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女포로 데려와라, 빼앗겠다” 어이없는 갑질…결국 터질 게 터졌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트로이 전쟁④편]

[141 신화편. 트로이 전쟁④]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포로를 빼앗다
딸 돌려달라고 호소한 아버지 내쫓고
끝내…신과 영웅 모두가 분노한 사태


장 밥티스트 앙리 데자이, 아킬레우스의 천막에서 끌려나온 브리세이스(일부 확대), 1761년경, 캔버스에 유채, 83×78.5cm, Muse des Augustins


윌리엄 페이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말다툼(일부 확대), 1832년경, 패널에 유채, 25.2×38.1cm,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편집자 주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처음부터 정주행하셔도 좋고, 시즌별로 봐도 좋고, 각 이야기를 단편처럼 읽으셔도 좋습니다.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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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①바다 건너 트로이성 함락을 위해 항구에 모인 그리스 연합군은 바람이 불지 않는 뜻밖 변수로 발이 묶인다.

②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네 딸을 신에게 바치면 일이 풀릴 것”이라는 잔인한 예언을 따르기로 한다. 이번 돌발 상황은 아가멤논이 행한 신성모독으로 빚어진 심판이었기에.

③아가멤논은 딸을 유인한다. 출정에 앞서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와 딸 사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온 딸은 당황하고, 원치 않게 계책에 휘말린 아킬레우스도 모욕감을 느낀다.

④딸은 전말을 듣는다. 아무 죄도 없는 그녀는 결국 본인이 몸을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딸이 희생한 후, 거짓말처럼 순풍이 불어온다.

⑤그리스 연합군은 이 바람을 타고 트로이 땅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 대한 앙금을 조금도 털지 않은 상태였다.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트로이 전쟁③편 > 요약
분노한 백발노인의 정체


프리드리히 프렐러 주니어, 해변의 크리세스(일부 확대), 1899


백발노인이 걷고 있었다.

볼이 움푹 들어간 노인은 아폴론 신전을 향해 움직였다. 그는 힘없이 가다가도 수시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스 연합군의 자객이 몰래 칼을 꽂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었다. 지금 노인은 치를 떨고 있었다. 차오르는 공포와 분노가 심장을 쿵쿵 뛰게 하고 있었다. 당장 그의 주름살에 깊이 박힌 감정은 이 둘말곤 없었다.

어느덧 노인의 발이 아폴론 신전 입구에 닿았다.

노인의 이름은 크리세스였다. 그는 아폴론을 섬기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제였다. 원래라면 그는 대리석 기둥이 감싼 이 신전의 웅장함에,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감이 주는 위압감에 또 한 번 경의를 표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의 여유 따위 없는 상황이었다.

프리드리히 프렐러 주니어, 해변의 크리세스(일부 확대), 1899


노인 크리세스는 곧장 신전 내실로 향했다.

바로 앞에 빛나는 아폴론 동상이 있었다. 크리세스는 무릎부터 꿇었다. 그다음, 눈을 감은 채 입을 뗐다. “아폴론 신이시여.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크리세스는 차오르는 울컥함을 다시 억눌렀다. “제가 지은 신전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제가 바친 제물이 불경스럽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는 크리세스의 목소리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프렐러 주니어, 해변의 크리세스, 1899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가 고개를 떨군 채 길을 걷고 있다. 아가멤논에게 딸을 돌려받지 못한 그의 표정은 근엄하다. 하늘에는 크리세스의 기도에 응한 아폴론의 모습이 보인다. 활과 화살통으로 무장한 아폴론은 그리스 연합군의 함대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제게 모욕을 준 아가멤논을 심판해주소서. 신의 화살로 그리스 연합군을 응징해주소서.”

크리세스는 기도를 마치고 바짝 엎드렸다. 얼마 후, 크리세스는 어떤 음성을 받은 듯 눈을 번뜩였다. 그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천천히 물러섰다. “…제 뜻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과 함께.

트로이를 치기 위해 바닷물을 가르고 온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

그는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아르테미스에 이어, 어쩌다 아폴론의 사제에게까지 저주를 받게 됐을까. 이 일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가 재차 틀어지는 데도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만다.

기어코, 양군 대치하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테티스와 미네르바(아테나), 17세기경, National Museum of Fine Arts


시간을 거슬러 그리스 연합군이 끝내 트로이 대륙에 처음 닿은 무렵.

그리스 연합군 장수와 병사들은 배에서 먼저 내리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가장 빨리 트로이 땅을 밟는 자는 가장 빨리 죽으리라.” 함께 온 예언자 칼카스의 경고 탓이었다.

이런 말을 무릅쓰고도 육지에 첫 발을 디딘 이는 프로테실라오스였다.

그는 과거 헬레네와 구혼자들 사이 ‘맹세’로 인해 함께 온 도시 국가(퓔라케)의 왕이었다. 사실, 원래는 연합군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와 가장 뛰어난 참모 오디세우스가 프로테실라오스보다 더 앞장서 나서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가 황급히 막아 걸음을 멈춰야 했다. 오디세우스는 땅을 밟는 척하곤 자기 방패를 바닥에 깔았다. 그러곤 그 위에 올라섰다. 배에서 내리기는 했지만, 정확히는 방패 위에 있을 뿐 땅과 발이 닿은 것으로는 볼 수 없었다. 예언을 피하기 위한 기막힌 잔꾀였다.

그렇게 먼저 땅을 밟게 된 프로테실라오스는 곧 트로이군이 던진 창을 맞고 허무하게 죽었다. 칼카스의 말은 또 한 번 이뤄지고 말았다.

루이 실베스트르, 소문의 여신 파마, 18세기경


그런데, 트로이군은 그리스 연합군이 이날 이 해안으로 올 것을 어떻게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등에 따르면 소문의 여신 파마가 역할을 다했다고 한다. 천개의 창문이 달린 산꼭대기 집에 사는 파마가 무수한 눈과 혀, 귀와 깃털로 상황을 마구 떠들고 다녔다는 이야기다. 트로이군은 그런 파마 덕에 진작부터 철벽의 진을 칠 수 있었다는 설이다.

다만, 트로이군은 파마로 인한 요행에만 기대지는 않았다.

과거 포세이돈과 아폴론이 직접 쌓올린 탄탄한 성벽, 헥토르라는 걸출한 용장, 그런 그를 중심으로 뭉친 트로이와 그 주변 국가들…. 그리스 연합군이 전의를 다지는 사이 트로이군 또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대번에 인정해야 했다. 트로이군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점을.

아킬레우스 대 퀴크노스


드디어 양측 사이 불꽃이 튀었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은 곧장 한 차례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장수가 있었다. 트로이군 진영에서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육중한 존재, 퀴크노스였다. 그리스 연합군을 노려보는 그는 트로이 남쪽에 있는 작은 국가(콜로나이)의 왕이었다. 특이점은, 그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리스 연합군을 돕고 있었지만, 그는 나라의 지도자 입장에서 기꺼이 트로이군 쪽에 선 상황이었다.

그런 퀴크노스는 벌써 그리스 연합군 병사 수백을 제압하고 있었다.

과연 올림포스 신 중에서도 강하기로 손꼽히는 신의 아들이었는지, 퀴크노스는 무기가 통하지 않는 몸을 갖고 있었다. 이는 본인 또한 무적의 피부를 가진(엄밀히 말하면 약점은 있지만) 아킬레우스 말고는 저 반인반신을 제압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점을 의미했다.

안토니오 템페스타, 아킬레우스와 퀴크노스의 싸움, 1606 그리스 연합군의 아킬레우스와 트로이군 편을 든 퀴크노스가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다. 아킬레우스도, 퀴크노스도 상처받지 않는 몸을 갖고 있기에 싸움은 하세월 길어지고 있다. 결국은 아킬레우스가 퀴크노스를 질식시켜 이긴다. 퀴크노스가 죽기 직전 백조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설에 따라, 이 전사의 등 뒤에는 커다란 날개도 함께 그려져 있다.


전투는 어느 순간부터 아킬레우스 대 퀴크노스의 일 대 일 대결로 좁혀졌다.

그 대단한 아킬레우스조차도 처음에는 퀴크노스의 단단한 피부에 당황했다. 칼이 찔리지 않을 리 없고, 창이 박히지 않을 리 없는데도 상처조차 내지 못하자 얼마간은 제 실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아킬레우스는 수십차례 합을 맞춘 후 퀴크노스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때부터 무기를 내려놓았다. 퀴크노스의 목덜미를 잡아끌어선, 곧장 양팔로 숨통을 조였다. 그렇게 질식시켜 죽여버렸다. 여기에는 죽음이 임박한 퀴크노스가 백조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다는 설도 있다.

연합군, 전략을 바꾸다


존 윌리엄 고드워드, 브리세이스, 1896, 캔버스에 유채, 83.2x73cm, 개인소장


아킬레우스 덕에 퀴크노스는 겨우 제압했지만, 그리스 연합군 입장은 이번 전투로 재차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군 중에서는 그들의 총사령관 헥토르만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직 그만 의식하면 될 뿐, 헥토르를 뺀 모든 장수는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트로이군 안에도 뛰어난 장수가 있다는 점, 헥토르만큼은 아니지만 그곳 또한 역전의 용사가 즐비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군의 힘을 서서히 빼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정면 대치를 피하는 한편, 트로이성 주변의 동조 국가와 이웃 도시를 하나씩 깨부수는 방식이었다. 숨통을 서서히 조여가는 고립 작전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성 인근의 열두 국가와 도시부터 쳤다. 결국은 가장 저항이 심했던 테베까지 함락할 수 있었다.

장 밥티스트 앙리 데자이, 아킬레우스의 천막에서 끌려나온 브리세이스, 1761년경, 캔버스에 유채, 83×78.5cm, Muse des Augustins


그사이 아킬레우스는 언제 어디서든 앞장섰다.

그는 테베와의 치열한 전투 후에는 크리세이스라는 여인을 잡아왔다. 또, 테베의 인근 도시를 무너뜨린 뒤에는 브리세이스라는 여인도 데려올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두 여인을 첩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런 가운데, 아가멤논이 갑자기 아킬레우스의 천막을 찾았다.

“모든 전쟁에선 총사령관이 가장 큰 영광을 쥐어야 하는 법이오.” 아가멤논이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두 여성 중 적어도 자기가 고른 한 명은 넘기라는 얘기였다. 그런 그가 택한 여인은 크리세이스였다. 아가멤논은 그녀를 품에 낀 채 유유히 사라졌다. 아킬레우스는 분했다. 하지만, 아가멤논의 말이 당시 군 관례로 보면 틀리지만은 않았다. 또 한 번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


“남은 곳은 트로이성밖에 없군.”

흡족한 표정으로 본부에 돌아온 아가멤논은 잠자리에 들기 전 지도를 펼쳤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제는 정말 트로이성 하나뿐이었다. 주변 일대 땅에서는 검은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가멤논은 정비가 끝나는대로 모든 군을 트로이성으로 진격시킬 생각이었다. 빽빽하게 에워싼 후 자진해서 기어나오기를 기다릴 요량이었다. 동료 국가와 도시를 모두 잃은 트로이군은 서서히 말라죽을 게 확실해보였다.

“총사령관님.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한 군사가 아가멤논의 단상을 멈추게 했다. “누구인가?” “백발노인인데…. 뿜어내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서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총사령관님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들어오라고 하라.” 노인, 아폴론을 섬기는 사제 크리세스는 그렇게 아가멤논 앞에 설 수 있었다. 꾸벅 인사한 그는 찾아온 이유를 곧장 밝혔다. “당신이 제 딸 크리세이스를 데리고 이곳으로 오는 걸 봤습니다. 뜻하지 않게 전리품이 된 제 딸을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아가멤논의 문전박대


야코포 알렉산드로 칼비, 아가멤논에게 크리세이스를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아버지 크리세스, 1815년경 아가멤논이 크리세스를 위협하고 있다. 딸 크리세이스를 되찾기 위해 온 크리세스는 힘없이 밀려나는 모습이다. 이 노인은 아폴론의 상징인 월계관까지 들고 있지만, 아가멤논은 그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딸 크리세이스는 이 장면을 슬픈 눈빛으로 보고만 있을 뿐이다.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야 하는가.”

“제 딸 크리세이스를 풀어주시면…. 저 또한 막대한 몸값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아가멤논은 크리세스의 이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간의 정복 덕에 돈과 보석 따위야 아쉬울 게 없었다. 부족하면 언제든 또 약탈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인을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풀어주지 않겠소.”

“아니, 그러지 마시고….”

“그대의 딸은 내가 바다 건너 집까지 데려가 노파로 만들겠소.”

아가멤논은 크리세스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했다. “허황한 소리는 그만하고 물러나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크리세스를 두 팔로 밀쳤다. 그는 부녀의 짧은 상봉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무사히 돌아가고 싶다면…. 나를 더 이상 자극하지 마시오.” 아가멤논은 하릴없이 버티려는 크리세스에게 이 따위 말이나 던졌다. 협박하듯 칼자루까지 만지작거렸다.

야코보 알렉산드로 칼비, 그리스인에게 역병을 보내도록 아폴론을 설득하는 크리세스, 1815


크리세스는 여기서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래서 곧장 뒤돌아선 후, 혹시나 암살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아폴론 신전으로 터덜터덜 걸어간 것이었다. 크리세스의 기도를 들은 아폴론은 아가멤논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아폴론 입장에선 그의 여동생 아르테미스에 이어, 자기 사제조차 그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아폴론은 원래도 트로이 편이 아니었던가.

아폴론, 화살로 심판하다


작자미상,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일부 확대), 18세기경


심판의 명분을 얻은 아폴론은 곧장 활을 쥐었다.

그리스 연합군의 진지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 선 채, 아흐레간 쉴 새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스 연합군은 난데없이 쏟아지는 화살 비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사이 수많은 병사와 말은 온몸에 구멍이 뚫린 채 신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쌓여가는 시신 틈으로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재앙이 열흘째 되는 날, 아가멤논이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대체 누가 아폴론의 분노를 샀는가. 트로이성을 눈앞에 두고 퇴각해야 할 판이오!” 아가멤논은 씩씩거렸다. “…총사령관이시여. 제가 며칠 밤낮으로 점을 쳐봤습니다.” 칼카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결과는 늘 같았습니다. 재앙의 원인은 총사령관, 또 당신입니.칼카스는 아가멤논의 반응이 두려운 듯, 아킬레우스 옆에 꼭 붙어있었다.

작자미상,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 18세기경


“얼마 전 당신이 멸시하며 쫓아낸 자가 아폴론의 사제라는 걸 정녕 모르셨습니까.

“그 백발노인 말인가?”

“맞습니다. 그 사람, 크리세스에게 그의 딸 크리세이스를 돌려주십시오. 또, 사죄의 뜻으로 소와 양을 합쳐 백 마리도 함께 지불하십시오. 그렇지 않고선 상황이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아가멤논의 얼굴은 분노와 굴욕감으로 시뻘게졌다. 무엇이라도 집어 던져서 깨부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 지금도 화살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역병이 진지를 뒤덮고 있었다. 아가멤논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소. 내가 비록 고향에 있는 내 아내보다 크리세이스를 더 좋아하게 됐지만, 신의 뜻이 그렇다면 거기에 따르겠소.” 아가멤논이 말하자 장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윌리엄 페이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말다툼, 1832년경, 패널에 유채, 25.2×38.1cm,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다만.”

아가멤논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또다시 희생하는 만큼, 이에 따른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겠소.” 아가멤논은 이미 뜻을 굳힌 양 모두를 천천히 노려봤다.

아가멤논 대 아킬레우스, 결국 터졌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사이 분쟁(일부 확대), 1895, 캔버스에 유채, 149x222cm, 우아즈 미술관


“이미 각자 몫으로 돌아간 전리품을 다시 나눌 수는 없지 않습니까. 트로이성을 무너뜨리면 우리보다 세 배, 아니 네 배의 보상을 챙기십시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받아야겠소. 지금 말하는 그대 아킬레우스의 것이든, 오디세우스나 아이아스의 것이든 상관없소.”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제안을 딱 잘라 끊었다.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릴 모습이었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사이 분쟁, 1895, 캔버스에 유채, 149x222cm, 우아즈 미술관


“아킬레우스. 자네가 희생하겠소?” 아가멤논이 물었다. “내가 피땀으로 얻은 전리품을 또 빼앗아가겠다는 겁니까? 나는 그간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단 한 번도 당신과 전리품을 동등하게 받은 적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껏 감정이 쌓일 만큼 쌓인 아킬레우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앙심이 얼마나 컸는지, 이 사이로 피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아가멤논이 여기에 대고 응수를 하기도 전에, 아킬레우스는 결심한 듯 끝말을 덧붙였다. “나는 이런 모욕을 받으며 여기 있을 이유가 없소. 군사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겠소.”

“그러시오. 옹졸한 겁쟁이는 그리스로 도망치시오. 나는 크리세이스를 내주는 대신, 그대의 또 다른 첩 브리세이스를 취하리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경고를 비웃음으로 받아쳤다. 그의 쏟아지는 폭언에 아킬레우스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이제는 당장 그를 때려눕혀 목을 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허리춤에 걸친 칼을 꺼내려는 순간….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아킬레우스의 분노, 1757, 프레스코화, 빌라 발마라나 아이 나니 아테나가 아킬레우스의 머리채를 잡고 있다. 격분한 아킬레우스가 칼을 뽑아 들고 아가멤논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와중이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기세에 놀랐는지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테나가 말리지 않았다면 누구든 피를 봤을 게 분명하다.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여. 참거라.”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네 분노가 쓰일 곳은 따로 있을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이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가멤논은 그런 아킬레우스의 모습에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크리세이스를 풀어주고, 아킬레우스의 첩인 브리세이스를 데려오라.” 다른 장수들은 아가멤논의 폭거(暴擧)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화살 세례와 전염병의 재앙을 잠재우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벤저민 웨스트, 아버지에게 돌아온 크리세이스, 1771, 캔버스에 유채, 142x188cm, 뉴욕 역사협회


딸 크리세이스를 되찾은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는 저주의 기도를 멈췄다.

아폴론 또한 더는 명분이 없기에 활을 거뒀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고 그친 듯, 그리스 연합군 진지는 평화를 되찾았다.

노래하소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티슈바인, 아킬레우스의 천막에서 끌려가는 브리세이스, 1773, 캔버스에 유채, 85x69cm, 함부르크 미술관


아킬레우스는 앞서 못박은 대로 그의 병사들과 함께 배로 돌아갔다. 그는 결코 전장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아킬레우스는 바다를 봤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아킬레우스를 위로하는 테티스, 1757, 프레스코화, 300x200cm, 빌라 발마라나 아이 나니 바닷물에서 올라온 테티스가 실의에 빠진 아킬레우스를 위로하고 있다. 모든 의욕을 잃은 아킬레우스는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있다. 함께 분노하는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의 청이 무엇이든 들어줄 것 같은 모습이다.


“어머니.”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이 말 한마디에 물 위로 떠올랐다. 아킬레우스는 테티스를 보자 감정이 북받친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저를 무시한 그리스 연합군이 이번 전쟁에서 밀려나도록, 저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제우스께 부탁해주세요. 아킬레우스는 마음을 다해 말했다. “살면서 이런 치욕감을 느낀 적은 없습니다.”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알았다. 제우스라면 내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테티스는 사라졌다. 모습을 보인 물로 돌아가지 않고, 증발하듯 하늘로 천천히 올라갔다.

아킬레우스의 진노는 트로이 전쟁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신들은 또 어떤 형태, 어떤 방식으로 끼어들고 참견할 것인가. 영웅들은 어떻게 순응하고, 저항할 것인가. 이들 모두 정해진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 섰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후암동 미술관 특별 大기획 : 트로이 전쟁> 읽는 순서


①“감히 날 무시해!” 홧김에 파놓은 함정 때문에…결국 온세상 난리났다 (24. 12. 7.)

②“못 찾을 뻔했다” 설마 여장남자로 숨어있을 줄은…어떻게 찾았나했더니 (24. 12. 21.)

③“잘못은 父가 했는데” 눈가린채 화형대에 선 딸…그녀는 끝까지 울음 참았다 (25. 1. 25.)

④“네 여자 포로, 내가 빼앗겠다” 어이없는 갑질…결국 터질 게 터졌다 (25. 2. 7.)

<참고 자료>


트로이, 호메로스, 로즈, 엔북

일리아스, 호메로스, 숲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디스 해밀턴, 현대지성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 트로이 전쟁, 스티븐 프라이, 현암사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열린책들

클로드 로랭, 크리세이스를 그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는 오디세우스, 1650, 캔버스에 유채, 119x150cm, 루브르 박물관


기자의 말풍선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짐작하셨겠지만,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일리아스>의 첫 문장이기도 합니다. 즉, 다음 화부터 3회 가량은 일리아스의 내용을 다루게 됩니다. 트로이 전쟁의 대기획 안에 있는 일리아스 3부작 정도로 보셔도 되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현재 <인물편>과 <신화편>이 각각 2주 간격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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