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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수준높은 기와 기술이 도입된 오키나와 섬의 구수리성 (舊首里城) . 제주에서 삼별초가 사라진 시기인 1273년 바로 직후, 기와가 없던 유구국 오키나와 섬 유구왕국에 기와지붕으로 왕궁이 건축되었고 문명이 급속히 발전했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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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초대 문명 (고)조선(朝鮮)의 조(朝) 자에서 수풀 부분을 없애면 명(明) 자가 된다. 1392년 고려의 맹장 이성계가 세운 후조선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첫 번째 조직 사회였던 조선의 이름을 다시 나라 이름으로 정했다.
동아시아 고대 경제와 교역을 뒷받침하던 초대 화폐는 고조선 화폐 명도전(明刀錢)으로 우리나라, 일본을 포함한 고조선 영토에서 발견된다. 명도전(明刀錢)은 후대 명나라(1368~1644) 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명도전은 고조선이 가장 번성했을 때 기원전 10세기 경 화폐”라고 고조선 전문학자 인하대 나영주 교수는 말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54권 지리지에서는 우리 고조선의 건국을 다음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고조선 세력의 일부였던 신라의 고대 국명 ‘시라’는 고대 로마시대 지도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멀리 위치한 동아시아 지역을 ‘Serica’라고 불렀고, 비단(silk)을 수출했던 세리카 사람은 세레스(Seres) 라고 칭했다.
비단을 부르는 영어 단어 ‘실크’의 유래가 비단실을 감아 놓은 실꾸리 (sil-kkury) 에서 나왔다고 조환 교수는 논문에서 밝힌다.
고조선에서 퍼져나간 대외무역은 시대적인 초기 조직사회의 정치형태의 발전을 평행으로 따라 왔다고 봐야 한다.
“고조선이 이미 기원전 7세기 제(齊)나라(기원전 1046 – 221)와 무역을 하고 있었다. 삼한시대에 이르러서는 대외무역이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다” 기원전 645년 타계한 관자(管子)가 기록한 내용이다.
삼한(三韓)은 삼국시대 이전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으로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와 서해바다를 감싸고 있는 주변에 기원을 둔 삼국 시대 이전, 곧 원삼국 시대이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흔적은 고인돌 유적이다. 많은 노동력이 있어야만 세울 수 있는 고인돌로 말하자면 전 세계에서 단연코 한국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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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고도(宮古島), 미야코지마섬에 남아있는 고인돌. 평평한 지형에 있는 고인들은 주변의 집들 사이에서 나무 뿌리의 피해를 받고 방치돼 있다. [필자 제공] |
우리 민족이 자리 잡은 한반도는 1만5000년 전 인류 최초 벼농사가 가능했던 고대부터 먹거리가 비교적 풍부했던 지형이었다. 벼농사가 성공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인구 팽창이 가능했고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서 사회 공동체의 발전이 있었기에 고조선이 동아시아 초대 문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유라시아 초원로를 통해서 수입된 로마시대 유리그릇이 신라 귀족층에게까지 전달되어서 오늘날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며, 육로 교역이 연결되었던 중앙아시아에서도 똑같은 문양의 유리그릇이 출토되면서 교역로가 확인되고 있다.
로마시대는 중동의 시리아와 독일 쾰른(Cologne) 두 지역에서 유리그릇을 만들었는데 신라로 수출되었던 유리그릇은 오늘날 시리아에서 만들어졌다고 경북대 박천수 교수는 말한다.
대한민국 제호에서 크고 넓은 뜻의 나라 한(韓)은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三韓)에서 비롯된 국명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 때, 그리고 1919년 한국 최초 민주공화제를 선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언에서 계속 사용된 국호이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하고 무궁무진한 바다로 연결된 천혜의 해상교역강국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유구국(琉球國)이 번성했던 오키나와섬에서 300km 떨어져 있는 대만과 절반 거리에 있는 미야코(宮古島, Miyako)섬은 인근 섬 중에서는 쌀이 많이 나는 섬으로 논 농사를 가장 성공한 곳이다. 미야코 섬에는 우리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인돌이 있다.
“미야코 고인돌은 제주도 오라동 고인돌과 같은 형태입니다.” 고구려사와 해양사를 주로 연구한 윤명철 교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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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립박물관에 전시된 유구 제1쇼씨 왕조 시기 1458년 주조된 동종 구수리성 정전종(舊首里城正殿鐘). 종에 새겨진 문구에서 한국의 정체성이 표현돼 있다. 길이 154.9cm, 둘레 93.1cm에 무게는 721kg. 만국진량종(万津梁鐘)이라고도 불린다. [필자 제공] |
고조선 해상 교역에 포함되었던 지역이 나대 연장이 있는 탐라(제주)섬과 고조선 명도전 화폐가 발견된 유구(오키나와)섬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쪽의 오랑캐라는 남만(南蠻)이라고 일컫는 유구국과 조선 사이에는 숱한 교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94년에는 조선에 망명한 왕자를 돌려달라는 기록도 있다.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사신을 보내서 전문(箋文)과 예물을 바치고, 남녀 12명을 돌려보내고서, 망명한 산남왕(山南王)의 아들 승찰도(承察度)를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1394년 9월 9일 태조실록 기록이다.
고려왕조는 몽골의 침입이 있던 1232년(고려 고종 19년)부터 1270까지 여몽전쟁(麗蒙戰爭)을 치르면서 100년 동안의 무신정권(武臣政權) 중 60년을 독식한 최씨 가문의 정예 전투병력 삼별초 군인들이 몽골군을 상대로 나라를 지켰다.
삼별초의 시작은 당시 무신정권의 기득권 세력집단 최씨 가문의 사병집단 야별초(夜別抄)로 편성이 됐던 용병들이 숫자가 늘어나면서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로 나뉘었다가, 몽고군과 싸움에서 탈출해온 신의군(神義軍) 집단이 추가로 형성되면서 이들 군인들을 통틀어서 ‘삼별초’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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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립박물관에 전시된 유구국(琉球國) 야에세초(八重町) 지역에서 발굴된 고조선 화폐 명도전(明刀錢). 조(朝) 자에서 수풀 부분을 없애면 명(明) 자가 된다. 명도전은 우리나라, 일본 그리고 고조선 영토에서 많이 발견된다. 후대 명나라 (1368 – 1644)의 명(明) 자의 유래가 조선(朝鮮)의 조(朝) 에 있다. [필자 제공] |
1259년부터 재위한 고려의 원종(元宗)은 1270년 몽골에 항복하면서 원나라에 삼별초 군인명단을 넘기고, 5월29일 삼별초에 해산 통보를 했는데, 삼별초는 몽골군에게 패잔국 군인으로 보복 처형을 굴욕적으로 당하는 대신 군인으로 몽골 침략군에게 맞서 끝까지 싸우는 선택을 하였다.
삼별초는 재물과 자녀들을 모조리 실어 강화도를 떠나 진도(珍島)섬에 입도하여 새로운 고려왕궁 용장성을 건축하고 왕온(王溫)을 새 고려왕으로 세우며, 원나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새로운 고려를 추진했다.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1271년에 진도가 함락되면서 삼별초 병력을 제주 탐라국(耽羅國)으로 옮겨 항파두리에 토성으로 군사진지를 건축하며 계속 대항하였다.
1273년에 1만2000여명의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공격으로 항파두리성이 함락되고 삼별초 무사들은 제주 탐라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삼별초가 제주에서 전멸한 해인 1273년 계유년이 적힌 ‘고려와장조(高麗瓦匠造) 계유년(癸酉年)’ 글씨가 새겨진 고려기와 조각이 오키나와 유구국(琉球國) 성터에서 발견되었다. 고려시대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에 제주도에서 몽골군에 패한 직 후 오키나와에서는 성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고려시대와 삼국시대 성의 축조 기술로 성벽을 지형에 따라 탄력적으로 변화시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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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현립박물관에 전시된 유구국(琉球國) 포첨성(浦添城 우라소성) 에서 발견된 고려기와의 모습 [필자 제공] |
고려라는 글씨와 그 당시 특징이었던 물고기 뼈 문양의 어골문양이 있는 고려의 기와 양식과 문양이 동일한 기와 조각이 오키나와 유구국 우라소성(Urasoe Castle)터에서 발견된다. 제주에서 삼별초가 사라진 시기인 1273년 바로 직후, 기와가 없던 오키나와 섬에서 유구왕국(琉球王)에 기와지붕으로 왕궁이 건축되었고 문명이 급속히 발전했다.
오키나와 초기 왕조 유구국(琉球國)은 고려 기술로 만든 기와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유구왕국의 정체성이 한국이었다는 결정적인 문구가 오키나와(琉球國)에서 1458년 주조된 만국진량 동종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유구는 남해에 있는 나라로 삼한(한국)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다. (琉球國者南海勝地也 鐘 三韓之秀)”
기와 한 장을 만들어도 역사적인 사료를 기록해 놓은 고려의 삼별초 기와쟁이가 있었기에 방대했던 과거 우리 선조들의 역사적인 흔적을 21세기에 와서 더욱 또렷하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