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27세 청년의 자살과 유서, 전 세계 ‘충격’에 빠뜨렸다…도대체 무슨 일? [음덕후:뮤지션으로 읽다]

1991년, 너바나 ‘네버마인드’(Nevermind) 발매
기성세대 문화를 ‘폭파’시키며 등장…세대의 우상이 되다
‘록 스타’를 혐오한 ‘록 스타’…번민 끝에 스스로 생 마감

Nirvana [nr│vːn] 열반. 해탈. (불교에서) 고통과 욕망, 자아감이 없는 초월적 상태로, 죽음과 환생의 순환에서 해방됨.

시애틀 경찰청이 2016년 11월에 공개한 커트 코베인의 사망 현장에 놓여 있던 유서. [시애틀 경찰청]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로 촉발된 경제 침체, 물질주의 ‘헤어 메탈’ 시대에 종말을 고하다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대중음악 씬의 변화는 단순히 음악적 흐름만을 두고 설명하기 어렵다. 1980년대 긴 머리와 가죽바지,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돈과 파티, 술과 여자를 외치던 ‘헤어 메탈’(Hair Metal)이 급부상한 배경에는 당시 경제적 번영과 소비주의, MTV와 같은 미디어의 발전이 있었고, 1990년대 초반 너바나를 비롯한 그런지(Grunge)가 떠오르게 된 데에는 경기침체와 사회적 불안, 세대 간 가치관의 변화가 얽혀 있다.

1980년대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아래 경제 호황을 경험했다.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고 불리는 감세 정책과 규제 완화에 기업과 금융 시장이 성장했고, 미국은 물질적 풍요와 소비 중심 문화를 누렸다.

사치와 화려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당시 대중의 가치는 ‘본 조비’(Bon Jovi),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 ‘스키드 로우’(Skid Row) 등의 뮤지션들이 추구하는 ‘화려한 록 스타적 라이프 스타일’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고, 이들 뮤지션은 주류 음악의 중심이 되어 크게 흥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7년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를 기점으로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경제 불황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1929년 대공황 이후 가장 큰 주식시장 붕괴로, 블랙 먼데이의 충격은 세계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쳤는데,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불안정해지면서 대량 해고구조조정이 시작됐고 많은 이들이 경기 침체의 공포를 느끼며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했다.

여기에 1990년대 초 걸프전까지 발발하면서 젊은 세대는 베트남전 이후 처음으로 전쟁의 불안을 경험해야 했다. 당시 청년들은 전쟁을 역사책에서만 접했던 세대였고, 징병제는 없었지만 전쟁이 길어질 경우 징집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확산됐다.

미 증시 주가가 사상 최대 폭으로 급락한 1987년 10월 19일 ‘블랙 먼데이’ 의 뉴욕 증권거래소. [AFP]

평화롭고 풍요로운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면 성공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던 베이비붐 세대와는 달리, 경기침체와 전쟁의 이중고 속 X세대(1965~1980년생)는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의 붕괴, 미래에 대한 절망, 전쟁의 공포를 느꼈고 이들 사회 전반에는 이에 따른 기성체제에 대한 분노와 환멸, 사회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적인 가치관이 퍼지게 된다.

기성세대의 유산이 낳은 성공과 부를 노래하는 기존의 대중문화에 싫증과 피로감을 느끼던 대중적 분위기가 횡행하던 1991년,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버린 음반이 등장하는데, 시애틀 출신 3인조 밴드 너바나(Nirvana)의 두 번째 앨범 ‘네버마인드’(Nevermind)의 발매는 새로운 청년 문화와 정서를 반영하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I feel stupid and contagious.
Here we are now.
Entertain us”
(난 멍청하고, 전염된 것 같아
자, 우린 여기 있어. 우릴 즐겁게 해봐)
- 너바나,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 -

시애틀 출신 3인조 밴드 너바나(Nirvana)의 두 번째 앨범 의 발매는 새로운 청년 문화와 정서를 반영하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너바나 공식 인스타그램]

방황과 냉소의 강렬한 고함(高喊), 시대와 세대를 ‘폭발’시키다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 속 터져나오는 후렴구와 클라이막스에 반복되는 “a denial(존재나 사실에 대한 부정 혹은 부인)” 파트는 30여년이 지난 지금 시대에 듣기에도 거칠고, 맹폭하다. 너바나의 곡들은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잠잠한 첫 구절에서 시작하다가 후렴구에서 기타의 톤이 거칠게 변하면서 갑작스레 폭발하는 구조(Quiet-Loud-Quiet)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곡의 긴장감과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지며 감정적 전달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서 청취자는 하나의 곡 안에서 강렬한 대비를 경험하고 다이나믹한 변화를 느끼며 강력한 몰입감을 갖게 된다.

펑크(Punk)의 영향을 받아 코드(Chord·화음) 진행은 단순하다. 대부분의 곡은 4~5개의 코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반복적인 패턴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기타에서 묵직하고 무게감 있는 사운드를 가진 5,6번 줄을 주로 사용하는 파워 코드(Power Chord·5th 코드)로 곡을 이끄는 방식이다. 여기에 일반적인 팝 록의 진행과 달리 반음(세미톤) 움직임을 활용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느낌을 주는 요소를 만든 후 지글지글 끓는 듯한 기타 톤을 ‘지저분하게’(Grunge) 입히는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의 방식을 사용한다.

즉, 너바나의 음악은 기존의 펑크와 하드 록, 노이즈 록 등의 영향을 받고 테크닉을 차용했지만, 그 요소들을 조합하는 방식을 기존과 다르게 배치하고 표현함으로써 전례 없는 사운드를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너바나의 음악은 기존의 펑크와 하드 록, 노이즈 록 등의 영향을 받고 테크닉을 차용했지만, 그 요소들을 조합하는 방식을 기존과 다르게 배치하고 표현함으로써 전례 없는 사운드를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너바나 공식 인스타그램]

청년들의 문화를 뿌리까지 뒤흔들며 X세대를 이끈 너바나의 당대 영향력과 파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이 가진 사회를 향한 냉소와 반항, 동시에 자기혐오적이고 불안정한 정서는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모호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표현됐다.

작곡과 작사를 담당했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은 ‘리튬’(Lithium)에서 “난 정말 행복해, 오늘 친구들을 찾았거든. 내 머릿 속에서 말이야(I’m so happy ‘cause today I’ve found my friends, they’re in my head)”라며 정신적인 불안을 드러내는가 하면 ‘너 자신이 되어’(Come As You Are)에서는 “너의 모습 그대로 다가 와, 네가 있던 모습 그대로. 그래, 그렇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천천히, 그러나 서둘러. 선택은 네 몫이고, 늦지 않도록 해(Come as you are, as you were. As i want you to be. Take your time, hurry up. The choice is yours, don’t be late)”라는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명령으로 혼란스러움을 표현했다. 이는 당시 사회적 소외, 정신적 고립,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정서적 위안을 느끼게 한 동시에, 단순한 슬로건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철학적 의미로 확장되기도 하며 그를 ‘세대의 대변자’로 만들었다.

기존 세대의 유물인 상업적 음악에 대한 거부감 또한 이들을 우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커트 코베인은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나는 록 스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스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음악의 상업적인 소비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곤 했다. 그는 특히 MTV와 대형 음반사의 획일적인 음악 마케팅을 정면으로 비판했는데 헤어 메탈 밴드들이 MTV를 통해 인위적인 록 스타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식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커트 코베인은 이에 대해 “MTV는 음악을 죽였다”며 “음악은 이제 단순한 상품이 됐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네버마인드’가 예상치 못한 대성공을 거두면서, 역설적으로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이 MTV에서 끊임없이 방송되면서 너바나는 세계적인 밴드가 돼버렸다. 커트 코베인에게 음악을 통한 자기 표현은 그의 정서적 혼란과 괴로움을 표현하는 배출구이자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음악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지만, ‘네버마인드’가 3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업적인 록 스타가 되어버렸다. 성공을 거부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인 음악을 포기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셈인데, 그는 록 스타가 되는 것이 자신의 본질을 망가뜨린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괴로움에 빠져갔다.

그리고 그렇게, 혼돈과 모순과 갈등 속에서, 그의 정신은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었다.

“I am my own parasite.
I don‘t need a host to live.
I give myself the flu.
I milk it for all it’s worth”
(나는 나 자신의 기생충이야.
숙주 없이도 살 수 있어.
나는 나 스스로를 병들게 하고,
거기서 모든 가치있는 것들을 쥐어짜내)
- 너바나 ‘밀크 잇’(Milk It) -

커트 코베인은 여러 차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나는 록 스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스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음악의 상업적인 소비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하곤 했다. 그는 특히 MTV와 대형 음반사의 획일적인 음악 마케팅을 정면으로 비판했는데 헤어 메탈 밴드들이 MTV를 통해 인위적인 록 스타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식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 [너바나 공식 인스타그램]

“모든 열정이 사라졌다”…사랑과 증오와 연민과 자책의 번뇌(煩惱),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다

1994년 4월 8일 오전 8시 40분경, 커트 코베인은 보일러 수리를 위해 방문한 수리기사에 의해 자택의 온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시신의 품에는 산탄총이 놓여 있었고, 현장에는 헤로인 주사기와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앞서 4월 1일 헤로인 중독 치료를 위한 재활 센터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한 지 약 일주일 만이었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시애틀행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에서 우연히 건즈 앤 로지스의 멤버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산탄총을 구입한 정황들이 포착됐다.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은 시신이 발견되기 약 3일 전인 4월 5일로 추정되고 있다.

무대 위에서 울부짖으며 폭발적으로 노래하는 그의 모습과는 달리 실제 그는 수줍음 많고 예민하고 여린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술했듯 그는 인기와 명예를 즐기는 록 스타라기 보단, 예술적 감수성과 내면의 고뇌가 공존하는 인물에 더 가까웠다. 동시에 상처받기 쉬운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세상과 음악,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했다.

특히 그는 너바나의 상업적 성공과 음악의 상업화에 반발하는 정체성 사이에서 크게 괴로워했는데 어느 날은 공연장에서 “우리를 록 스타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외치는가 하면 한 인터뷰(1993, Spin)에서는 “나는 항상 내면의 공허함과 싸우고 있다. 음악은 그 공허함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느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인터뷰(1994, Rolling Stone)에서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매일매일이 투쟁이다”라고 밝히며 내면의 고독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의 죽음 저변에는 마약과 위장병, 조울증 등이 무겁게 깔려있는데 커트 코베인은 심각한 위장장애, 만성적인 정신 질환, 그리고 헤로인 중독에 시달렸고, 이 세 가지 요소는 그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었다. 정확한 진단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크론병이나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유사한 증상을 가진 극심한 위장 통증과 소화 불량을 만성적으로 겪었다. 커트 코베인에 따르면 일반적인 진통제나 치료 방법으로는 고통이 전혀 완화되지 않았고, 음식 섭취가 어려워지면서 신체적으로 무력하고 피곤한 상태가 지속됐다. 이에 그는 위장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기 위해 헤로인을 사용하기에 이르는데, 결국 헤로인에 의한 의존과 중독을 겪게 되고 중독이 심해지면서 밴드 활동, 인간관계, 정신건강까지 피폐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커트 코베인의 아내 코트니 러브(Courtney Love)를 비롯한 그의 지인들은 그를 설득해 마약 중독 재활 센터에 입원을 하도록 하지만 그는 입원 이튿날 센터에서 도망쳐 나와 시애틀의 자택으로 귀가, 유서를 남긴 뒤 구입한 산탄총을 머리에 겨눠 자신의 삶을 끝낸다.

“I’m not like them, but I can pretend.
I think I’m dumb, or maybe just happy.
I think I’m just happy, I think I’m just happy”
(난 그들과 달라, 하지만 비슷한 척 할 수는 있어.
난 멍청한 걸까, 아니면 그냥 행복한 걸까?
난 그냥 행복한 거야, 난 그냥 행복한 거야)
- 너바나, ‘멍청이’(Dumb) -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그런지 문화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뮤지션의 사망이 아니라 1990년대 대중음악의 방향성을 바꾸는 계기가 됐는데, X세대의 정서를 대표하던 문화가 너무나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이토록 우울하고 냉소적인 문화가 한계를 맞이했다는 신호를 주게 된다. [너바나 공식 인스타그램]

커트 코베인의 유서에 담긴 “천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 번에 불타버리는 것이 낫다(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는 뮤지션 닐 영(Neil Young)의 ‘헤이 헤이, 마이 마이’(Hey Hey, My My)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원곡자인 닐 영은 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슬픔과 후회를 표했다.

닐 영은 “그가 죽고 나서 그 유서를 남겼을 때 내 마음은 엉망이 됐다”며 “그와 소통하고 싶었다. 그에게 닿지 못한 것이 너무나 유감스럽다. 내가 그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그냥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너무나 후회스럽다”고 밝혔다.

또한 커트 코베인이 존경했던 뮤지션 R.E.M.의 마이클 스타이프(Michael Stipe)는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전 그에게 협업을 제안했었던 일화를 밝히며 “그의 생명을 구하려는 시도로 협업을 제안했던 것”이라며 “그는 정말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와 연락을 시도할 핑계를 만들기 위해 협업을 제안했었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후 이들은 앨범 ‘몬스터’(Monster)에서 ‘렛 미 인’(Let Me In)이라는 곡을 통해 커트 코베인이 남긴 유산을 기리며 그를 추모하기도 했다.

너바나 MTV 언플러그드 인 뉴욕(Unplugged in New York) 공연 당시 커트 코베인. [너바나 공식 인스타그램]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그런지 문화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뮤지션의 사망이 아니라 1990년대 대중음악의 방향성을 바꾸는 계기가 됐는데, X세대의 정서를 대표하던 문화가 너무나 극단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대중들에게 이토록 우울하고 냉소적인 문화가 한계를 맞이했다는 신호를 주게 된다. 이에 음악 산업 또한 그런지 중심의 트렌드를 지속할지 고민에 빠지면서 그런지 씬은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 레코드사들은 이 자리를 그런지와 비슷하지만 더 대중적인 사운드를 가진 밴드들을 띄우기 시작한다.

여기에 또 다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1990년대 후반 Y세대(밀레니얼 세대)가 대중문화 소비의 중심이 되면서 너바나 식의 극단적인 정서를 가진 음악은 대중문화에서 힘을 잃기 시작한다. 특히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고 Y2K와 새로운 시대(2000년)에 대한 낙관주의가 퍼지며 대중들은 록 스타의 고통보다, 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문화를 찾게 된다. 이에 대중문화는 다시 한 번, 더 상업적이고 즐거운 방향으로 이동해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와 백스트리트 보이즈(Backstreet Boys) 등의 아이돌 팝이 부활하고 한편으로는 힙합의 부상을 촉진한다.

그렇게 커트 코베인과 너바나, 록 스타가 되기를 거부했던 마지막 록 스타의 신화는 막을 내렸다.

그런지의 영웅, X세대의 대변자, 고통받았던 록 음악의 순교자, 그리고 열반을 꿈꿨던 한 명의 인간.

천천히 희미해지는 것이 아닌 한 순간 불에 타 사라지기를 바랐던 그는, 지금 평화로운 장소에 이르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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