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ㆍ오페라로 꾸민 두 번의 콘서트
노랫말에 감정·서사 담아 관객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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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 카우프만 [롯데콘서트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저 사랑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요.”
무대 오른쪽에서 노래를 시작해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포디움에 손을 얹으며 지날 땐 상심한 마음을 붙잡으려 숨 고르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걸음마다 드라마가 그려졌다. 사랑에 외면받아 무너지는 마음이 어절 하나하나에 실려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간절히 애원하듯 무릎을 굽힌 채 꽉 쥔 주먹이 몇 번이고 흔들 땐 고통스러운 그의 이야기에 동화됐다. 요나스 카우프만의 오페라 콘서트 중 두 번째 앙코르곡 카르딜로의 ‘무정한 마음’이다.
명실상부 타고난 슈퍼스타였다. K-팝 가수들의 공연장에서 보던 쇼맨쉽과 겸손한 태도로 관객들을 향해 이른바 ‘폴더 인사’를 하는 그의 공연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총 7곡의 아리아를 불렀지만, 일명 ‘앵앵콜’(두 번의 앙코르)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무려 4곡의 앙코르가 더 나왔다. 그 때마다 무대를 메운 합창석과 좌우 양쪽에 앉은 관객들에게 고개를 돌려 노래하니 기립박수와 함성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이머시브 공연처럼 요나스 카우프만과 내가 일대일로 소통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세계적인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56)이 1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두 번의 만남(4일 가곡 리사이틀, 7일 오페라 콘서트)은 말 그대로 ‘꿈의 무대’였다. 각기 다른 언어로 채워져 팔색조처럼 변신하는 요나스 카우프만은 스스로가 왜 ‘최정상의 스타’인지를 완전히 입증했다. 두 번의 공연 동안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함성과 쉴 새 없이 터지는 휴대폰 플래시, 객석 곳곳에 등장한 오페라글라스, 심지어 앙코르 곡마다 ‘몰래’ 그의 음성을 담으려는 관객들의 소장 욕구는 아이돌 가수의 공연을 방불케 했다.
완전히 다른 선곡으로 채워진 두 번의 무대는 10년의 기다림을 지우기에도, R석 기준 35만원에 달하는 티켓값을 보상하기에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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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 카우프만 [롯데콘서트홀 제공] |
피아니스트 헬무트 도이치와 함께 한 ‘가곡 리사이틀’은 독일 출신인 카우프만의 매혹적인 원어 발음으로 슈만과 리스트(1부), 브람스와 슈트라우스(2부)의 음악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매 3~4분 다른 페르소나를 표현하기에 성악가들에겐 더 세밀한 작업을 요구한다”고 했던 카우프만의 이야기처럼 그는 서정적이고 잔잔하리라 생각했던 가곡에 드라마를 입혔다.
슈만의 ‘12개의 가곡’ 중 ‘방랑가’로 ‘몸풀기’를 시작한 카우프만은 1부에서 선보인 6개의 곡 안에서 기승전결을 만들었다. 경쾌한 곡조로 시작해 비탄에 잠기다 서정적 선율에 비장한 슬픔을 실어 보냈다. 아직은 목이 다 풀리지 않은 듯 제 기량이 나오지 않는 듯한 순간도 있었지만, 모든 곡마다 뉘앙스를 달리 하며 자기만의 가곡 세계를 열어갔다. 특히 ‘12개의 가곡’ 중 ‘고요한 눈물’과 ‘미르테의 꽃’ 중 ‘헌정’을 부를 땐 성스러운 음성으로 피아노와 어우러지며 숭고한 그림을 연출했다.
리스트의 가곡들에선 ‘공기 반 소리 반’ 창법을 온전히 들을 수 있었다. 발산하고 내지르기보다 고요하고 잔잔하게 ‘라인강, 그 아름다운 강물처럼’을 부르다, 오페라 속 등장인물처럼 연기를 더해 ‘세 명의 집시’를 이어갔다. 카우프만은 극적인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속삭이면서도 ‘밀고 당기기’ 하며 소리를 주물렀다. 헬무트 도이치의 피아노는 아름다운 선율이면서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피아노와 카우프만이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들은 가곡 리사이틀의 몰랐던 매력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브람스와 슈트라우스의 12개 가곡으로 꾸민 2부는 ‘가곡의 오페라화’를 더 명확히 보여준 무대였다. 힘 있게 뱉어내는 브람스에선 선명한 독어 발음이 들려주는 아리아 같은 가곡의 공간마다 피아노가 숨을 불어넣으며 안정감을 줬다. 슈트라우스의 가곡은 가장 오페라 가곡 같은 무대의 연속이었다. 발라드처럼 시작하다 깊고 웅장한 소리로 확장한 ‘8개의 가곡’ 중 ‘헌정’으로 출발해 잔잔한 호수 위에 비춘 달빛처럼 서정적인 ‘3개의 가곡’ 중 ‘황혼을 지나는 꿈’을 거쳤다.
카우프만의 무대는 가수가 일방적으로 노래만 전달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대중가수처럼 노래 사이사이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노랫말로서 관객과 이야기를 나눴다. 소통하는 드라마로서 가곡을 노래한 ‘은밀한 초대’(‘4개의 가곡’ 중)가 이어질 땐 카우프만이 관객을 상대로 말을 거는 듯 들렸다. 달그림자 아래 오솔길을 거니는 ‘밤산책’(‘3개의 가곡’ 중)을 마친 뒤엔 장난스럽게 시작하는 ‘6개의 가곡’ 중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비밀스레 간직할까‘로 충만한 대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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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 카우프만 [롯데콘서트홀 제공] |
가곡 리사이틀에선 네 작곡가의 저마다 다른 가곡 색을 만나는 동시에 최고의 스타 카우프만의 목소리와 연기를 두루 볼 수 있었다. 모든 음을 완벽한 음정으로 노래한 것도, 파괴적이거나 폭발적 성량으로 관객을 놀라게 한 것도 아니었지만, 카우프만은 자신의 이야기처럼 짧은 곡들마다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냈다. 헬무트 도이치의 연주는 이 무대의 일등 공신이었다. 가곡과 함께하는 ’피아노의 해법‘을 보여준 도이치가 있었기에 카우프만의 노래는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오페라 콘서트는 가곡 리사이틀로 몸풀기를 마친 카우프만은 본 게임을 시작했다. 아리아 12곡은 물 흐르듯 이어졌고, 한 곡 한 곡이 지날 때마다 폭풍 같은 박수가 휘몰아쳤다. 10년 전 함께 내한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오헨 리더가 이번에도 카우프만과 한국을 찾아 수원시립교향악단과 연주했다. 1, 2부 총 15곡 중 카우프만의 아리아는 모두 7곡. 그의 노래 사이사이 서곡과 모음곡, 간주곡을 통해 수원시향의 음색도 들을 수 있었다.
카우프만의 오페라는 ‘토스카’ 중 ‘오묘한 조화’로 시작됐다. 여유롭게 무대를 거닐며 노래를 시작한 그는 첫 곡부터 기대감을 모으게 하기에 충분했다. 풍부한 성량이 울림 좋은 롯데콘서트홀을 가득 메우며 잔향을 만들었다. 자신의 장기 같은 ‘메사 디 보체’(messa di voce. 하나의 고음을 점점 커지는 크레셴도로 부르다가 디미누엔도로 점차 줄여가는 테크닉)를 발휘한 비제의 ‘카르멘’ 중 ‘그대가 던진 이 꽃’에선 보다 정교한 드라마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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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스 카우프만 [롯데콘서트홀 제공] |
세계 최정상 테너의 강렬한 테크닉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쏟아질 때, 그는 난데없이 지휘자를 대신해 포디움에 섰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 지휘를 위해서였다. 지휘자 오헨 리더는 무대 오른쪽에 자리한 오르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깜짝선물’처럼 연출된 지휘 무대에 이어 이 오페라의 ‘어머니, 이 술은 독하군요’에선 오페라 가수의 연기와 탁월한 가사 해석을 더 하며 음악에 힘을 실었다. ‘어머니, 제 말을 들어주세요’라는 가사에선 간절히 속삭이듯 노래했다. 비통한 심경을 안고 취해버린 자신을 책망한 이 무대는 온전히 한 편의 오페라였다.
그는 노랫말 한 줄 한 줄에 온전히 자신의 해석을 담아 전달했다. 카우프만의 노래는 해석된 가사를 함께 곱씹으며 들을 때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노랫말을 완전히 체화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었고, 전혀 다른 두 작품도 긴밀하게 엮어 감정선을 이어갔다. 2부의 첫 곡이었던 마스네의 ‘르 시드’ 아리아와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 중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가 그랬다.
첫 곡에선 신 앞에서 기도하는 한 인간의 회개를 성스러운 목소리에 실어 보내며 감정을 토하더니 이어진 곡에선 휘몰아치듯 시작해 차분히 회고하다 극적인 순간들을 연출했다. 프랑스 혁명가로 단두대에서 처형된 앙드레 셰니에의 삶이 온전히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오페라 콘서트의 백미를 만든 두 곡이었다.
대미를 장식한 곡은 푸치니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다. 무사히 ‘빈체로’까지 안착하며 두 번의 공연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카우프만을 향해 한국 관객들은 엄청난 환호와 박수를 쏟아냈다. 관객들의 함성이 커질 때마다 그는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벅찬 심경을 전달하듯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황홀한 미소를 건넸다.
두 번의 공연에서 나온 앙코르만 총 7곡. 오페라 콘서트에선 푸치니 ‘토스카’의 ‘별은 빛나건만’으로 시작해 카르딜로의 ‘무정한 마음’(카타리),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미소의 나라’ 중 ‘내 온 마음은 그대의 것’(Dein ist mein ganzes Herz) , 쿠르티스의 ‘날 잊지 말아요’까지 이어졌다.
매곡마다 카우프만은 영혼까지 끌어올려 노래한다고 느낄 만큼 모든 것을 토해냈다. 매 순간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지만, 평가는 무의미했다. 자잘한 음 이탈이 나왔고, 조금은 달라진 성량으로 인한 아쉬움도 있었으나 결국 ‘모든 것’이 좋았다. 한 곡 한 곡을 거쳐 최종 목적지에 다다르면 카우프만의 팬이 아닌 사람들도 그와 사랑에 빠지리라. 두 번의 여정, 네 시간의 공연은 끝맺음이 완벽해 정서적 충만함을 준 12부작 드라마를 완주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