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과학칼럼] 韓정치혼란 속 마주친 해외 싱크탱크 연구자


2024년 12월 6일 서울의 공기는 차고 매서웠다. 출장 중 광화문 모처에서 회의를 마치고 기차를 타러 시청역으로 향했다. 마침 이날은 윤석열 대통령의 12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 후 탄핵찬성집회와 가두행진까지 있어 마음은 더 급하고 심란하기까지 했다. 인파를 뚫고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중년의 서양인이 집회구호가 적힌 전단을 들고 있었다. ‘외신 인터뷰인가’라고 생각하며 짧은 영어지만 아는 수준에서 대답할 요량으로 멈춰 섰다.

그녀는 네덜란드의 정책싱크탱크 연구자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어떻게 다른 나라 동종 업계(?) 연구자를 여기서 만날 수 있나. 게다가 수많은 한국인 중 하필이면 나를 콕 찍다니! 그녀는 한미가 공동 주최하고 여러 국가 싱크탱크가 참여하는 외교안보 분야 비공개 포럼 참석차 왔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나 역시 국책연구 싱크탱크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인도·태평양 전략·기술지정학(techno-politics), 전략기술(CETs), 경제안보 등 우리 원의 주력 키워드 주제의 연구를 하는 본부장급 인사였다. 조만간 우리 원의 과제에도 동참하고 협력하자는 메일을 보냈고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

문득 한국·네덜란드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최근 촉발된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으로 인해 첨단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생산기업인 ASML을 보유한 네덜란드와의 전략적 협력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다. ASML의 기술적 위상은 대체불가능한 수준으로서 ‘슈퍼을(乙)’로 일컬어질 정도다. 글로벌 기업들의 주문쟁탈전과 지분 확보도 계속되고 있다.

2023년 12월 12일 윤 대통령은 네덜란드 빌렘-알렉산더 국왕과 정상회담 간 ASML 본사를 방문하고 MOU를 체결함으로써 ‘한·네 반도체 동맹’ 체계 구축을 위한 의미 있는 출발을 했다. ASML은 삼성전자와 함께 1조원을 투자해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 R&D센터’를 한국에 설립하기로 했다. ASML이 해외에 반도체 R&D센터를 설립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한국은 건국 직후 지난 70여년간 축적해온 과학기술역량을 바탕으로 최근에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첨단바이오, 방위산업, 원자력 등 국가전략기술·첨단전략산업 어느 분야에도 대응이 가능한 ‘다목적군’ 역할을 톡톡히 하며 국제외교무대에서의 몸값을 높이고 있다. 글로벌 신흥안보 위기가 한국에 새로운 ‘기회의 창’을 열어준 것이다. 이 기회를 정책실현으로 연결시키려면 해외 싱크탱크와의 교류가 필수적이다. 유사입장국(likely-minded countries) 싱크탱크들이 주도하는 정책네트워킹활동은 각국의 정책당국-R&D 주체를 연결하는 가교가 돼 가치중심 동맹에 일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원의 ‘인텔리전스 협의체’ 다년차 정책연구사업은 글로벌 R&D정책 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실제로 한·네 정상회담 일정 중 양국 정책싱크탱크 간 협력 강화를 위한 협의도 있었다.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서도 싱크탱크 연구전사들은 유사입장국들과의 연대·협력을 위해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한국이 이번 정치혼란을 잘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가치동맹국들과의 전략적 협력의 중추국가가 되기를 희망한다. “시대가 싱크탱크를 만들고 싱크탱크가 시대를 만들기에….”

조용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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