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유산, 당연히 K-오케 대표주자가 연주해야”[서울시향 만난 SM]

서울시향 웨인린 부악장 등 단원 인터뷰
국내 교향악단 최초 K-팝 연주한 선구자
“이것 자체로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탄생”


라이즈 ‘붐 붐 베이스’ 오케스트라 버전 MV 속 웨인린 부악장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사방이 암흑인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문화비축기지. 화사한 조명과 잘 가꿔진 무대 위에만 섰던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 60여 명이 악보를 펼쳤다. 4세대 K-팝 그룹 에스파의 ‘블랙맘바’ 오케스트라 버전 악보였다.

“사실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고, 이렇게 찍어서 뮤직비디오가 되는 건가 싶었는데 너무 멋지게 나왔더라고요. (웃음)” (바순 정수은 단원)

뮤직비디오 촬영일지라도 ‘손싱크’는 금물. 어둡고 꽉 막힌 옛 석유비축기지 안에서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바순을 불며 진땀을 뺐다. 결과물이 좋았다. 거대한 블랙맘바가 가져온 어둠과 전위적인 무용수들,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교향악단의 연주까지…. 유튜브에 공개된 뮤직비디오엔 “‘해리포터’에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무아지경으로 감상했다”, “방구석에서 이렇게 좋은 오케스트라를 들을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정수은(바순) 단원은 “촬영 당시(2022년)엔 몰랐는데 중학생이 된 아들이 에스파의 팬이 된 덕분에 그 때 촬영했던 ‘블랙맘바’ 에스파가 그 에스파라는 것을 알게 됐다”며 “엄마가 하는 일엔 관심이 1도 없던 아들이 SM의 오케스트라 곡은 굉장히 좋아해 무척 뿌듯하다”고 말했다.

‘헬로 퓨처’ 오케스트라 버전 [SM클래식스 제공]


K-팝과 K-클래식의 두 역사가 만났다. 시작은 지난 2020년 6월. 한국 클래식의 바로미터인 서울시립교향악단이 SM엔터테인먼트 산하 레이블 SM클래식스와 함께 K-팝 오케스트라 버전 음원과 뮤직비디오를 선보이면서다.

서울시향이 SM의 히트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선보인 지 벌써 5년. 마침내 ‘핑크 블러드’(SM 팬덤)의 염원이 이뤄졌다. “SM 곡을 모아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공연을 열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14일(예술의전당)과 15일(롯데콘서트홀) 이틀간 ‘SM 클래식스 라이브 2025 위드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으로 현실이 된다. 서울시향의 창단 80주년ㆍ재단법인 설립 20주년과 SM의 창사 30주년을 기념한 전 세계 최초의 K-팝 오케스트라 콘서트다.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서울시향의 기존 정기연주회가 40대 이상 연령대의 비중이 높다면, 이번 공연은 2030 관객들이 비율이 압도적이다. 무려 84.2%(20대 40.8%, 30대 43.4%)나 된다. SM 팬덤이 주요 관객들로 자리하면서도 서울시향의 새로운 시도를 함께 하고자 하는 관객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첫 리허설을 마치고 만난 서울시향의 웨인린 부악장(제1바이올린), 임가진 수석(제2바이올린), 장선아(플루트)·정수은(바순)·김미연 단원(타악기) 단원은 “평소 해오던 것과 달라 재미있게 준비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적지 않다”며 웃었다.

레드벨벳 ‘빨간맛’ 오케스트라 버전 뮤직비디오 [SM클래식스 제공]


서울시향의 K-팝 침공 사건…‘빨간 맛’으로 발칵 뒤집고 장르 확장


“레드벨벳은 얼음을 와그작 씹으면서 시원한 곳으로 향했다면, 오케스트라 버전은 장맛비 속에서 신나게 춤추면서 이 여름을 즐기자는 느낌이에요.” (서울시향의 ‘빨간맛’ MV 댓글)

명대사 같은 ‘슴덕’(SM 덕후)의 댓글이 박제됐다. 일명 ‘서울시향의 K-팝 침공 사건’이었다. 빠르고 복잡한 리듬, 노래와 랩이 어우러져 여름향을 팡팡 풍기는 레드벨벳의 ‘빨간 맛’은 서울시향과 SM클래식스의 첫 작품이다.

웨인린(바이올린) 서울시향 부악장은 “팬데믹으로 많은 공연이 취소돼 단원 모두 무언가를 할 수 있기를 고대하던 때에 K-팝과의 협업을 시작하게 됐다”며 “음악을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단원 모두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사실 서울시향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늘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악단으로 클래식 저변 확대를 위해 힘쓰며 새로운 도전을 해왔다. 임가진 제2바이올린 수석은 “클래식 시장이 확장돼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뭐든 시도하는 상황에 합류하는 것에 의미를 뒀다”고 말했다.

‘SM 클래식스 라이브 2025 위드 서울시립교향악단’ 리허설 모습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K-팝과의 만남도 그 일환이나,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빠르면 6~7세에 악기를 잡고, ‘위대한 작곡가’들이 만들어놓은 고전음악의 세계에서 일생을 수행하듯 한 길을 걸어온 클래식 연주자들에게 K-팝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K-팝의 오케스트라 버전 연주 초창기를 떠올리며 단원들은 “음악 어법이 달라 대체로 편곡 자체가 쉽지 않은데, SM 곡들은 클래식 기반 편곡자들이 악기의 음역과 한계를 알고 작업해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연주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여리디 여린 플루트와 오보에로 K-팝 가수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웨인린 부악장이 극악의 난이도로, 극강의 고음을 연주하며 짜릿한 순간을 만든다. 아름답게 완성된 모든 순간은 ‘고통의 결실’이다. 특히 60여명의 단원들이 하나의 박자, 하나의 소리를 칼 같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

김미연 단원은 “보통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선 지휘자의 비트에 맞춰 어느정도 유연하게 표현을 하는데 K-팝의 오케스트라 버전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정확하게 연주해야 한다”며 “메트로놈이나 기계처럼 모든 악기가 칼박자로 똑같이 연주를 해야하는 것은 해 본적이 없어 어려웠다”고 말했다.

첫 리허설 그 후…“산책인 줄 알았는데 등반이었다”


“산책인 줄 알았는데, 등반이었다.”

공연을 앞둔 리허설에선 장장 20곡의 악보가 단원들에게 전달됐다. 기존에 서울시향과 함께 작업한 곡을 모아 최근 발매한 SM클래식스의 첫 정규 앨범 ‘어크로스 더 뉴 월드(Across The New World)’의 수록곡과 공개된 적 없는 곡들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첫 리허설 후 단원들은 클래식에선 잘 쓰지 않는 리듬과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 등으로 굉장한 피로감을 느꼈다고 했다. 편곡 작업에 참여한 작곡가들이 서울시향의 수준 높은 연주력을 믿고 각각의 악기가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고난도의 테크닉을 악보에 쏟아낸 탓이다.

정수은 단원은 “테크닉 측면에서 보면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아르스 노바’와 맞먹을 정도의 어려움”이라고 했다. 잘개 쪼갠 음표과 펑크, 힙합 등 쓰지 않던 리듬이 툭툭 튀어나온다. 웨인린 부악장은 “화음, 음역 등이 많이 다른데, 자주 쓰거나 좋은 운지법이 아니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귀띔했다. 그럼에도 단원들은 웨인린 부악장의 솔로(‘다시 만난 세계’, ‘필 마이 리듬’)가 이번 공연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입을 모았다.

라이즈 ‘붐 붐 베이스’ 악보가 담긴 오케스트라 버전 MV [SM클래식스 제공]


김미연 단원은 “노래를 클래식으로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신박하고 랩 가사마저 악기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지만, 사실 클래식과 K-팝의 리듬이 달라 클래식의 언어로 해결되지 않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클래식과 가요의 기보(記譜) 방식 차이”도 낯선 점이었다.

단원들 입장에서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은 역시 그들에게 익숙한 고전음악이 등장할 때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등장하는 엑소의 ‘으르렁’,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 샘플링된 레드벨벳 ‘사이코’, 드뷔시의 ‘달빛’과 만난 종현의 ‘하루의 끝’, 동방신기의 ‘라이징 선’과 만난 비발디 사계의 ‘여름’ 3악장 등이 나올 때다. SM의 애국가로 불리는 H.O.T의 ‘빛’은 베토벤 제9번 교향곡 ‘합창’과 만났다.

장선아 단원은 “K-팝과 클래식이 이렇게 잘 연결되고 어우러질 수 있다는 걸 이 작업들을 통해 알게 됐다”며 “고전음악이 샘플링 된 부분에선 늘 해오던 것이라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 자신감있게 연주한다”며 웃었다.

모험적 협업, 과감한 샘플링은 장르와 경계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SM의 음악이 좋아 오케스트라 버전까지 흘러들어온 ‘핑크 블러드’들이 서울시향이 연주한 교향곡을 유튜브에서 찾아듣고, 고전음악의 세계에 입문한다.

장선아 단원은 “NCT의 팬인 딸 때문에 제가 NCT를 공부하듯 K-팝을 오케스트라로 연주한 음악을 듣고 클래식 음악이 궁금해 찾아듣는 아이들을 보고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과 변화가 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미연 단원은 “K-팝을 연주하며 처음엔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자주 듣다 보니 점점 스며들어 이것 자체로 또 하나의 음악 장르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육각형 오케스트라 ‘최초’…“서울시향은 무엇을 하든 서울시향”


국내 클래식 업계에서 서울시향의 지위는 상징적이다. 올해로 창단 80주년을 맞는 서울시향의 유료 관객 숫자로 한국의 클래식 시장 규모를 가늠할 만큼 명실상부 최고 악단이다. 보수적인 업계와 애호가 사이에서 서울시향의 시도는 상당한 파격과 혁신이었다.

김미연 단원은 “업계에선 ‘클래식은 클래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고, ‘클래식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지금은 진입장벽을 낮추고 더 많은 관객에게 클래식 음악을 알리기 위해 저변을 확대해야 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라 본다”고 했다. 임가진 수석도 “어떠한 새로운 시도도 편견에 부딪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이러한 협업과 대중의 사랑과 관심이 그 간극을 메워나가며 클래식 음악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SM 클래식스 라이브 2025 위드 서울시립교향악단’ 리허설 모습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서울시향과 K-팝이 만나자, 학교의 풍경도 달라졌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서울시향 버전 ‘빨간 맛’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중학교에선 점심 방송에 서울시향 버전 SM 곡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장선아 단원은 “딸이 중학생 때 학교에 ‘빨간 맛’이 노래로 나왔는데 친구들이 신기하고 좋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며 “이젠 딸한테 ‘엄마 오늘 SM 녹음하러 간다’고 꼭 알려준다”며 웃었다.

올해에도 서울시향은 다양한 협업으로 음악적 확장을 시도한다. SM과의 협업은 물론 ‘오징어게임’의 정재일 음악감독의 신작 세계 초연(9월 25~26일)과 국립오페라단과 공동 주최하는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12월 4~7일)도 기다리고 있다.

당장 이번 달만 해도 SM 클래식스와의 공연과 말러 교향곡 7번 연주가 한 주차로 이어진다. ‘극과극’ 경험을 몸소 보여주는 “유연한 ‘육각형 오케스트라’”라고 김미연 장수은 단원은 강조했다. 다방면에 있어 새로운 시도는 “각기 다른 에너지 발산과 표현의 기회를 준다”(웨인린 부악장)는 점에서 단원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옷만 다르게 입을 뿐 무엇을 하든 서울시향은 서울시향이에요. SM클래식스와의 공연은 완전히 새로운 시도이자 또 한 번의 최초의 시도가 될 거예요. K-팝 유산은 당연히 K-오케스트라가 연주해야죠. 다양한 분야에서 K-컬처가 최전성기를 맞은 이 때, 대표 K-오케스트라로서 K-팝을 알리고 클래식 확장에도 함께 할 수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서울시향 웨인린 부악장 이하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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