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곡2동 주민들, 천사 대신 쌀 모아 백미 300포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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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북구 얼굴없는 천사가 보내준 쌀. [성북구 제공] |
[헤럴드경제=손인규 기자] “이젠 쌀을 보내드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정말 미안하고 감사했습니다”
지난 1월 월곡2동 주민센터 직원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해마다 그맘때면 오는 얼굴 없는 천사의 전화였다. 2011년부터 2024년까지 14년 동안 해마다 20kg 포장 쌀 300포를 주민센터로 보낸 그 천사다.
그는 늘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채 “어려운 분들이 명절을 날 수 있도록 쌀을 보내니 잘 부탁한다”는 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월곡2동 주민들은 천사의 쌀이 도착하는 날이면 주민센터로 모여 새벽어둠을 뚫고 도착한 트럭에서 쌀을 내렸다.
그런데 올해 얼굴 없는 천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쌀을 더 이상 보낼 수 없게 됐다고 연락한 것이다.
선행이 멈추려던 위기의 순간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주민들이 ‘제2의 얼굴 없는 천사’로 나섰다. 얼굴을 감춘 채 소외 이웃을 위해 해마다 쌀을 보낸 ‘얼굴 없는 천사’를 대신해서다.
얼굴 없는 천사는 14년 동안 소외 이웃을 위해 총 4200포, 무게 84톤, 시가 2억2000여만원에 이르는 쌀을 기부하며 지역에 나눔의 가치를 확산하고 주민에 자부심을 안겼다.
그러나 2025년 올해는 천사의 기부가 중단되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쌀 나눔을 이어가던 천사였기에 혹시라도 그가 경제적 위기에 놓인 건 아닌지,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주민들은 걱정했다.
무엇보다 기부가 중지되어 쌀을 지원받지 못하게 된 국민기초수급자, 차상위 등 저소득가구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결국 월곡2동 주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 후 그들이 제2의 ‘얼굴 없는 천사’가 되기로 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천사의 선행이 월곡2동의 나눔 기부 문화로 자리 잡고 함께 계승하자며 지난달 17일부터 ‘월곡2동 마을 천사 온기나눔 사업’ 캠페인을 진행했다.
취지에 공감한 월곡2동 주민, 관내 직능단체, 금융기관, 마트 등이 팔을 걷고 나섰다. 월곡2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는 협의체 기금을 활용해 백미를 지원하는 한편, 지역사회 기부자 발굴에 적극 나섰다. 월곡2동 주민자치회도 천사의 나눔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지역사회를 위한 의미 있는 실천이라는 공감 속에 마음을 모았다. 지역의 금융기관(월곡 새마을금고)과 마트(제이엘마켓탑), 기업(동아티엔에스), 개인 기부자 등도 동참했다.
얼굴 없는 천사가 심은 나눔의 선한 영향력 덕분에 캠페인 시작 보름여 만에 백미 300포(10㎏)를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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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로 성북구청장이 쌀을 나르고 있다. [성북구 제공] |
‘제2의 얼굴 없는 천사’들이 마련한 쌀 300포는 11일 오전 월곡2동 주민센터에 전달되었다. 쌀 300포를 실은 트럭이 월곡2동 주민센터에서 앞에서 멈추자 주민 40여명이 쌀을 날랐다. 쌀을 모두 내리고 난 후 주민들은 지난 14년간 소외 이웃을 위해 쌀을 기부하며 지역에 나눔의 가치를 확산하고 주민에 자부심을 안긴 ‘원조 얼굴 없는 천사’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주민들께서 천사를 대신해 어려운 이웃을 돕자며 자연스럽게 마음을 모으고 쌀 300포를 모은 미담의 선순환 자리에 함께해 감격스럽다”며 “나눔의 가치를 확산하고 지역 주민에 자부심이라는 큰 자산까지 주신 천사께 감사의 마음과 함께 앞으로는 주민과 행정이 제2의 얼굴 없는 천사가 되어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북을 만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