 신곡을 계속 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수로서 송대관의 역할은 ‘한(恨)의 정서’를 지닌 선배들의 정통 트로트에서 ‘흥(興)의 정서’를 지닌 후배들의 네오 트로트로 바뀌고 있는 변혁기에 정통 트로트의 무거움과 네오 트로트의 가벼움을 조화시키는 음악을 내놨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트로트 흐름을 수용하면서도 정통 트로트의 장점을 계승하려고 했다.
당시 송대관은 기자에게 “요즘 젊은 친구들이 트로트를 잘 부르는데, 그 노래들이 인생을 부르는 노래는 아니잖아. 재밌는 노래긴 하지만”이라면서 “트로트는 즐거울 때나 외로울 때나 위로할 수 있는 음악이야. 세월이 흐르면서 때가 묻어 있을 때 진정한 노래가 나오는 것이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송대관 씨를 몇차례 만나 인터뷰도 하고 밥도 먹어봤다. 만나자 마자 구수한 남도 사투리를 구사해 사람들을 웃겼다. 다른 사람이 전라도 사투리를 말해도 나는 웃지 않는데, ‘송대관 아저씨’가 말하면 무조건 웃겼다. 그가 한때 ‘개그야’ 고정코너에 나간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태진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디스전(험담)’을 만들어 낸 것도 송대관의 관용(?) 정신이 한몫했다. 이들은 원래 친구가 아니다. 요즘 말로 하면 ‘컨셉’이다. 처음엔 선후배 관계가 분명했다. 송대관이 가수왕 시절엔 태진아는 “말도 제대로 못붙였다”고 기자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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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과 태진아. 15년전인 2010년 인터뷰하면서 하면서 찍은 사진 |
송대관이 태진아보다 7살 위다. 하지만 둘은 동료나 친구 사이로 30년 우정을 이어왔다. 라이벌이 있어야 서로 발전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송대관은 ‘라디오스타’에 나와서도 예의 태진아를 흉보면서 홍보해 주는 네거티브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 가십과 화제를 만들어냈다. 김구라가 “아니 태진아 씨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이라고 하면 송대관은 “걔(태진아)도 지금쯤 어디서 나 흉보고 있을 텐데 뭘…”이라고 응수했다.
두 사람이 ‘라이벌 콘서트’라는 브랜드로 합동 공연을 열고, ‘이가탄’ CF에도 사이좋게 나오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바쁘면 방송이나 행사 리허설도 대신해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들에게는 가능하다.
송대관은 2010년 인터뷰에서 “솔직히 말해서 어쩔 때는 태진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을 때도 있지. 그런데 문제는 수익이 반으로 준다는 거지. 우린 정말 애증의 관계야”라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싸우는 걸 즐겨요. 태진아와 내가 붙으면 웃음부터 짓지. 생산적인 싸움이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태진아는 “예전에 이만섭 국회의장께서 은퇴 전에 후배들에게 ‘송대관 태진아 라이벌도 안 보냐, 그들과 같은 생산적 라이벌을 보고 배워라. 생산적인 라이벌 정치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거들었다.
송대관은 트로트 가수로는 드물게 영어로 된 팝송도 구수하게 소화한다. 이 점은 ‘라이벌’ ‘동반자’이자 이제는 ‘가족’이 된 태진아가 부러워한 점이기도 했다.
구수한 생명력의 ‘송대관 가수 아저씨’, 저 하늘 나라에서는 너무 바쁘게 뛰지마시고 휴식도 취하면서 하고싶은 노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