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증여세 공제 확대…일본 ‘부의 회춘’ 미국 76억원 공제
일회성 변수 영향 큰 상속세와 달리 안정적 세수 증가 기대
“살아있는 동안 물려줄 수 있는 환경 만들어 ‘경제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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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헤럴드경제=김용훈·양영경 기자] # 서울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A씨(65)는 외식업 창업을 하려고 하는 아들(35)에게 사업 자금을 보태주고 싶지만 고민이 많다. 3년 전 아들이 전세집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5000만원을 보태주면서 증여세 면제(10년간 5000만원) 한도를 다 소진했기 때문이다. A씨는 “물가도 올랐는데 10년에 5000만원은 너무 적은 것 같다”며 “가족간엔 2억원까지 무이자로 빌려줄 수 있다는 말에 차용증 쓰고 이자도 받기로 했다”고 씁쓸해했다.
# 자산 규모 200억원대 제조업체를 경영하고 있는 중소기업 대표인 60대 사업가 B씨는 최근 회사는 물론 강남 아파트 등 50억원 상당의 부동산까지 모두 처분하고 자녀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계획하고 있다. “단순 계산해도 115억원(과표 구간 30억원 초과분 50% 적용 기준)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야하고, 생전에 증여를 한다고 해도 최고세율 50%에 달하는 증여세를 부담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게 B씨의 생각이다.
최근 여야를 중심으로 상속세 완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쌍둥이 세금’인 증여세 역시 과도한 부담을 덜고 제도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망한 후’ 적용되는 상속세 개편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살아있을 때’ 물릴 수 있는 증여세를 현실에 맞게 개편하면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젊은 세대가 자산을 받아가면 새로운 소비와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 내수활성화를 위한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다.
12일 국세청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2023년 증여세 결정세액은 6조9988억원으로 전체 국세(344조711억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3%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속인이 사후에 납부하는 상속세 결정세액 12조2901억원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에 그친다.
2021년 8조9714억원으로 전체 국세의 2.61%를 차지했던 증여세액은 2022년 2.12%(8조4032억원)으로 줄었고, 2023년에는 2%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가구당 평균 자산은 2021년 5억253만원에서 2023년 5억2727만원으로 4.92% 늘었다. 자산은 늘었지만 증여는 오히려 줄었다.
A씨가 토로한 것처럼 물가 상승이나 경제 성장과는 상관없이 25년 전인 2000년에 적용하던 계산법을 그대로 쓰고 있어 증여를 회피하는 이들이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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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국세청 국세통계포털] |
현재 증여세율은 공제를 제외한 뒤 30억원까지는 10~40%, 그 이상은 50%가 적용되고 있다. 공제 한도는 직계존비속 간 증여 때 10년간 5000만원(미성년자 2000만원)이다. 배우자는 6억원, 시부모나 장인·장모 등 기타 친족은 1000만원이다. 올해부터는 혼인·출산 때 1억원이 추가돼 양가로부터 최대 3억원까지 세금 없이 증여받을 수 있게 됐지만 이 역시 ‘특정 이벤트’라는 조건이 달렸다.
홍우형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20여년간 자산 가격은 크게 올랐는데 증여세 과세표준과 세율은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실상 ‘증세’가 이뤄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사회·정치적 불안까지 맞물려 B씨처럼 국내 자산을 해외로 이전하려는 자산가들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우리은행 자산관리센터에서 세무 컨설팅과 기업 대상 절세 세미나를 진행하는 호지영 과장(세무사)은 “자산가들이 과도한 상속·증여세를 피하기 위해 국내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해외로 떠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며 “과도한 상속·증여세 부담에 치열한 입시 경쟁, 사회·정치적 불안과 이 부분이 투자에 미치는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며 국내 자산을 해외로 이전하려는 자산가들의 수가 최근 더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최고 증여세율 55%로 우리 최고세율(50%)보다 높은 일본이 2022년부터 추진한 ‘부의 회춘’ 정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부자의 세부담을 낮춰준다는 논란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세대 간 자산 이전을 통한 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의 증여세율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독일(30%), 프랑스(45%), 영국(40%) 등 여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비교해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지난 2022년 ‘부의 회춘’ 정책으로 각종 세제를 정비하고 증여세 면제 제도를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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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주요국 증여세율 비교 |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60세 이상 부모가 18세 이상 자녀나 손자녀에게 증여할 때 손주 교육비 1500만엔(약 1억5000만원), 결혼육아비 1000만엔(약 1억원)도 증여세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당초 이 제도는 2023년 3월 종료 예정이었지만 3년 더 연장했다.
일본은 부모가 자녀에게 증여하면 1년에 110만엔(약 1100만원)까지는 증여세를 면제해준다. 증여 시점이 부모가 사망한 날로부터 3년 이내면 나중에 상속세를 추가로 부과했지만, ‘부의 회춘’ 정책으로 2031년까지는 7년 이내로 늘렸다. 살아있는 동안 ‘사전 증여’를 독려하는 장치인 셈이다.
일본이 ‘부의 회춘’ 정책을 마련한 것은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면서 ‘노노(老老) 상속’이 사회 문제로 떠오른 탓이다. 고령자의 부가 소비나 재투자로 이어지지 못한 채 예금 형태로 잠겨 ‘돈이 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작년 12월 말 한국 사회 역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만큼 한국판 ‘부의 회춘’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우형 교수는 “증여세를 낮춰서 노인에게 묶인 자산이 젊은 사람들에게 가고, 이걸 바탕으로 소비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증여세 과표 손질은 물론이고 출산·결혼 등에 더해 추가 이벤트성 공제 확대는 세대 간 자산이동을 유도하면서도 저출생에 대응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조세지원제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세대 간 자산 이전을 유도하는 건 비단 일본 뿐이 아니다. 미국은 상속·증여세 통합세액공제를 2018년 1월부터 크게 확대했다. 증여와 상속을 합해 한 명당 약 550만달러(약 76억원)까지 면제해주던 것을 1100만달러(약 150억원)로 늘렸고, 현재는 1361만달러(약 190억원)까지 면제해준다.
또, 자녀나 손주의 교육비 명목으로 미리 저축한 돈을 실제 그 용도대로 사용할 경우 그간의 운용 수익은 세금을 면제하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영국은 가족 구성원에게 증여할 경우 증여세를 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대기업 회장 사망 등 일회성 변수가 큰 상속세와 달리 상속인이 살아있는 동안 이뤄지는 증여세의 경우 세율을 합리적으로 개편한다면 오히려 세수가 늘어날 수 있다고 봤다. ‘편법 증여’나 ‘자산의 해외 이전’으로 발생하는 세금 누수 없이 증여세수가 제대로 걷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강종호 세무법인 대륙아주 세무사는 “일본처럼 자산을 이전해서 자녀 세대가 재투자나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하려면, 과표와 세율 변경, 공제 확대, 상속세 과세가액에 가산하는 사전증여재산의 기간 단축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강 세무사는 “현재 최고세율인 50%에 대한 저항적 심리가 큰 만큼 이를 40% 아래로 내리는 동시에 최저세율(10%)이 적용되는 과표도 현행 1억원보다, 정부가 작년 세법개정안에서 내놓은 2억원보다는 더 올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