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만에 대중 만난 겸재 ‘연강임술첩’
S2A, ‘필과 묵의 세계: 3인의 거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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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백운동, 1730, 종이에 수묵담채. [S2A]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8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했고, 19세기 최고 서예가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서예를 확장해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펼쳤다.
20세기 추상화가 윤형근(1928~2007)은 그와는 정반대로 극한의 미니멀리즘으로 자신을 좁혀 나갔다. 서로 다른 시대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세 사람이지만, 그 예술적 뿌리는 모두 ‘필(筆)과 묵(墨)’에 있었다.”
서울 강남구 S2A에서 진행되는 ‘필과 묵의 세계: 3인의 거장’ 전시 기획을 맡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가 이같이 말했다. 그가 전한대로, 한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필과 묵이 시대와 사유를 가로질러 어떻게 새롭게 해석돼 이어져 왔는지를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는 전시다.
유 교수의 어깨 너머로 산수를 유유히 흐르는 겸재의 필선, 거침없는 추사의 서체, 윤형근의 검지만 검지 않은 먹빛 추상 색면이 오롯이 녹아든 작품 40여점이 서로 대화하듯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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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획 배경을 설명하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이정아 기자 |
전시장에서 만난 유 교수는 전시 기획의 출발점이 된 작품으로 겸재의 노년 명작으로 대표되는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을 꼽았다. 그는 “개인 소장가로부터 이 작품을 빌릴 수 있게 되면서 전시를 시작하게 됐다고 해도 무방하다”라며, 그 의미를 특별히 강조했다.
연강임술첩은 정선이 66세에 그린 회화로, 연강(임진강)의 진경이 담겼다. 10월 보름날 경기도관찰사였던 홍경보는 경기 동부지역을 순시하다가 삭녕(연천)에 있던 우화정으로 관내 연천현감 신유한과 양천현령 겸재를 불러 함께 뱃놀이를 즐겼다. 겸재는 이날의 풍경을 ‘우화등선(우화정에서 배를 타고)’, ‘웅연계람(웅연나루에 닻을 내리고)’ 두 점의 그림으로 기록했다.
여기에 홍경보의 서문과 신유한의 글이 더해지면서 세 벌의 연강임술첩이 제작됐고, 세 사람이 각자 한 벌씩 나눠 가졌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연강임술첩은 겸재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2011년 동산방화랑에서 열린 전시 이후 14년 만에 대중에게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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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연강임술첩 중 ‘우화등선’, 1742, 종이에 수묵담채. [S2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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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연강임술첩 중 ‘웅연계람’, 1742, 종이에 수묵담채. [S2A] |
겸재와 추사, 그리고 윤형근의 작품이 각각 한 점씩 서로 조우하는 전시장 초입 공간 배치가 눈에 띈다. 서로 다른 미적 요소를 가진 세 작품이 교차하며 전통과 현대,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하늘을 상징하는 군청색과 땅을 상징하는 암갈색의 절제된 윤형근의 단색조 회화 좌우로 소나무 아래 영지버섯을 섬세하게 그린 겸재의 수묵담채 ‘수송영지도’(壽松靈芝圖)와 67세의 추사가 북청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허허롭고 무심한 경지에서 쓴 대련 서예 작품인 ‘대팽고회’(大烹高會)가 자리한다.
한평생 생과 예술을 탐구해온 이들이 표현해낸 본질에는 공통적으로 인간 존재의 덧없음과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바라보는 듯한 성찰이 자리한 것처럼 느껴진다.
유 교수는 “45년 전 당시로서는 크게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던 윤형근을 인터뷰했었는데, 그가 자신의 붓질 뿌리에 추사에 있다고 했다”며 “심한 비약이기도 하고 심한 자화자찬 같다고 생각해 그 말을 당시 내 글에 담지 않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지금 되새겨보니 그의 중요한 예술적 고백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윤형근의 화실엔 추사의 나무 현판이 걸려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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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대련, 대팽고회, 1853, 종이에 먹. [S2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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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Umber-Blue, 1975, 린넨에 오일. [S2A] |
이밖에 상투적인 관념산수에서 탈피한 겸재의 진경산수 ‘서울 백운동’(白雲洞), ‘평해 월송정’(越松亭), ‘낙화암’(洛花岩) 등 명품도 만날 수 있다. 화폭 속 무리 지어 있는 우리나라 산천 곳곳의 소나무 모습마다 겸재만의 독특한 필법과 묵법이 두드러진다.
간찰(편지), 시고(원고), 편액(현판) 등 대표 작품들이 시대와 형식에 따라 소개되는 추사의 독창적이고도 조형미 넘치는 서체도 놓칠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특히 중년의 39세, 제주 유배 시절인 62세, 과천 시절인 71세 등에 쓰인 추사체의 변천 과정은 그의 예술적 성장과 내면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궤적이다. 마치 필법을 하듯 즐겨 그린 추사의 난화도 만날 수 있는데, 난줄기마다 그가 자유자재로운 서체로 드러내고자 한 내면의 감정이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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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기획 배경을 설명하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이정아 기자 |
유 교수는 “한 사람이 쓴 글씨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추사의 서체는 여러 차례 변모했다”며 “‘고전으로 들어가 새것으로 나온다’는 입고출신의 창작 자세로 그가 획득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S2A는 글로벌세아그룹 계열사인 세아상역이 운영하는 전시 공간으로, 고미술을 주제로 한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품을 한데 모아 구성됐다. 전시는 3월 22일까지. 무료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