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브러진 술병, 14번이나 신고했는데…끝내 폭력에 사망한 동거녀 [세상&]

가정폭력으로 사망…대법 “단순 시비 분류 경찰, 징계해야”
3차례 현장 출동했지만 단순 ‘시비’로 입력
1심 징계 취소→2심 징계 정당
대법, ‘징계 정당’ 결론


[DB]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경찰에 14차례 신고했음에도 피해자가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사건에서 사건코드를 ‘가정폭력’이 아닌 ‘시비’로 분류한 경찰을 징계한 건 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는 데 소홀했다는 취지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신숙희)는 경위 A씨가 “불문경고 징계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이같이 판시했다. 대법원은 A씨에 대한 징계가 타당하다고 본 원심(2심) 판결이 정당하다며 확정했다.

사건은 2021년 8월 새벽 4시께 발생했다. 파출소에 “남편과 시비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A씨는 현장에 1차 출동했다. 집엔 술병이 10병 정도 놓여 있었고, 남편과 아내 모두 만취한 상태였다. 남편은 “안 때렸다”며 폭행 사실을 부인했다. 아내는 ‘남편을 집 밖으로 내보내달라’는 의미에서 손만 흔들었다.

A씨가 남편에게 “밖에 나가서 자고 들어올래요?”라고 묻자, 남편은 “알겠다”고 했다. A씨는 남편을 순찰차에 태워 인근 행정복지센터에 하차시킨 뒤 복귀했다. 하지만 남편이 다시 집으로 찾아와 신고가 또 들어왔다. A씨는 2차 출동해 집 문밖에서 자고 있는 남편에게 “술 깨면 집에 들어가라”고 한 뒤 복귀했다.

하지만 남편이 집문을 두드리면서 다시 아내의 신고가 들어왔고, A씨는 이날 3번째 출동했다. A씨는 남편에게 “제발 그러지 마라”고 당부한 뒤 파출소에 복귀했다. 이때가 새벽 6시쯤이었다. A씨는 사건 종별코드를 처음 분류됐던 ‘시비’에서 ‘가정폭력’으로 변경하지 않은 채 다음 순찰팀원과 교대했다.

교대 이후에도 남편의 행동은 반복됐다. 다른 경찰관이 출동해 “소란행위를 계속하면 경범죄로 범칙금을 고지하겠다”고 경고했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내는 경찰에 “남편이 폭행한 것으로 치고 체포해달라”고 했으나 경찰은 “허위 진술이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만류했다.

이날 아내는 14차례의 신고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의해 사망했다. 남편은 아침 9시께 창문의 방범 철조망을 뜯어내고 주거지로 들어갔다. 계속 술을 마시다 아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가 나 아내를 폭행했다. 결국 아내는 머리가 벽에 부딪히면서 사망했다.

경찰청은 2021년 12월, A씨에게 견책(주의)의 징계처분을 했다. 현장 출동 다시 가족 간 폭행 등을 인지했으면 위험성 조사표를 작성하고, 사건 코드를 ‘가정폭력’으로 분류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사건 코드가 가정폭력이었다면 적절한 후속조치가 이뤄질 수 있었다고 봤다.

A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심사를 청구한 결과, 징계 처분이 불문경고로 감경됐다. 하지만 A씨는 불문경고에 대해서도 취소를 요구하며 소송을 냈다. 징계 처분 자체를 취소해달라고 했다.

1심에선 A씨가 이겼다. 1심을 맡은 의정부지법 1행정부(부장 이영환)는 2023년 6월, A씨의 징계를 취소했다. 1심 재판부는 “A씨가 출동했을 때 남편은 미안해하는 기색과 다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제하려는 태도만 보였을 뿐 아내에 대한 분노나 공격적인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며 “이런 상황에서 A씨가 장차 가정폭력이 발생할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예측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이어 “A씨는 아내의 요구를 수용해 남편의 퇴거를 유도했으며 술이 깨기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등 두 사람이 분리되도록 조치했다”며 “가정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는데 단지 사건 코드를 ‘가정폭력’으로 변경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직무를 게을리했다고 할 순 없다”고 했다.

반대로 2심에선 A씨가 졌다.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11행정부(부장 최수환)는 지난해 1월, A씨에 대한 징계가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경찰의 ‘가정폭력 대응 업무 매뉴얼’에 따르면 가족 간 단순 다툼·언쟁이라도 반드시 ‘가정폭력’으로 신고코드를 지정하게 돼 있다”며 “해당 규정은 단순 말다툼이라도 언제든지 가정폭력범죄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성을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A씨는 1차 출동 당시 아내의 얼굴, 팔 등만을 살펴봤을 뿐 다른 신체 부위에 물리적 폭력이 있었는지, 정서적·언어적 폭력이 있었는지를 적극적으로 조사하지 않았다”며 “가정폭력이 은밀하고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점을 고려하면 A씨는 가정폭력 여부를 적극적으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A씨가 사건 코드를 ‘가정폭력’으로 변경하지 않아 재발우려가정 신고이력 관리 및 피해자 보호 연계 등 적절한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것이 피해자 사망이라는 주요한 원인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A씨에게 직무의 태만 또는 성실의무 위반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의 판단도 원심(2심)과 같았다. 대법원도 A씨의 징계가 타당하다며 확정했다.

대법원은 “A씨가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는 데 소홀했다”며 “사건 코드를 가정폭력으로 변경하지 않아 근무교대 이후 순찰팀이 적절한 후속조치를 취할 기회를 놓치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A씨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재발 위험성을 판단해야 했다”며 “따라서 징계사유가 존재한다고 본 원심(2심) 판결은 정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