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징역 1년 6개월 실형→2심 무죄
대법, 유죄 취지로 뒤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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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관련 이미지.[헤럴드경제DB] |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A씨가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으로 전락하게 된 배경이다. 여행업체의 실상은 보이스피싱이었다. 피해자들에게 현금을 받아 조직에 송금한 혐의를 받은 A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이용당한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1심에선 징역 1년 6개월 실형이, 2심에선 무죄가 선고됐다.
하급심(1·2심)에서 판단이 엇갈리자 대법원이 교통 정리에 나섰다. 대법원의 최종 판단은 어땠을까.
보이스피싱 조직의 범행은 치밀했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속여 “저금리 대출이 가능하다”며 “대출을 원하면 기존 새마을금고 대출금을 모두 갚아야 한다. 우리 직원에게 대출금을 전달하면 완납 증명서를 떼줄 것”이라고 했다. A씨는 피해자들을 찾아가 현금을 받은 뒤 조직에 송금하는 역할이었다.
조직은 A씨에겐 또다른 거짓말을 늘여놓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사무실 문을 닫아 고객들을 직접 찾아가고 있다”며 “여행 경비를 전달받으면 지정된 계좌로 입금하라”라고 지시했다. 범행 과정에서도 A씨에겐 찾아갈 장소, 수금할 금액, 상대방에게 밝힐 소개문구 정도만 대략 텔레그램으로 알려줬다.
같은 수법으로 A씨는 2022년 3월께 약 23일 동안 5명의 피해자를 찾아가 총 1억 2000여만원을 현금으로 수거한 뒤 조직에 송금한 혐의를 받았다. 1억 2000만원 중 A씨가 일당으로 받은 돈은 100만원 정도였다. 검사는 A씨를 “사기, 사문서위조 등 혐의로 실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심의 판단은 유죄였다. 1심을 맡은 대전지법 천안지원 이세훈 판사는 지난해 4월, 징역 1년 6개월 실형으로 엄벌을 택했다.
1심 재판부는 “A씨의 행위는 피해금액을 수령하는 행위 등으로 보이스피싱 범행을 완성하는 것에 해당한다”며 “A씨가 세부적인 범행 계획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범행에 가담한 게 인정된다”고 했다.
이어 “보이스피싱 범행은 죄질이 매우 좋지 않을 뿐 아니라 피해자들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심각하다”며 “범행에 일부만 가담한 조직원이라도 엄중히 처벌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할 필요가 크다”고 양형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에게 피해 회복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점은 불리한 사정이나 전체 편취액에 비해 A씨가 얻은 이익은 적은 점, 과거 벌금형으로 1회 처벌받은 것 외에 다른 전과가 없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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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에선 무죄로 판단이 뒤집혔다. 2심을 맡은 대전지법 4형사부(부장 구창모)는 지난해 8월, 1심 판결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A씨 변호인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받아들였다.
보이스피싱 범죄를 근절하는 근본적인 방법은 조직을 엄단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직 적발이 어렵다는 이유로 조직에게 이용당한 사람만 엄하게 처벌하는 건 부당합니다. 보이스피싱 조직의 책임을 이용 당한 개인에게 모두 떠넘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심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범행의 특성을 고려하면 피해자들과 범행의 도구로 이용된 사람들 모두 객관적으로 보면 상식에 맞지 않는 말에 속아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며 “범행의 도구로 이용된 사람들에 대해 범행의 주관적인 고의를 쉽게 인정할 수 없다”고 전제했다.
이어 “조직은 A씨에게 정상적인 여행 업체에 채용되는 것처럼 접근해 신분증 제출을 요구했다”며 “비록 면접을 보진 않았으나 당시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면 비대면으로 채용 절차가 이뤄지는 것에 대해 A씨가 크게 의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A씨는 일당 지시에 따라 현금 수거 업무를 기계적·반복적으로 수행했다”며 “해당 지시 내용만으론 사기 범행의 일부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없으며 A씨 입장에선 정상적인 여행사 아르바이트 업무를 하게 됐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는 “조직 연결책은 A씨에게 매일 오전 9시 정장 차림으로 인상착의를 촬영해 보낼 것을 요구했다”며 “A씨는 처음 경찰 조사를 받았을 때 조직 측에 텔레그램으로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져 묻기도 한 점 등을 고려했을 때 보이스피싱 범행의 미필적 고의 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16세에 아이를 출산해 홀로 양육하며 여러 아르바이트만 해봤을 뿐 별다른 사회 경험이 없는 점, 보이스피싱 관련 수사 및 처벌 전과가 없는 점 등도 주요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2심의 무죄 판단은 대법원에서 깨졌다. 대법원의 최종 결론은 ‘유죄’ 였다. 대법원 2부(주심 대법관 박영재)는 “원심(2심) 판단은 수긍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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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여러 사정을 종합해서 보면 A씨에겐 적어도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판시했다. 미필적 고의란 ‘사기를 저지르겠다’는 확정적 고의와 구별되는 개념이다. ‘사기라도 상관없다’는 정도로 사기의 가능성은 인지한 상태를 뜻한다.
대법원은 “보이스피싱 범행은 총책, 관리책, 모집책, 유인책(콜센터), 현금인출책, 현금전달책 등으로 나뉘어 고도의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운영 현실을 고려할 때 반드시 보이스피싱 조직의 실체와 전모를 전부 파악하고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했다.
이어 “채용 과정에서 A씨는 별도의 면접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다”며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이례적이라 A씨 입장에서도 비상적이거나, 이례적인 절차로 거액의 현금수거 업무를 맡게 된 점은 알 수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A씨는 건당 약 20만원의 수당을 받아 일반적인 아르바이트 대가보다 큰 액수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며 “A씨가 피해자들에게 준 ‘완납증명서’ 등은 채무 관계에 관한 내용이라 여행업체 업무와 무관하므로 A씨도 해당 문서가 거짓으로 작성된 것임은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아울러 “범행 당시 A씨가 24세의 성인으로 사회 경험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건전한 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가진 일반인의 관점에선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하는 것을 미필적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은 “그럼에도 무죄를 선고한 원심(2심)은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며 유죄 취지로 다시 판단하도록 사건을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
이로써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A씨는 향후 4번째 재판에서 유죄 판단을 받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