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웨이 등 물량 싹쓸이하며 급성장
7나노까지 추격…EUV가 마지막 방어선
딥시크 등 중국 내 AI 칩 해결사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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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반도체 굴기의 첨병이라 불리는 파운드리 업체 SMIC |
아무리 좋은 칩을 설계해도 그걸 만들어줄 곳이 없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중신궈지)가 한국을 위협하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첨병’으로 꼽히는 이유다.
SMIC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2000년에 설립돼 벌써 25년의 내공을 쌓았다. 지난해 전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매출 기준 3위에 올랐다. 삼성전자의 바로 턱밑까지 쫓아왔다.
여기엔 ‘불굴의 의지’가 한몫했다. 미국의 첨단 장비 수출 규제에도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정신으로 7나노 공정을 어떻게든 개발해냈다. 물론, 이를 성공시키기까지 소비된 천문학적 비용은 중국 정부가 전액 부담했다.
그나마 5나노 이하 공정 개발을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극자외선(EUV) 장비 반입이 금지되면서 중국의 추격을 저지할 마지막 방어벽이 생겼다. 그러나 SMIC가 가진 인력과 기술력은 여전히 무섭다. 불모지와 다름없던 중국의 파운드리 시장에서 글로벌 3위까지 오른 SMIC의 필사적 역사를 살펴봤다.
▶TSMC 모리스 창과 동료서 경쟁자로…오래된 악연=SMIC 창업자인 장루징은 중국에선 ‘반도체 대부’로 불린다. 반도체 회사 창업만 4번을 한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불굴의 ‘오뚝이’ 경영자로 유명하다.
그는 대만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첫 직장은 텍사스인스트루먼(TI)였다. D램부서에서 그는 미국, 일본, 싱가폴, 대만 등 세계 각국에 반도체 공장을 구축하며 운영 노하우를 쌓았다. 또 당시 TI에서 일하던 TSMC의 창업자인 모리스 창과 동료로 지내기도 했다.
20년의 회사 생활을 마친 그는 대만에서 스다(世大)반도체를 세우며 첫 창업을 한다. 당시 업계 1위였던 TSMC의 강력한 견제에도 스다반도체는 설립 3년만에 실적 반등에 성공하며 화제가 됐다.
그러나 이 때부터 TSMC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회사의 대주주가 스다반도체를 50억달러에 TSMC에 매각해버린 것. 당시 그는 매각에 관한 사전 통보를 받지 못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낙심하지 않고 중국 상하이로 넘어와 SMIC를 설립한다. 스다반도체에서 일하던 수백명의 직원과 함께였다.
SMIC는 초기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 장루징이 직접 발로 뛰며 상하이실업, 골드만삭스, 화덩궈지 등 다양한 해외 자본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확보한 자본을 활용해 설비 확충에 집중했다. 당시 반도체 업계에 구조조정이 시작되던 때여서 모토로라의 8인치 웨이퍼 공장을 저가에 매수하는 등 가성비 좋게 제조시설을 늘리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SMIC는 설립 3년만에 4곳의 8인치 웨이퍼 제조라인과 1곳의 12인치 웨이퍼 제조라인을 보유하게 됐다. 2004년에는 글로벌 3위의 파운드리 회사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장루징은 2009년 결국 회장직에서 물러난다. TSMC가 2003년 특허 침해와 상업기밀 누설을 문제 삼아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패소했기 때문이다. SMIC는 TSMC에 2억달러 배상금을 지불하고 자사 지분도 10% 내줘야 했다. 이후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 육성 차원에서 국영펀드를 통해 SMIC 지분을 매입했고, SMIC는 사실상 국영기업이 됐다.
▶든든한 ‘뒷배’ 화웨이 물량 독차지…매출 급증=2014년 28나노 공정 개발에 성공한 SMIC는 구형 성숙 공정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해왔다.
하지만 점차 초미세 공정 개발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8나노 공정 개발 3년만에 10나노대를 개발했고, 2018년부터는 14나노 이하 공정 양산에 필요한 DUV(심자외선) 장비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결국 SMIC는 2019년 14나노 공정 개발에 성공했다. 초기엔 수율이 처참할 정도였지만, 화웨이라는 든든한 고객사가 있었다. SMIC는 화웨이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기린710A’를 주문받으며 14나노 공정 대량 양산에 돌입했다. 자연스레 수율은 좋아졌고 수익 구조도 안정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SMIC와 화웨이의 끈끈한 동맹 관계는 미국 정부의 제재 덕분에 가능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해하기 위한 미국의 규제 강화로 화웨이는 TSMC에 물량을 맡기기 어려워졌다. 결국 자국 파운드리 업체인 SMIC에 수주를 몰아줬고, 이것이 SMIC의 파운드리 기술력 향상으로 이어진 셈이다.
TSMC에게 화웨이는 연간 매출의 약 15%를 차지했던 주요 고객이었다. 정치안보를 고려해 미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대만의 TSMC로서는 화웨이 주문을 고스란히 SMIC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두 회사의 악연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SMIC는 화웨이를 포함한 중국 팹리스(반도체 설계) 업체들의 물량을 독차지하며 외연적인 실적을 늘리고 있다. 중국 내에는 3000여개의 팹리스 업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에는 딥시크를 필두로 인공지능(AI) 가속기 설계 붐 현상이 일어나며 SMIC의 매출 향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22년 SMIC는 72억70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 처음으로 매출 10조원을 돌파했다. 지난해에는 무려 80억30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3위에 올랐다. 시장 점유율로 따지면 6%로 삼성전자(9.3%)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5나노 양산, 정말 ‘괴담’ 불과할까…마지막 방어벽 EUV=2023년 SMIC는 미국 정부는 물론 전세계 반도체 업계를 놀라게 했다. 7나노 이하 공정을 개발하려면 극자외선(EUV) 장비가 필수인데, 미국 정부의 수출 규제로 중국에는 EUV 장비 반입이 금지돼 있다. 그럼에도 화웨이의 최신 AP(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7나노 공정으로 만든 사실이 알려졌다.
업계에선 화웨이가 구형 DUV 장비로 7나노 양산에 성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EUV 장비로는 한 번 빛을 쏴 회로에 새길 수 있는 공정을 DUV 장비로 2~4번 반복해 회로에 새기는 식이다.
당연히 수익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22년 18억2000만달러에 달하던 SMIC의 순이익은 2023년 9억300만달러, 2024년 4억9300만달러로 크게 떨어졌다. 화웨이의 첨단 칩을 DUV 장비로 찍어내려다 보니 비용이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SMIC는 ‘이없으면 잇몸’이라는 불굴의 의지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DUV 장비로 5나노 양산까지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 충격을 안겼다.
전문가는 중국이 7나노 미만으로 대량 양산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는 중국 정부가 “수익성 생각하지 말라”며 천문학적 지원을 하고 있지만, 무한정 이어질 순 없기 때문이다.
안진호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EUV 장비 없이 7나노 공정을 개발하는게 가능은 하지만, 그들도 기업이기 때문에 수익성을 따져야 한다”며 “DUV 장비로는 미세 공정을 개발하고 양산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라고 언제까지 엄청난 지원을 계속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UV 자체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현재 EUV 장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는 ASML도 EUV 장비 개발에 10~20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즉, 미국 정부의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가 계속 되는 한, 중국의 파운드리 기술 추격은 당분간 주춤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다만, 7나노 공정 수율 향상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 화웨이가 SMIC에 위탁한 AI 가속기 칩의 수율은 지난해 20%에서 올해 40%대로 향상됐다. 앞으로 딥시크와 같은 중국 AI 업체들과 알리바바, 텐센트 등 빅테크 기업의 AI 수주 물량이 늘어나면 SMIC의 매출 성장세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김민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