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 참사서 딸 잃은 노(老)부부 인터뷰
난지도 쓰레기장서 찾은 딸의 유해
정부의 미흡한 재난대응 참상의 기억으로 남아
![]() |
10일 전남 고흥 자택에서 만난 손씨 부부는 30년 전 딸 경아 씨가 선물로 줬다는 마스카라를 꺼내 보였다. 딸이 세상을 떠난 뒤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어머니 김씨는 말했다. 마스카라 뒤로 학창 시절 경아 씨의 앳된 얼굴이 희미하게 보인다. [전남 고흥=이영기 기자] |
[헤럴드경제=이용경·이영기 기자] 50년 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식당을 하던 젊은 부부는 어렵사리 딸 하나를 얻었다. 넉넉지 않은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이들의 일상은 삶의 유일한 기쁨으로 채워졌다. 딸의 이름을 ‘경사스러운 아이’라는 뜻을 담아 ‘경아(慶兒)’로 지었다. 새벽부터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부모에게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고마운 딸이었다. 늘 상냥하고 구김이 없었으며, 매 순간 명랑하면서도 착했다. 하지만 한순간에 소중한 딸을 잃었다. 올해로 30년이 됐다. 경아 씨는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의 희생자다. 그녀의 나이 19살 때였다.
생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고(故) 손경아 씨는 일찌감치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직전에는 학교의 추천으로 삼풍백화점에 취업했다. 그러나 잡화부 직원으로 일한 지 5개월째 되던 날, 그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경아 씨를 낳고 기쁨에 휩싸였던 젊은 부부는 세월이 흘러 80대를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올해로 6년째 삼풍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손영수(78·父) 씨와 부인 김덕화(71·母) 씨가 바로 그들이다. 손씨 부부는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하루에 수십 번 딸을 생각한다고 담담히 말했다. 손씨는 “조금만 뭔 일 있어도 그냥 딸이 떠오른다”며 “좋은 일이 있건 나쁜 일이 있건 항상 우리 딸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했다.
옆에서 함께 딸을 추억하던 김씨는 금방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녀는 “정말 우주를 다 준대도 바꿀 수 없는 딸이었다”며 “경제적 뒷받침을 충분히 해주지 못한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귀한 딸이었으면 그만큼 사랑을 많이 주고 키웠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딸을 가슴에 묻은 채 살고 있는 노(老)부부는 생전에 딸이 사준 선물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김씨는 “딸이 삼풍백화점에 취직해 첫 월급을 탔다며 사다 준 선물들”이라며 빨간 내복과 마스카라, 넥타이를 꺼내 보였다. 구슬 달린 티셔츠와 운동화는 한 번도 쓰지 않고 보관해 뒀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여전히 딸 경아 씨의 30년 전 사진을 낡은 지갑 속에 품고 매일 바라보며 산다.
삼풍유족회 운영 어려움…많은 지원·관심 필요
이러한 손씨 부부에게도 사고 당시는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서초동 사고 현장에 6개월가량 머물렀던 부부는 정작 딸의 유골을 붕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붕괴 사고로 발생한 건물 잔해는 난지도로 보내졌는데, 서울시 사고대책본부가 ‘건물 잔해 속에 시신이나 유류품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실종자 가족들의 지적에 따라 현장 확인 작업에 나서면서다. 손씨는 “당시 시신 수습이 안 끝났는데도 구조 당국이 포크레인으로 건물 잔해를 긁어서 그렇게 된 것 같다”며 “우리는 난지도에서 경아의 명찰을 찾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 |
노부부는 30년 전 딸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보여주며 잠시 행복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전남 고흥=이영기 기자] |
특히 손씨 부부가 겪은 참상은 정부의 미흡한 재난 대응으로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김씨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 6·25전쟁 이후에 제일 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것”이라며 “그 당시를 생각하면 그때도 피해 유족들이 가장 힘없는 존재들이었지만 유족회를 운영하는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내무부 사고 수습 당시 자료를 보면, 당국의 대처가 현저히 미흡했다는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사망자와 실종자 통계가 일치하지 않았고, 구조현장에 수많은 취재진이 일시에 모이면서 사고수습과 구조 활동에 지장이 초래되기도 했다. 특히 사상자 후송관리 등 재난수습 총괄지휘 체계가 확립돼 있지 않아 피해자 신원 파악이나 유가족에 대한 안내도 부족했다. 손씨는 “당시에는 척추가 부러진 사람을 그냥 아무 준비 없이 들쳐업고 택시에 실어 병원을 보내 회복할 수가 없게 된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며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운 사고 현장에 살아서 고통을 겪을 바에는 차라리 하느님 곁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비를 써가며 6년째 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손씨는 인터뷰 끝에 작은 희망 사항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재 우리 삼풍유족회는 회원들이 대부분 고령이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다”며 “모든 활동 비용을 개인 돈으로 쓰고 있는데, 삼풍 참사에 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도록 많은 지원과 관심을 부탁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들 노부부처럼 삼풍 참사 유족들의 트라우마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보다 수십 년의 시간이 더 지나도 아픔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전역에는 여전히 각종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수많은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