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서 왜 꽃향기가 나야 하냐”…향수를 알면 시대가 보인다[북적book적]

신간 ‘향수의 계보학’…여성 인권 발전·소비 문화 변화 반영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명품 브랜드 샤넬이 1921년 출시한 ‘No.5’. 100년 넘게 사랑 받아 온 이 향수는 아름다운 향으로 유명한 고전이 됐지만 사실 지금의 이미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탄생했다.

1920년대 초반 귀족이나 돈이 많은 여성들은 꽃 향만 나는 단일 향을 선호했고, 고급 매춘부들은 자스민과 머스크 같은 향을 썼다. 코코 샤넬은 “여성에게서 왜 꽃향기가 나야 하냐”고 반문하면서 단일 꽃 향도 아니고, 자스민과 머스크 향도 들어가면서 깨끗한 알데하이드가 들어간 향을 만들었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인 향, 알데하이드의 깨끗한 향을 현대적이라고 여긴 전복적 발상이었다.

빈티지 향수 콜렉터 ISP의 신간 ‘향수의 계보학’은 18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140년간의 주요 향수들과 그 역사적 배경을 소개한다. 고전 향수는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동시대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하나의 향수에는 다양한 향조가 들어간다. 향조들을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향수의 느낌이 달라지는데,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가 시대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한 시대에 유행하는 향은 당시의 사회적 맥락, 문화, 기술 등을 반영한다.

현대 향수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합성 향료를 넣을 수 있게 되면서 탄생했다. 1889년 출시된 겔랑의 ‘지키’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향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0년대에도 평화로운 벨 에포크 시대를 회상한 향수가 나온 것은 전쟁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다.

향수는 역사적으로 드물게 여성 소비자를 핵심 타깃으로 만들어진 사치품으로, 여성 인권의 발전과도 맞닿아 있다.

1937년 나온 스키아파렐리의 ‘쇼킹’은 여성의 성적 욕구나 욕망에 매우 폐쇄적이었던 당시 여성의 상체를 모티브로 한 향수를 내고, 광고에 나체인 여성을 등장시키는 파격을 선보였다.

여성을 겨냥한 상품이지만 남편이 사 주는 선물이었던 향수는 합의 이혼이 합법화된 1970년대 이후에야 여성이 선택하는 취향이 된다. 여성들은 자연스러운 것과 독립적인 여성상을 추구했고 그린, 허브, 시트러스 향을 사용한 향수가 잇따라 나왔다.

1980년대에는 1970년대가 추구한 미학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 아래 화려하고 강렬한 향이 인기를 끌었다. 반면 1990년대에는 1980년대의 에이즈 유행으로 인해 위생에 신경 쓰게 되면서 깨끗하고 가벼운 중성적 향이 유행했다.

2000년대에는 유명 여성을 내세운 셀러브리티 향수와 함께 구어망드 계열의 달콤한 향이 주목 받았다. 한편에서는 대중적인 향수에 반감이 생기며 니치 향수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우디 향의 재발견에 이어 2020년대에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향이 다시 사랑을 받게 됐다.

이 책은 단지 사치품으로 여겨졌던 향수를 역사와 문화를 담은 사료로 다시 보게 한다. 저자가 수집한 빈티지 향수 47종의 사진과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 주는 향수 광고 포스터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향수의 계보학/ISP 지음/파이퍼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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