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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새해를 맞이하며 전 세계는 마치 100년 전을 떠올리 듯 양차 대전 사이 전간기(戰間期)와 비슷한 불안의 시대에 진입하는 듯하다. 1923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히틀러의 부상, 그리고 대공황으로 인한 일자리 소멸과 소득 급감이 있었던 시기다.
필자가 헤럴드경제에 첫 기고문을 쓰고 있는 지금, 세계 정치는 양극화돼 있으며 많은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노동소득 비중이 감소하고 있고, 경제적 불평등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인간이 그저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가 아니다. 인류를 이 실존적 위기의 벼랑 끝에서 구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파편화한 세계에서 아시아는 특별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대륙별로 비교했을 때, 아시아 경제는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다. 물론 북미와 유럽에 더 부유한 국가들이 존재하지만, 성장률 측면에서 아시아가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아시아는 마치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을 떠올리게 할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 1970년대만 해도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의 1인당 GDP는 미화 1000달러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2023년에는 미화 기준 인도 2480달러, 인도네시아 4876달러, 중국 1만2614달러, 한국 3만3121달러, 일본 3만3766달러, 싱가포르 8만4734달러다.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또 한 번의 성장 도약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국제 정세를 고려할 때, 전 세계 국가들은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아시아는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저축률과 투자율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중국은 전기차 및 기타 친환경 제품과 서비스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이는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에서 중국이 메이저 플레이어로 자리잡는 데 기여할 것이다.
마치 산업혁명이 GDP의 개념을 바꿔 놓았듯이, 디지털 혁명 또한 대변혁을 가져올 것이라 본다. 헬스케어와 교육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핵심 분야가 될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제약 산업을 보유한 인도는 헬스케어 분야에서, 한국은 교육 분야에서 글로벌 리더로 자리 잡고 있다. 전 세계 지식재산권 특허 등록 현황을 보면 상위 5개 국 중 미국을 제외하면 한국, 일본, 중국, 인도 모두 아시아 국가다.
이러한 경제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북미와 유럽에 비해 아시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정치적으로 훨씬 더 이질적이라는 점이다.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이 함께 협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통된 정치적 이념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Bretton Woods Conference)에서 전 세계를 위한 통일된 금융 체계를 구축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을 설립한 것이 좋은 예시다.
반면 아시아는 중국과 베트남의 일당 공산주의, 미얀마의 군부 권위주의,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선거 민주주의 체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체제가 혼재된 지역이다. 각국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정치 체제가 있겠지만, 그것이 실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결국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마치 샐러드 볼(salad bowl) 안에 각기 다른 재료가 섞여 있지만 하나의 샐러드를 이루는 것처럼, 지금 아시아에 필요한 것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할 수 있는 국제포럼을 결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아시아가 주도한 글로벌 비전을 담은 다자간 이니셔티브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1955년 개최된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이다. 수하르토(Suharto)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인도 초대 총리가 이끈 반둥회의는 아시아 국가들이 주축이 돼 세계 여러 지역의 대표들과 함께 조직한 국제 회의였다. 반둥회의는 식민 지배에서 막 벗어난 국가들의 비동맹 운동(Non-Aligned Movement)을 촉구하는 데 중점을 둔 정치적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이러한 국가들 간의 경제협력을 도모하려는 야심찬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아시아는 이러한 협력적 구상을 다시금 시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각국이 서로의 정치 체제 차이를 존중하거나 최소한 인정하며 협력을 통해 세계 평화와 세계 경제의 성장, 지속 가능성 그리고 형평성을 위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대부분 문제의 주요 원인은 불평등이다. 극심한 불평등 자체도 문제지만, 현대 디지털 세계에서는 부를 이용해 정보와 영향력의 플랫폼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불평등의 심화는 민주주의와 국민의 목소리를 짓밟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소수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거머쥐는 반면, 대중은 상대적인 부를 잃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마저 빼앗겨 사회의 작은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2025년 1월 20일 발간된 옥스팜(Oxfam)의 보고서 ‘생산자가 아닌 취하는 자가 지배하는 세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Takers not makers)’는 오늘날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조명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억만장자들의 자산 중 60%는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정경유착, 독점 권력, 상속 등을 통해 “취한 것”이라고 한다.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심화하고 있다. 또 다른 옥스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최고 갑부 8명이 보유한 재산 규모가 전세계 인구 절반의 총재산과 맞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언컨대 마치 우리 세대가 과거 조상들이 노예제와 강제 노동을 묵인했던 것에 충격을 받는 것처럼, 언젠가 후손들도 우리가 극심한 불평등을 용인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문제는 각국이 단독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과도한 조치는 자칫 자본 유출을 초래할 수 있다. 각국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지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여러 국가가 공동의 노력을 통해 재정 정책과 세제를 조정해 소수가 전 세계의 부를 독식하지 않는, 보다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고무적인 점은 부유층이 자신들이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음에도 소득 재분배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미상 수상자 영화감독 애비게일 디즈니(Abigail Disney)는 “앞으로의 미래를 낙관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정부 관계자들이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싶다면 정치적 결단력을 발휘해 저와 같은 부유층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시아 국가들은 세계 경제 성장의 동력을 재가동하기 위한 다자간 이니셔티브를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최근 과학 연구,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교육, 전기차 분야에서 거둔 성공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며, 여기에 약간의 결단력만 더해진다면 조율된 정책을 통해 어느 누구도 정부를 장악하거나 시민의 목소리를 묵살할 정도로 부를 독식하지 못하도록 불평등 문제에도 적극 대응할 수 있다.
카우시크 바수는 누구
미국 코넬대 경제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 2017~2021년 국제경제협회(International Economic Association) 회장을 역임했다. 세계은행(WB)에선 수석 부총재 겸 수석 경제학자(2012~2016년)로 일했다. 2009~2012년 인도 정부의 수석 경제 자문관을 지냈다. 영국 런던정경대(LSE)에서 경제학 박사학위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인도 델리의 세인트스티븐스 칼리지에서 학사를 했다. 뉴욕타임스, 비즈니스스탠다드 등 유력 잡지와 신문에 칼럼을 기고했다. 2008년 5월엔 인도 정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