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성소수자들 문화가 어쩌다?”…세상을 지배하며 전 세계 ‘댄스 열풍’에 빠뜨린 바로 ‘그 음악’ [음덕후:뮤지션으로 읽다]

비지스, 1977년 발매된 <토요일 밤의 열기> 영화 OST 참여

전 세계적 디스코 열풍…소수자들의 음악이 메인 스트림으로

반(反) 디스코파 ‘디스코 폭파의 밤’ 기점으로 본격적인 쇠퇴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콘텐츠

 

디스코 클럽은 단순한 유흥 공간이 아닌,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여성이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였으며,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춤 추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해방의 상징이었다. [Bill Bernstion 공식 웹사이트 캡처]

[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디스코 클럽이 문을 연 지 한 달 만에 2000명의 손님이 몰려들었다. 운영일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럽은 매일 밤 인산인해를 이뤘다”(1979, New York Magazine)

1970년대는 미국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제조업이 중심이었던 산업 구조가 변화하면서 탈공업화가 진행됐고 기존 공장이 폐쇄되거나 교외로 이전하면서, 도심에는 빈 공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서비스 산업, 금융업,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성장하면서 야간 경제(night economy)가 확대되었는데, 이 같은 경제 구조 변화는 도심에 클럽과 바, 디스코텍 같은 엔터테인먼트 공간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뉴욕에서는 낙후된 산업 지역이 예술가와 음악인들의 창작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자연스럽게 클럽 문화와 DJ 문화가 성장할 기반이 마련됐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디스코(Disco) 장르가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디스코의 세계적 열풍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등장하는 마돈나(Madonna)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주도하는 댄스 팝의 전성기에도 영향을 미쳐, 사실상 현대까지 이어지는 대중문화의 흐름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도나 섬머는 ‘디스코의 여왕’으로 불리며 여성 중심의 디스코 문화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AP]

 

“클럽으로 모여!”…성(姓) 혁명과 LGBTQ+ 해방 운동, 디스코 열풍의 발판이 되다

1970년대 초반, 대중음악의 주류는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딥 퍼플(Deep Purple) 등을 필두로 한 영국과 미국 중산층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인 록 음악이었다. 당시의 록 음악은 남성적 에너지, 반항 정신 등을 강조하는 음악이었으며, 특히 하드 록과 프로그레시브 록은 여성 팬들보다 남성들의 관심을 끄는 음악적 구조(강렬한 기타 솔로, 남성성이 강조된 보컬 스타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남성 중심 록 음악계에서의 여성은 ‘록 스타의 뮤즈’, ‘그룹의 댄서’ 등 객체화된 존재로 소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흑인 음악과 라틴계 음악 요소가 결합한 디스코의 태동은 도시화에 따른 다인종 사회의 형성, 페미니즘의 발전, 성소수자(LGBTQ+) 해방 운동과 같은 사회적 변화와 함께 탄생하고 발전한 결과물이었는데, 1969년 뉴욕에서 발생한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s·성소수자 커뮤니티가 경찰의 폭력적 단속에 저항하며 벌인 시위)은 디스코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범죄자로 간주하면서 탄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성소수자들은 스톤월 항쟁 이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커뮤니티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공공장소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고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출할 수단이 필요했다.

결국 이들은 지하의 클럽 등 나이트 라이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모여들었고, 그 안에서 춤을 추며 자아를 표현하면서 당시 클럽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디스코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이들에게 디스코 클럽은, 단순한 유흥 공간이 아닌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였으며,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춤 추고,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해방의 상징이었다.

이 과정에서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디스코에 열광했고, 디스코는 실베스터(sylvester), 빌리지 피플(Village People),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 등 LGBTQ+ 뮤지션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I’m coming out. I want the world to know. The time has come for me to break out of the shell. I have to shout that I am coming out” (난 새로 태어나고 있어. 커밍아웃을 하고 있고, 세상이 그걸 알았으면 해. 나를 가두던 틀에서 벗어나, 내가 나아갈 시간이 왔어. 난 커밍아웃 하고 있다고. 난 반드시 외쳐야만 해) - 다이애나 로스, ‘아임 커밍 아웃(I’m coming out) -

디스코는 또한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강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전까지 팝 음악에서 여성 가수들은 ‘사랑 받는 존재’로만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도나 섬머(Donna Summer)의 ‘핫 스터프’(Hot Stuff),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의 ‘난 살아남을 거야’(I Will Survive) 등의 디스코 음악에서는 여성 가수들이 자신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노래하며 기존의 억압적인 성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소수 인종들의 음악을 전신으로 탄생한 디스코의 발전과 성공은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문화를 형성한, ‘약자들의 혁명’이었다.

1977년 개봉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이 흥행하면서 디스코의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영화의 OST 음반은 4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영화 사운드트랙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영화 공식 포스터]

 

그런데 왜 비지스(Bee Gees)가?…디스코의 백인화(Whitewashing), 디스코의 세계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디스코를 완전히 주류 음악으로 끌어올리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이들은 백인 남성 밴드인 비지스(Bee Gees)였다.

1963년 결성된 비지스는 음악 초기 비틀즈 스타일의 팝 음악과 포크 록을 기반으로 한 감성적인 곡들을 위주로 활동하며 인기를 끌었지만, 1975년 돌연 디스코 사운드를 도입한 ‘자이브 토킹’(Jive Talkin’)을 발표하며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본격적으로 디스코 리듬과 펑키한 베이스 라인, 화려한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도입하며 완전히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확립해 1977년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사운드트랙을 맡으며 디스코 음악의 절대적인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비지스의 곡들도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디스코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퍼졌고, 이 음반은 무려 40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영화 사운드트랙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린다.

비지스의 디스코 사운드가 대중을 사로잡은 핵심은 ‘멜로디’에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쌓아 온 멜로디 창작 능력으로 그루브와 리듬 중심의 음악이었던 디스코를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게 만들어 대중성을 극대화시키며 디스코의 세계적인 성공을 주도했다. [AP]

비지스의 디스코는 어떤 특징을 가졌으며 왜 유독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비지스의 디스코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들의 시그니처 사운드라고 볼 수 있는 배리 깁(Barry Gibb)의 하이톤 팔세토 가성에 있는데 이는 기존의 흑인 디스코 음악을 보다 대중적으로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

<토요일 밤의 열기> 속 배우 존 트라볼타의 댄스 씬으로 유명한 ‘넌 춤을 춰야만 해’(You Should Be Dancing)에서는 초고음 팔세토 보컬과 강렬한 리듬을 결합해 흥겹고 짜릿한 분위기를 창조하는 한편, ‘밤의 열기’(Night Fever)에서는 부드럽고 감각적인 보컬을 사용, 오케스트라 스트링 편곡을 추가해 세련된 사운드를 완성시키며 탄탄한 편곡 능력을 선보였다.

이 같은 구성은 기존의 소울과 펑크(Funk)를 기반으로 한 디스코와 차별화되며, 대중들이 보다 쉽게 디스코에 접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비지스의 디스코 사운드가 대중을 사로잡은 핵심은 다름 아닌 멜로디에 있다. 이들의 멜로디 창작 능력은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하우 딥 이즈 유어 러브’(How Deep Is Your Love)에서도 드러나는데, 기존의 디스코가 그루브와 리듬 중심의 음악이었던 반면, 비지스는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를 리듬에 얹으며 대중성을 극대화시켰다.

1960년대부터 팝 록과 발라드 등을 통해 쌓아 온 유려한 멜로디와 감성적인 하모니, 서정적인 가사를 만들어내는 능력, 즉 이들의 오랜 음악적 경험이 새 시대의 장르인 디스코 리듬과 만나면서, 탄탄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리듬과 조화를 이루면서 ‘비지스만의 디스코’를 창조한 것이 대성공을 이룬 것이다.

“I know your eyes in the morning sun I feel you touch me in the pouring rain and the moment that you wander far from me I wanna feel you in my arms again” (아침 햇살 속에서 너의 눈빛을 알아보고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 그리고 네가 방황하며 나에게서 멀어지는 순간에는 다시 널 내 품 안에서 느끼고 싶어) - 비지스, ‘하우 딥 이즈 유어 러브’(How Deep Is You Love) -

슈퍼스타가 된 비지스는 무려 5개의 곡을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리지만, 비지스를 제외하더라도 1978년도 빌보드 1위곡의 50% 이상은 전부 디스코 장르의 노래들이었다. 그만큼 디스코의 영향력은 막강했으며, 음악시장을 완전히 지배한 디스코 음악은 ‘역사상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음악 장르’로 한 시대를 거머쥐었다.

하지만 디스코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면서, 영원할 것만 같던 비지스와 디스코의 인기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디스코는 기존의 혁신적인 요소를 잃고 단순한 댄스 음악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는데, ‘디스코=성공’이라는 절대적인 공식이 생겨나면서, 음반사들이 새롭고 창의적인 음악을 만들기보단 공장에서 찍어내듯 비슷한 사운드를 복제하는 데에만 집중한 탓이었다. 디스코는 점점 개성없는 상업적 음악으로 변해갔고, 대중들은 마침내 디스코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1979년, 디스코가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해 7월 12일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 5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어 디스코 레코드를 불태운 ‘디스코 폭파의 밤’(Disco Demolition Night)이 그 날이다.

1979년 7월 12일,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 모여 든 록 음악 팬들은 디스코 음반을 경기장 한 가운데에 모아 폭파하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들은 “디스코는 쓰레기다!”라고 외치며 구장에 난입했고, 이는 폭동 사태로까지 번졌다. [유튜브 화면 캡처]

“이건 진정한 음악이 아니야!”…디스코 음반을 싸그리 불태워버린 ‘디스코 폭파의 밤’

대중들이 디스코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백인 남성을 필두로 한 기존의 록 음악 팬들 사이에 “디스코는 진짜 음악이 아닌 인공적이고 기계적인 음악이다”라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록 음악 팬들은 이전부터 디스코가 음악 시장을 장악하는 현상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밴드가 직접 라이브로 연주하는 록 음악의 생동감을 좋아하는 이들이 프로듀서 중심의 DJ믹싱 위주로 만들어진 디스코 음악에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록 음악의 반항적이고 거친 사운드에 비해 디스코는 과도하게 여성스럽고 감성적이었으며 이들의 입장에서 디스코의 대중적 지배력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비쳐졌다.

한편, 당시 시카고에서 록 음악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스티브 달(Steve Dahl)은 평소 디스코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79년 초부터 매일 아침 방송을 통해 디스코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디스코를 없애야 한다”며 반(反)디스코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5~6월 경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야구단과 협력해 “디스코는 쓰레기다”(Disco Sucks)라는 구호의 ‘디스코 철폐 이벤트’를 추진하기에 이른다.

이어 그해 7월 12일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리는 경기에 디스코 음반 한 장을 가져오면 0.98달러로 경기장에 입장할 수 있게 하는 이벤트 개최를 선언하며 “코미스키 파크에서 디스코 레코드를 폭파하자!”며 록 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불만이 가득했던 록 음악 팬들의 뿔난 정서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경기 당일, 소식을 듣고 모여 든 록 음악 팬들은 디스코 음반을 경기장 한 가운데에 모아 이를 폭파하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들은 “디스코는 쓰레기다!”라고 외치며 마구잡이로 구장에 난입했고, 이는 폭동 사태로까지 번졌다.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결국 본 경기가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경찰이 투입돼 상황을 진압한 뒤에야 해프닝은 겨우 마무리됐다. 이날 운집한 관중은 5~6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약 39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소동에 대한 책임으로 MLB로부터 5000달러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이날의 일은 디스코 쇠퇴의 상징적인 계기가 됐다. 라디오는 더 이상 디스코 음악을 틀지 않았으며, 음반 차트에서도 디스코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과잉 상업화 등으로 인해 쇠락하고 있던 디스코에 대한 반감이 정점을 찍으며 디스코 음악의 하락세를 가속화시킨 순간이었다.

디스코는 1980년대로 들어서며 완전히 쇠락했지만, 디스코의 음악적 DNA는 팝과 일렉트로닉, 하우스와 힙합 등 다양한 장르로 흡수되며 현대 음악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게티이미지]

록 음악 팬들의 지나친 반발과 이에 따른 디스코의 쇠퇴에 대해서는 다양한 사회학적·문화산업적 해석이 존재한다. 흑인과 라틴계, 성소수자 커뮤니티로 인해 탄생된 문화가 기존의 기득권층인 중산층 백인 남성의 문화적 자본(록 음악)과의 갈등, 즉 사회 권력 구조 안에서 배척당해 밀려났다는 분석과, 당시 라디오 방송국을 비롯한 음반사들이 의도적으로 디스코의 몰락을 주도했다는 관점이다.

현지 평론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클럽에서 음악을 듣거나 DJ 믹스 앨범을 통해 음악을 소비하는 디스코 팬들은 라디오의 전반적인 청취율을 낮췄고 이는 방송 광고 효과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광고주들은 레코드나 라디오를 통해 주로 음악을 듣는, 광고 제품 구매력이 높은 18~34세 남성들이 주인 록 팬들을 광고 타겟으로 돌리면서 디스코 음악을 배척했다는 설명이다.

전 세계를 춤과 리듬으로 들썩이게 만든 디스코는 1980년대로 들어서며 완전히 쇠락했지만, 디스코의 음악적 DNA는 팝과 일렉트로닉, 하우스와 힙합 등 다양한 장르로 흡수되며 현대 음악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프린스(Prince)에 끼친 영향은 물론 2000년대 이후에도 다프트 펑크(Daft Punk) 등을 통해 리바이벌 됐으며, 브루노 마스(Bruno Mars)와 더 위켄드(The Weeknd)는 디스코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곡을 발매해 인기를 끌기도 했다. ‘가짜 음악’이라는 이유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반세기 전 탄생한 음악 장르가 현대음악과 미래 대중음악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억압받던 소수자들에게 자유를 선사한 음악이자 음악 산업이 만들어 낸 가장 화려한 신드롬이었던 디스코는, 강렬하게 사랑받았고, 가혹하게 배척당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