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김민아 “과거 아닌 현재 이야기”
“차인표 배우 깊이있는 연기에 먹먹해져”
27일 예술의전당서 국립합창단이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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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함성’ 김민아 작곡가 [국립합창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온몸으로 버텨낸 뜨거운 애국을 기억하오, 심장에서 퍼올린 뜨거운 피로 여기에 모여 큰 소리 외쳐, 거룩한 그대들의 함성을 우리는 기억하네.” (‘거룩한 함성’ 중)
참혹한 일제 강점기, 멍든 생이었지만 무너지거나 꺾이지 않았던 여성의 이름이 적힌다. ‘정옥분’, 열여섯 소녀에서 여든의 노인이 되기까지 처절하고 쓰려도 끝끝내 희망을 놓지 않았던 그 이름. 누구도 몰랐지만, 모두가 알고있는 그의 생이 노래가 됐다. 국립합창단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올리는 3·1절 기념음악회 ‘거룩한 함성’(2월 27일, 예술의전당)이다.
작곡가 김민아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거룩한 함성’은) 소녀에서 할머니가 되기까지 한 사람의 파란만장한 생을 다양한 합창으로 표현한 ‘합창 음악극’”이라고 말했다.
국립합창단은 지난해 2월 세계 초연으로 올릴 광복 80주년 기념 3·1절 합창곡을 김민아 작곡가에게 위촉했다. 그가 가장 먼저 진행한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와 엄혹한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 조사였다. 이 기간만 무려 3개월. 과거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는 14개의 장면과 곡(합창, 아리아 포함)으로 태어났다. 작곡은 물론 작사를 통한 전체적 스토리텔링 역시 김민아 작곡가가 했다. 대본과 연출은 김숙영이 맡았다.
‘거룩한 함성’은 일종의 ‘합창 드라마’다. 기존의 합창 공연이 솔리스트가 주도하고, 합창은 화음과 같은 보조적 역할에 그쳤다면 이번 공연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합창이 주도해 합창의 장점과 색깔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음악극을 만들고자 했다”며 “음악극인 만큼 합창이 스토리를 전달하고 끌고가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특히 “악기로서의 (국립합창단 단원들의) 음색, 음역, 딕션 등 각각의 특성을 고려해 곡을 썼다”고 했다.
정옥분은 ‘허구의 인물’이다. 1930년대 소녀 시절을 보낸 신여성으로 만주로 끌려가 희생을 강요당했고, 해방 후엔 하와이로 떠나 아들과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그 시대의 필부필녀였고, 역사를 지나온 ‘보통의 삶’이었다.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처럼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우리 옆집, 혹은 건너건너 알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일 수도 있죠. 남의 이야기나 아주 특별한 이야기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아닌 우리와 우리의 할머니가 지나온 삶이라는 공감이 중요한 지점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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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함성’에 출연하는 배우 차인표 [국립합창단 제공] |
작품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이면서 시대와 세대의 변화가 가져온 정서적 간극을 뛰어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김 작곡가는 이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온 모두가 ‘거룩한 함성’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독립군만이 거룩한 함성을 외친 주역이 아니라, 남편과 자녀를 사지로 보낸 뒤 정안수를 떠다 놓고 안녕을 바라는 어머니, 거리로 나오지 않았어도 그 시절을 인내하며 견딘 사람들 모두의 희생과 아픔이 우리의 오늘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합창 드라마답게 전개가 극적이다. 역사 안에서 주인공 정옥분에겐 위기와 절망이 따라오고. 혹독한 시절의 트라우마로 착란 증세를 일으킨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는 것은 가족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 역시 전반부에선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저항을, 후반부에선 해방 후 가족과 화합의 과정을 담아냈다.
김 작곡가는 “밝고 사랑스러웠던 소녀 시절의 가벼운 선율, 변화무쌍한 감정이 들끓는 혹독했던 청년 시절은 왜곡된 선율과 불규칙한 박자, 희망의 날에 가까워진 노년엔 절제된 음악을 썼다”고 말했다. 주인공이 과거로 인한 트라우마로 착란증세를 일으킬 땐, 근현대의 모던한 음악 스타일로 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변화를 표현했다.
암울한 역사라 해서 비장하고 슬픈 감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 작곡가는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둡게 그리고 싶지 않았고, 우리의 밝은 미래를 그리기 위해 곡의 분위기도 희망차게 매만졌다”고 했다.
음악극인 만큼 성악가와 배우가 어우러져 밀도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정옥분 역은 소프라노 조선형이, 그의 손자인 최강산 역은 배우 차인표가 맡았다. 차인표는 “조부모 세대의 고통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라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강제로 동원된 여성들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아픔을 충분히 기억하지 못했다. 공연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닌 지금도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차인표에 대해 김 작곡가는 “엄청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줘 연습 때마다 먹먹하고 눈물이 난다”고 귀띔했다.
‘거룩한 함성’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며 ‘보통의 힘’으로 일군 연대의 가치와 희망을 노래한다.
“위기를 극복하고 역경을 이겨내 승리를 쟁취한다는 메시지가 어지러운 현시국에서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와 승리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고, 치유를 이야기해야 하는 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