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상징·메시지 속 ‘사랑’ 이야기 부각
로버트 패틴슨·나오미 애키 케미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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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키17’ 속 나샤 배릿지(나오미 애키)와 미키 반즈(로버트 패틴슨)의 모습. 영화 스틸컷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미키17’엔 심지어 사랑 이야기도 있어요. 제가 한 번도 영화에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요.”
봉준호 감독은 ‘미키17’ 개봉을 앞두고 영화 소개를 하면서 “처음으로 영화에서 ‘사랑’을 다뤘다”고 강조했다. 아빠와 딸, 엄마와 아들 등 가족 간의 사랑은 그간 ‘괴물’과 ‘마더’를 통해 다뤄왔지만, 남녀 간의 사랑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17일 용산CGV 아이맥스에서 시사회로 첫선을 보인 ‘미키17’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또렷이 남은 잔상은 나샤와 미키가 보여준 남녀 간의 순전한 사랑이었다.
2050년 지구는 인류가 살기에 너무나 엄혹한 환경이 돼 식민 행성 ‘니플하임’으로 우주선을 타고 떠난다. 마카롱 사업을 하다 사채빚를 지게 된 미키 반즈(로버트 패틴슨 분)도 ‘익스펜더블’(소모품) 직무를 받고 우주선에 탑승한다.
너절한 인간 사료마저 칼로리 단위로 배급량이 정해지는 우주선 환경에서 사령관 마샬(마크 러팔로)이 “섹스는 한 세션당 100kcal를 소진하니 목적지 행성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자제하라”로 포고령을 내릴 정도로 에너지 비축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본능적 이끌림 앞에서 미키와 나샤(나오미 애키)에게 그런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는 들릴 리 만무하다.
조종사, 전투 요원, 의료진, 과학실험 연구원 등 분명한 사명이 있는, 우주선에 탄 사람들은 존재 이유 자체가 ‘모르모트’(실험용 생명체)인 미키를 같은 인간이 아닌 하등의 존재로 취급한다.
이전 버전의 미키가 임무 중 소멸되고 휴먼 프린터기에서 새로운 미키가 탄생할 때 그들은 바로 옆 테이블에서 동전 세우기 게임을 하고 난장을 피운다. 심지어 미키에게 이전 삶의 데이터를 주입하는 전선을 뽑아버리기도 한다.
패틴슨이 연기한 미키, 미키1~16 모두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묵묵히 따르지만 유독 미키17은 더 불쌍한 얼굴로 비춰진다. 부당한 요구에도 웃으며 ‘예스(yes)’라고 하는 물러터진 남자, 안쓰럽기 그지없다.
원작 소설에서도 미키는 가차 없이 이용당하고 버려지지만, 패틴슨이 연기하는 청초하면서도 가여운 얼굴, 그리고 어딘가 모자란 듯한 새된 목소리의 미키17를 스크린에서 실제로 마주하니 슬픔이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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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니플하임’에 맨 먼저 내려 공기 중 바이러스를 생체실험하는 미키. 영화 ‘미키17’ 스틸컷 |
나샤 배릿지는 마샬 훈장만 다섯 번을 수상한 최정예 전투 요원이다. 이 ‘알파 우먼’에게 미키는 매력적인 병약미로 가득한 남자이며, 지켜주고 싶은 존재다. 그래서 나샤가 미키를 사랑하는 방식은 가끔은 엄마가 아들을 보호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나샤는 방호복을 입고 실험실에 들어가 신경가스를 온몸으로 실험당하며 죽어가는 미키를 끌어안고 마지막을 배웅하는데, 그 모습은 마치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상’을 본뜬 듯한 모습이다.
또 그녀는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며 만천하에 자신이 미키의 유일한 여자라 떠들고 다닌다. 미키가 다른 여자와 이야기만 나눠도 키스로 대화를 중단시키는 집착적인 모습마저 보인다. 심지어 나샤는 미키17과 미키18 두 명의 등장하는 ‘중복’ 사태에도 걱정과 우려보다는 ‘순한맛’과 ‘매운맛’ 두 버전이 생겼다면서 환호한다.
소설에 나왔던 미키17과 미키18, 나샤의 정사 장면은 불청객 카이(안나마리아 브로톨로메이)의 등장으로 초반에 중단되지만, 미키를 향한 나샤의 사랑이 더욱 강조되는 장치가 된다.
미키 역시 극중 내내 ‘나의 나샤’라고 그녀를 부른다. 카이가 미키를 방으로 초대해 작업을 걸자 머릿속에서 ‘나의 나샤가 싫어할 거야’라는 경보음이 곧장 울리며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대쪽 같은 결단력을 보여준다.
영화 ‘미키17’은 ‘미키’가 17번째 죽음의 위기를 겪던 중,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18’이 프린트되면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이야기를 그린다. 초반 설정과 이야기는 원작 소설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중반 이후부턴 봉 감독이 자신의 방식으로 완전히 새로 창조해 냈다.
하지만 엔딩 만큼은 원작의 흐름을 다시 좇는다. 나샤와 미키가 행복한 앞날을 기대하는 모습으로 끝낸 것. 나샤는 미키17에게 휴먼 프린터기를 폭파하는 스위치를 직접 누르게 하고, 앞으로 둘이 세월에 따라 같이 나이를 먹어갈 수 있다며 기뻐한다.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젊을 때나 늙어서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이 둘의 관계성은 인류가 처한 절박한 환경과 대비되며 더 가치 있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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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모트처럼 십수번 실험당하고 버려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미키 반즈. [영화 포스터] |
2시간 16분짜리 영화에는 봉 감독이 전하고 싶은 수많은 메시지와 상징, 그리고 유머가 모두 담겨있다. 토착 생명체 ‘크리퍼’를 두고 외계생물이라 부르며 척결을 명하는 개척민 수장 마샬과 ‘우리가 외계에서 왔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일갈하는 나샤의 말싸움 장면도 하나의 상징적 메시지로 읽힌다. 마치 미국 아메리카 인디언과 개척자 유럽 백인들의 관계성과 비슷한 모습이다.
봉 감독이 ‘미키17’을 두고 “인간미 넘치는 SF가 될 것”이라고 공표한 것처럼 비장한 우주 정복 영화가 아닌, ‘우매한 인간 군상 속에서 피어난 순수한 사랑’을 보는 색다른 재미로 접근해도 좋을 듯하다.
미키17/ 감독 봉준호· 출연 로버트 패틴슨, 나오미 애키, 마크 러팔로, 스티븐 연 등/ 2월 28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