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렴치男·불륜女의 결합” 욕도 먹었지만…이들의 ‘이유있는’ 파격 스캔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142 인물편. 존 에버렛 밀레이 & 에피 그레이]

절친의 아내를 사랑했다
그런 그에게 마음열었다
이들, 대체 왜 그랬을까
‘말 못할’ 사정 있었기에?


존 에버렛 밀레이, 에피 그레이(일부 확대), 1855년경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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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역사화일까, 아니면…


존 에버렛 밀레이, 1746년의 사면 명령, 1852~1853, 캔버스에 유채, 102.9×73.3cm, 테이트 브리튼

사실, 에피가 모델로 나선 그림 속 이 여인은 당시 남편을 되찾기 위해 관련 책임자와 성적 거래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밀레이는 그러한 행위 자체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다. 남편을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그녀의 결기에만 주목했을 뿐이었다.


<1746년의 사면 명령>. 존 에버렛 밀레이의 이 그림은 이른바 자코바이트의 난을 다룬 작품이었다.

이는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영국 땅에서 벌어진 유혈 충돌이었다. 한때 왕이었지만 다툼에서 밀려 쫓겨난 제임스 2세, 그를 몰아낸 후 실권을 쥔 새로운 정부 사이 빚어진 분쟁이었다. 옛 권력인 제임스 2세 편에 서기로 한 자코바이트의 목표는 간결했다. 제임스 2세 또는 그의 후손을 다시 왕위에 앉히는 것. 사실 자코바이트라는 말 자체도 제임스의 라틴어 이름 야코부스에서 유래한 용어였다. 하지만 자코바이트는 1746년에 발발한 새로운 정부군과의 결정적 전투에서 완패하고 말았다.

존 에버렛 밀레이, 1746년의 사면 명령(일부 확대), 1852~1853, 캔버스에 유채, 102.9×73.3cm, 테이트 브리튼


그런데, 밀레이는 당시 벌어진 피의 역사를 다룬 그림치곤 꽤나 감성적인 그림을 내놓았다.

밀레이는 자코바이트와 정부 사이 벌어진 복잡한 갈등상을 담지 않았다. 그가 주목한 건 반란이 끝난 후 만들어진 드라마였다.

당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자코바이트 편으로 난에 가담했던 한 스코틀랜드 패잔병은 무기한 옥살이를 할 처지에 놓였다.

병사의 아내는 강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붙잡힌 남편을 어떻게든 구출할 생각이었다. 아내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끈질기게 매달렸다. 내쳐지고, 밀려나고, 치욕스러운 성적 모욕까지 겪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여인은 끝내 남편의 사면 명령서를 따낼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림 속 이러한 재회를 이끌 수 있었다. 끈질기게 달려들어 사랑을, 가정을, 그리고 평화를 쟁취한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끝까지 주저앉지 않았기에.

존 에버렛 밀레이, 1746년의 사면 명령(일부 확대), 1852~1853, 캔버스에 유채, 102.9×73.3cm, 테이트 브리튼


밀레이는 역사의 한 조각을 들고 와 역사화인 척 역사화를 그리지 않은 격이었다. 진짜 전하고 싶은 교훈은 따로 있는 듯, 무언가 수상쩍은 작품을 내놓은 셈이었다.

묘한 사이, 묘한 분위기


존 에버렛 밀레이, 나무꾼의 딸, 1851, 캔버스에 유채, 89x65cm, 길드홀 아트 갤러리


밀레이 씨. 이 그림요. 이대로 괜찮은가요?”

에피 그레이. 1853년의 어느 날, <1746년의 사면 명령> 속 모델로 선 그녀가 푸른색 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 또한 이 그림이 의미심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시 에피는 스물다섯 살의 명문가 여성이었다. 인형보다 더 인형 같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예쁜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런 에피는 눈부신 외모 이상의 매력도 갖고 있었다. 교양이었다. 그녀는 철학과 역사에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밀레이가 정말 자코바이트의 난을 그리고 싶었으면, 보다 절박하고 처절한 장면을 소재로 두는 게 나았을 것을.

“아무튼, 당신 말대로 평소보다 독하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어요. 그러니까….”

에피는 말을 하다 멈췄다. 그녀는 밀레이가 무의식적으로 본인을, 그러다 또 그림 속 여인을 번갈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밀레이는 오늘따라 유독 입을 열지 않았다. 에피는 그 이유 또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거듭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누르고 있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Yes or No, 1871, 캔버스에 유채, 111.8×91.4cm, 예일대학교 미술관


에피는 불현듯 떠올릴 수 있었다.

밀레이가 굳이 본인을 이 그림 속 모델로 고집한 일, 아울러 그와 과거에 주고받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 자신이 울먹일 때마다 건넨 따뜻한 격려와 위로….

“설마….”

에피는 고개를 들어 밀레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밀레이 씨. 주제넘은 말일 수 있지만, 이 그림은 지금 제 상황을 비춘 걸까요? 제가 했으면 하는 행동을 투영한 건가요?” 에피는 마주 선 밀레이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가 한층 더 촉촉해졌다. 평소라면 가벼운 농담으로라도 받아쳤을 밀레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침묵만 여전히 길게 이어졌다. 그는 머릿속 문장을 공들여 가다듬고 있는 모습이었다.

“부인. 확실한 건 말이지요.” 밀레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금껏 내가 그린 신의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답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존 에버렛 밀레이, The Black Brunswicker, 1860


“이보게들! 작업은 잘 되고 있는가?”

순간 둘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에피가 밀레이의 말에 반응하려고 한 그때였다. “이번에도 멋진 그림이 나오고 있는가?” 존 러스킨이 이 말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멋스럽게 빗어넘긴 그는 에피의 남편이었다. 사실, 이렇듯 그녀에게는 이미 반려자가 있었다. 직전까지 밀레이와 야릇한 감정을 주고받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위험한 정서 교류였던 것이다.

“여보. 예정보다 빨리 왔군요.”

에피가 서둘러 응수했다. “강연이 빨리 끝나서 말이오. 오, 그림은 거의 완성 단계까지 왔군.” 러스킨은 어깨의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밀레이에게 옮겼다. “친구. 자네의 표현력은 여전하군. 물론 내 아내도 훌륭한 모델의 자질이 있지.” 밀레이는 이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존 에버렛 밀레이, 모험을 찾아 떠나는 기사, 캔버스에 유채, 135.3×184.1cm, 테이트


작업실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정확히는, 밀레이와 에피 사이로 여운이 깊이 파였다.

밀레이는 에피에게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유부녀인 에피는 밀레이의 의미심장한 작품을 놓고 무엇을 느낀 것일까. 그리고…. 에피와 밀레이의 묘한 관계는 어떻게 끝을 맺을 것인가. 이제, 그 시절 발발한 전쟁보다 더 시선을 끈 세기의 스캔들이 시작되려고 한다.

선남선녀의 만남, 그러나…


토마스 리치몬드, 에피 그레이의 초상화(일부 확대), 1851, 보드에 유채, 81x53cm,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에피는 스코틀랜드 퍼스 출신의 여인이었다.

애칭은 페미(Phemy). 그녀는 1828년, 꽤 영향력이 큰 집안의 딸로 출생했다.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여러 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아기자기한 눈코입, 외모만큼 사랑스러운 성격 등 그녀는 어딜 가도 눈길을 끄는 존재였다. 다만, 이처럼 찬란한 소녀로의 삶은 집안이 갑작스럽게 파산하며 휘청였다. 그녀의 부모는 지금껏 쌓아올린 부와 명예를 모두 잃었다. 당장 머무를 곳조차 찾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들은 에피를 믿을 수 있는 다른 가문에 맡기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해 그녀가 향한 곳, 그 집안이 러스킨가(家)였다.

에피는 그곳의 낯선 어른 틈에서도 역시나 반짝였다.

이런 모습에 감동한 이가 있었다. 러스킨가의 수재, 존 러스킨이었다. 당시 에피는 열두 살, 러스킨은 스물한 살이었다.

토마스 리치몬드, 에피 그레이의 초상화(일부 확대), 1851, 보드에 유채, 81x53cm,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혹시나 밀레이가 에피에게 푹 빠져 그녀를 보다 이상적으로 그린 건 아닐까. 토마스 리치몬드의 그림은 이러한 의심을 사그라들게 한다. 단아한 인상의 에피는 티없이 맑은 피부를 갖고 있다. 그녀는 머리카락 모양과 얼굴, 어깨 등 전체적으로 동그란 느낌을 준다. 이는 그녀의 귀염성 있는 성격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그림을 본 에피는 “나를 인형처럼 그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8년의 세월이 단숨에 흘렀다.

에피는 그사이 발랄한 숙녀로 컸다. 여러 화가가 뮤즈로 탐낼 만큼의 미와 교양을 갖춘 팔방미인으로 성장했다. 러스킨은 에피가 성인만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곧장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에피는 러스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제 당당히 러스킨가의 안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화목한 가정을 꾸려 잃었던 안정을 되찾는 한편, 러스킨가의 힘을 빌려 무너진 옛 가문의 명예도 회복할 마음이었다.

존 러스킨


물론 청혼을 받아들인 데는 그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러스킨 개인의 됨됨이였다. 러스킨은 결혼 상대로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지적인 외모, 깔끔한 복장, 자신감에 찬 말투로 이미 많은 이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오죽하면 별명도 런던의 신사였다. 러스킨이 벌써부터 유능한 미술 비평가로 존재감을 보이는 것 또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두 사람은 1848년 4월 퍼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언뜻 봐선 재능 있는 선남선녀의 완벽한 결합이었다. 하지만, 치명적 위기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첫날밤은 모욕을 남기고


존 에버렛 밀레이, 아내, 카펫에 무릎을 꿇고 양손에 얼굴을 대고 있는 그녀, 1860~1863, 종이에 수채 등, 10.2×12.7cm, 버밍엄 박물관·미술관


에피와 러스킨은 부부가 되고도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치르지 못했다. 그것은 러스킨의 문제 탓이었다. 서약을 맺은 남녀도 있고, 밤과 술도 있고, 방과 침대도 있었다. 에피는 마음의 준비를 한 채 러스킨에게 다가섰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려고 할 때… 그녀는 러스킨의 짓이겨진 표정 앞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러스킨은 그녀의 알몸 앞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언가 역겨운 걸 봤다는 모습이었다. 그러곤 침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둘의 첫날밤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둘 사이에선 그 이후로도 성적인 일에 대해선 어떠한 사건도 생기지 않았다. 에피는 러스킨의 행태에 큰 상처를 받았다. 자기 몸을 놓고 못 볼 걸 본 듯 물러선 데 대해선 모욕감까지 느꼈다.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다루고 싶소. 당장 아이를 기를 필요도 없지 않소?” 러스킨은 본인도 겸연쩍은 듯 종종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핑계인 게 분명해보였다.

존 에버렛 밀레이, 성 스테판, 1895, 캔버스에 유채, 114.3×152.4cm, 테이트


러스킨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건 없다.

러스킨이 그날 여성의 실제 나체를 처음 봤다는 것. 그 모습이 여태 봐온 명화 속 여성의 알몸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에피와의 잠자리를 멀리했다는 게 가장 유력한 설로 통한다. 다만, 러스킨은 죽을 때까지 이와 관련한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에피는 그때부터 속으로 앓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치욕감을 안긴 러스킨도 이제는 반쪽짜리 남편이었다. 이런 가운데, 나날이 강해지는 건 이처럼 황당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시댁의 압박뿐이었다. 스트레스가 컸기 때문일까. 그녀는 마음의 병까지 얻었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평생 살아야 하는가. 그녀는 홀로 눈물을 쏟곤 했다.

고민을 말하고, 고민을 듣다


존 에버렛 밀레이, 몽유병자, 1871, 캔버스에 유채, 154x91cm, 델라웨어 미술관


밀레이 씨. 이쪽은 내 아내일세.”

결혼 4년 차인 1852년께.

에피는 남편 러스킨에게서 한 화가를 소개받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과 볼록한 매부리코의 소유자였다. 구김 없는 프록코트와 잘 펴진 넥타이는 그의 단정함을 돋보이게 했다. “존 에버렛 밀레이입니다.” 밀레이가 에피를 향해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존이라면…. 제 남편과 이름이 같군요?” “그렇다면 부인. 저는 앞으로 에버렛이나 밀레이라고 부르시지요.” 밀레이는 부드러운 미소로 에피의 말을 받았다.

이날 이후 에피는 심심찮게 밀레이를 볼 수 있었다.

남편 러스킨은 밀레이를 끔찍이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에피는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밀레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

존 에버렛 밀레이, 자화상, 1881, 캔버스에 유채, 86x65cm, 우피치 미술관


밀레이는 천재 화가였다.

그는 겨우 열한 살 때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 역사를 갖고 있었다. 당연히 그 시절 최연소였다. 집안도 괜찮았고, 회화를 뺀 다른 예술 분야에도 조예가 깊은 편이었다.

러스킨과 밀레이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수록 에피와 밀레이도 부쩍 친해질 수 있었다.

둘은 가장 먼저 러스킨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에 대해 뜻 일치를 봤다. 그래서인지 종종 이해하기 힘들 만큼의 고집을 부린다는 점을 놓고도 공감대를 이뤘다. 웃고 떠들다보니 언젠가부터는 소소한, 사소한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잔 다르크, 1865


에피는 진중한 밀레이에게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피는 이 남자에게 문제의 그 고민까지 털어놓고 말았다.

“밀레이 씨. 실은…. 저와 러스킨은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어요.” “예?” “벌써 5년 가까이 그가 저를 거부하고 있거든요.” 에피는 말하는 도중 또 한 번 비참함을 느꼈다. “첫날밤, 역겹다는 듯이 저를 보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이 말을 하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나왔다. 밀레이는 울음이 터진 에피를 다독였다. 그날 이후, 밀레이는 생각이 많아진 모습이었다.

그 무렵, 밀레이는 에피를 세워두고 <1746년의 사면 명령>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영국 역사의 실핏줄인 자코바이트의 난을 다뤘다고 하지만, 오직 그 소재만 다룬 것 같지는 않은 작품이 빚어진 것이다. 다만, 밀레이 또한 이 작품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떠한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밀레이가 에피의 내밀한 사연을 듣기 전 이 그림에 대한 작업을 마쳤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이대로 또 흥미로워진다. ‘사면 명령’이라는 제목, 그림 속 여인이 남편을 얻기 위해 보인 강인한 행동…. 이 모든 게 앞으로 펼쳐질 에피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기에.

용기의 이유


존 에버렛 밀레이, 존 러스킨의 초상화, 1853~1854, 캔버스에 유채, 78.8x68cm, 아쉬몰리안 박물관

러스킨에게 왜 ‘런던의 신사’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다. 깔끔한 그의 얼굴은 당시 유행하던 중절모에 코트 패션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러스킨과 밀레이 사이 우정은 이 그림이 그려진 직후부터 크게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해 여름과 가을 사이.

에피는 러스킨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갔다. 요양 차원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여행에는 동행자가 한 명 더 붙었다. 밀레이였다. 밀레이는 러스킨의 권유(그는 정말 에피와 밀레이 사이 미묘한 기류를 몰랐던 걸까….)를 받고 합류를 결정했다.

밀레이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간 김에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며 털털하게 말한 그였지만, 내심 에피와 한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데 대해 심장이 펄펄 뛰지 않았을까.

존 에버렛 밀레이, 이단자의 도피, 1857, 캔버스에 유채, 109.2×79.1cm, Museo de Arte de Ponce


여행 중 에피와 밀레이 사이에선 둘만 느낄 수 있는 은근한 감정이 몰아쳤다.

에피는 밀레이에게 더더욱 빠져들었다. 남편 러스킨, 동행한 밀레이는 기본적으로는 모두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피는 밀레이야말로 자신을 기쁘게 만들 줄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피의 말을 더 귀 기울여 듣는 이는 밀레이였다. 웃었으면 할 때 웃는 사람, 때때로 클래식을 흥얼거릴 때 함께 따라 불러주는 사람도 밀레이뿐이었다.

그녀는 이번 여행 중 밀레이에게 여태껏 들은 말 이상의 어떤 신호도 받지 못했다.

다만, 밀레이는 분명 에피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눈빛에서, 둘 사이 더 깊어진 침묵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섬세한 그가 그녀의 심신을 짓누르는 ‘그 문제’를 잊을 리 없었다.

…내가 그린 신의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답소. 에피는 언젠가부터 밀레이를 마주하면 이 말부터 떠올랐다.

이는 밀레이 또한 진심을 다해 꺼낸 문장이었다. 밀레이는 친구 윌리엄 홀먼 헌트에게도 “그녀는 지금껏 세상에 태어난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답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구조, 1855, 캔버스에 유채, 121.5×83.6cm,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용기가 필요한 걸까.

잡혀간 자코바이트 병사의 아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일까. 에피의 눈빛은 그쯤부터 바뀌었다. 분명 많은 이에게 비난받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어쩌면 남은 평생은 밖에선 얼굴도 들고 살 수 없게 되겠지만…. 에피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혼인 무효’ 소송, 승리하다


존 에버렛 밀레이, 사랑의 왕관, 1875


에피는 드디어 일을 벌였다.

1854년, 결혼 6주년에 접어드는 결혼기념일 날. 에피는 짐을 싸고 친정으로 향했다. 당혹스러워하는 러스킨을 뒤로 한 채로. 에피는 차근차근 절차를 밟았다. 먼저 러스킨에게 결혼반지와 함께 살던 집의 열쇠를 돌려줬다. 그런 다음 교회 법정을 찾았다. 소송을 걸었다. 무려 혼인 무효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에피는 첫날밤의 그 사건 후 지금껏 둘 사이 무슨 일도 없었다는 점을 특히나 강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러스킨과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저 자식을 낳고 싶었을 뿐인 본인은 기만당한 게 분명하다는 식의 입장도 보였다. 에피는 훗날 이 과정을 놓고 그녀의 친구에게 “(내 순결을 내보이는 건 여러 지점에서)치욕스러웠다”고 돌아봤다.

존 러스킨, 자화상, 1861


에피의 기세 앞에 러스킨은 속수무책이었다.

법정은 에피의 손을 들어줬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엄청난 스캔들로 떠올랐다. 막 발발한 크림 전쟁 뉴스도 덮을 정도였다. 이는 당시 영국의 보수성과 두 사람이 가진 스타성, 그리고 기묘함을 넘어 기괴하기까지 한 사연 때문이었으리라. 에피는 기어코 <1746년의 사면 명령> 속 여인처럼 투쟁했다. 전리품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것은 넘쳐흐를 듯 충만한 사랑이었다.

‘그’와의 새로운 시작


존 에버렛 밀레이, 평화가 오다(평화를 맺다·일부 확대), 1856, 캔버스에 유채, 116.8×91.4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이쯤 되면 예상할 수 있듯, 에피는 곧장 밀레이와의 교제를 시작했다.

에피는 1855년에 밀레이의 청혼을 받았다. 결혼 무효 판정을 받고 1년 후인 시점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당연히 “좋아요”였다. 물론 이로써 에피는 옛 남편의 단짝 친구를 유혹한 요부(妖婦), 밀레이는 은인의 뒤통수를 친 파렴치한이라는 비난을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에피도, 밀레이도 이 꼬리표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에피는 울분에 말라죽기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았다. 밀레이 또한 맞서 싸워 자유를 쥔 그녀가 자랑스러울 뿐이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평화가 오다(평화를 맺다), 1856, 캔버스에 유채, 116.8×91.4cm,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는 오른쪽 아이가 든 건 무공 훈장이다. 어머니의 무릎 위 장난감은 사자와 닭, 칠면조와 곰으로 보인다. 이는 크림 전쟁 당시 참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오스만제국과 러시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인 메시지와 함께 나름의 상징을 채워넣어 완성도를 더 높인 셈이다.


둘의 그런 마음이 묻어난 그림이 있다. 밀레이가 결혼 2년 차에 그린 <평화가 오다>다.

화폭은 한 군인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쟁이 끝난 후 드디어 평화를 되찾은 가족의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장교인 남성은 캔버스 밖으로 신문 <더 타임스>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크림 전쟁의 종결을 알리는 기사가 실려있다. 여성은 지금껏 전장을 누볐을 그를 두 팔로 감싸안는다. 눈에선 남편에 대한 무한한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두 아이는 부모가 이러는 사이 장난감을 잔뜩 들고 왔다. 녀석들은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양 부모를 재촉하는 듯도 하다. 밀레이는 스스로를 장교에게 투영했을 것이다. 아울러 외모와 인상으로 볼 때, 에피를 그림 속 아내에 빗댔을 게 가능성이 높다.

존 에버렛 밀레이, 성 아그네스의 전야(일부 확대), 1863, 캔버스에 유채, 117.8×154.3cm, 로얄 컬렉션


에피는 그렇게 ‘러스킨 부인’에서 ‘밀레이 부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꿈꿔온 화목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밀레이는 낮에도, 밤에도 그녀를 사랑했다. 에피는 그 덕에 1856년에 첫 자식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2년간 출산을 이어갔다. 어느덧 4남 4녀의 다복한 가정을 일궈낼 수 있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성 아그네스의 전야, 1863, 캔버스에 유채, 117.8×154.3cm, 로얄 컬렉션

밀레이는 그림 속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한 겨울 밤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찬바람이 손이 떨려 붓질을 하는 데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외투도 걸치지도 못한 채 모델로 서야했던 에피도 크게 고생했을 것이다. 밀레이는 과거에도 작품을 위해 모델(엘리자베스 시달)을 긴 시간 추위로 몰고간 적이 있다. 밀레이는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그 모델 또한 이 때문에 폐렴에 걸려 고생했다.


에피를 향한 밀레이의 순정은 <성 아그네스의 전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결혼 8년 차에 완성된 작품이다. 성 아그네스는 처녀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그래서일까. 성 아그네스 축일의 전날, 처녀가 특별한 의식을 행하면 꿈에서 미래 남편을 볼 수 있다는 속설도 있었다. 저녁을 거르고, 옷을 다 벗고, 팔을 베개 밑에 두고, 그다음 천장을 보고 잠들면 된다는 식이었다. 밀레이는 이번에도 에피를 모델로 이 그림을 그렸다. 방에 홀로 선 여인은 이 의식을 위해 벌써 겉옷을 벗었다. 이제는 원피스의 옷고름을 풀고 있다. 달빛에 젖은 채 긴 머리칼을, 어깨를, 요염한 몸매를 드러내는 에피는 그 자체로 신비롭고 우아하다. 옷 주름과 장식, 레이스도 하나하나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묘사와 표현 모두 그녀를 향한 깊은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터였다.

백 번의 기회가 다시 찾아온들


존 에버렛 밀레이, 자매, 1868, 캔버스에 유채, 108x108cm, 개인소장


다만, 에피는 대가도 분명히 치러야 했다.

어딜 가도, 누구를 만나도 곱지 않은 시선이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에피의 사정을 아는 지인들은 두 사람 사이 관계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아울러 과거의 기괴한 사연도 시간이 흐를수록 어느 정도 신빙성을 얻었다. 이에 질타 수위가 조금씩 낮아지는 듯했지만,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가령 에피는 딸들의 첫 사교 무도회에도 집에 머물러야 했다. 1885년이 되자 밀레이는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준남작 지위를 받을 수 있었다. 에피는 이날 행사에서도 제대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또한 사회적 시선 탓이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봄, 1856~1859, 캔버스에 유채, 110.4×172.7cm,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그나마 다행일까. 밀레이는 에피와의 결혼 후 더욱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밀레이는 어느덧 동시대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화가 중 한 명으로도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런 그는 에피에 대해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을 보이기도 했다. 병든 그에게 빅토리아 여왕이 시종을 통해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제 아내를 만나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걸 보면. 에피는 1897년 12월 바우어스웰에서 숨졌다. 예순아홉 나이였다. 그녀는 용기를 낸 이후 평생 굴곡 있는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백 번을 다시 산들 백 번 다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에피의 남편, 그녀의 모든 소망을 이루는 데 힘과 영감을 준 밀레이는 이보다 16개월 전에 사망했다. 당시 나이는 예순일곱 살이었다. 그의 마지막 직위는 로열 아카데미 원장이었다. 밀레이 또한 결단의 순간, 그 시점으로 백 번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들 같은 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구출하고, 쟁취하기 위해.

존 에버렛 밀레이, The Ransom, 1860~1862, 캔버스에 유채, 114.3×129.5cm, 게티 센터


그렇다면 다시 홀몸이 된 러스킨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러스킨은 서서히 평론의 범위를 넓혔다. 예술뿐 아닌 정치, 경제, 문학, 교육, 역사 등 분야로도 두툼한 글을 썼다. 각 영역에서 모두 전문성을 인정받기까지 했다. 그는 어느덧 영국을 대표하는 사상가가 돼 있었다. 다만, 사랑에는 또 실패했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1858년, 러스킨은 로즈 라 투슈라는 소녀에게 사랑을 느꼈다. 문제는 당시 그는 서른아홉 살, 투슈는 고작 열 살이었다는 점이다. 러스킨은 투슈가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그해, 러스킨은 투슈에게 청혼을 했다. 돌려받은 건 매몰찬 거절이었다. 러스킨은 이후 결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학문에만 매달리다 1900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했던 삼각관계 스캔들도 막을 내렸다.

<참고 자료>

존 러스킨 라파엘전파, 존 러스킨, 좁쌀한알

라파엘전파 회화와 19세기 영국문학, 손영희, 한국문화사

라파엘 전파, 팀 베린저, 예경

그리다, 너를, 이주헌, 아트북스

Sir John Everett Millais, Baldry, Alfred Lys, Legare Street Press

기자의 말풍선


러스킨의 예술관, 밀레이가 속한 라파엘전파의 지향점,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해 열심히 썼지만…. 글이 더(!) 길어질 듯해 빼두었습니다. 언젠가 다음에는 이 이야기도 전해드릴게요.

존 에버렛 밀레이, 눈 먼 소녀, 1856, 캔버스에 유채, 82.6×62.2cm, 버밍엄 박물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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