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분식점 앞 소주와 꽃다발…골목길 노포는 사장님의 인생이었다 [세상&]

계동길 왕짱구식당 앞에 얼마 전 돌아가신 주인 박영기씨 사진이 있다. 손인규 기자


[헤럴드경제=손인규 기자] “여기는 내 일터이자 놀이터야, 하하”

서울 종로구 북촌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서울의 대표 관광명소다. 많은 사람이 찾는 만큼 수시로 새로운 상점들이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꿋꿋하게 처음 모습 그대로 골목을 지키는 가게들이 있다. 그 가게에는 단순히 오래된 물건만 있는 게 아니다. 그곳에는 수십 년 우리 삶의 흔적과 스토리가 담겨 있다.

서정식 대구참기름집 사장님이 본인이 직접 짠 참기름을 보여주고 있다. 손인규 기자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 바로 맞이하게 되는 북촌 계동길 골목은 카페와 셀프사진관 등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그 골목을 걷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 간듯한 몇 개의 가게를 만날 수 있다.

고소한 참기를 냄새가 문 바깥까지 풍기는 ‘대구참기름집’은 지난 1970년 개업한 방앗간으로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다. 주인 서정식(79)씨는 “원래는 다른 분이 방앗간을 열었는데 내가 75년에 인수를 하게 됐다”며 “인수 당시 모습 그대로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하루 몇 안 되는 손님이 오지만 한때 대구참기름집은 유명가게였다. 서씨는 “드라마 ‘겨울연가’를 이 근처 학교에서 찍었는데 그 이후 일본인 관광객이 엄청 많이 오기 시작했다”며 “일본인들이 와서 우리 참기름을 사가면서 나랑 사진 찍고 싶다길래 기꺼이 찍어줬다”고 말했다. 이어 “이후 신문사, 방송사 등에서도 우리 참기름집을 보고 싶다고 많이 다녀갔다”며 “기사가 나간 뒤 저 멀리 지방에서도 연락이 올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종로 북촌 계동길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참기름집’. 손인규 기자


하지만 현재 대구참기름집의 명성은 많이 퇴색됐다. 한두 명이 문 앞을 기웃거릴 뿐 문 앞 오래된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서씨는 “지금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직접 짠 참기름을 사 먹지 않고 마트에서 사 먹는다”며 “사실 먹고 살려고 장사하는 시절은 지났다”고 말했다.

왜 서씨는 이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을까. 뭔가 사연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서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평생 해 온 일이 이것뿐이어서 다른 일은 할 줄 모른다”며 “누가 ‘참기름과 꿀에 진짜가 어딨어요?’라고 말했는데 난 한 번도 속이지 않고 100% 참기름을 팔아 왔다. 이게 나의 자부심”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서씨.

골목을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이 동네 핫플 ‘왕짱구식당’이 나온다. 이곳은 지난 1986년 박영기씨가 개업한 분식집이다. 안타깝게도 박씨는 최근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종로구 관계자는 “사장님이 얼마 전부터 몸이 아프셔서 자식들이 가게를 운영해 왔다”며 “그런데 지난 주말 사장님이 결국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 가게 앞에는 박씨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는 꽃과 소주 등이 놓여 있었다.

바로 그 근처에는 이 동네에서 다섯번째로 오래된 가게인 ‘믿음미용실’이 있다. 지난 1988년 개업한 믿음미용실은 이수경(72)씨가 37년째 운영 중인 동네 사랑방이다. 미용실에는 파마하던 할머니 한 분이 사장님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씨는 “예전에는 이 근처 학교 학생들이 많이 찾아와서 머리를 잘랐다”며 “다른 미용실보다 값도 싸고 실력도 나쁘지 않아 단골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미용실은 남성아이돌 그룹 NCT127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팬들의 투어지로도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이수경 믿음미용실 사장님. 손인규 기자


하지만 이 가게 역시 최근에는 손님의 발길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이씨는 “자주 오시던 단골 중에는 나이가 많으셔서 돌아가신 분도 있고 여길 떠나 이사 간 분들도 있다”며 “점점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건강이 허락한다면 앞으로 5년만 더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종로 북촌 계동길 골목형상점가에는 약 100여개의 가게가 있다. 식당·카페가 가장 많고 공방갤러리, 마트, 숙박시설 등이 골목을 따라 들어서 있다. 지난 2024년 지정 완료된 북촌 계동길 골목상점가는 600년 역사의 전통한옥과 상점이 어우러져 많은 관광객이 찾는 거리다.

계동길에서 만난 대학생 A씨는 “막 지어진 예쁜 카페와 바로 근처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래된 가게가 같이 있는게 신기하고 재밌다”며 “하지만 이런 오래된 가게들이 자꾸 없어지면 이 동네만의 특색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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