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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X TVING 오리지널 관점사극 ‘원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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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극은 정통대하사극과 퓨전사극으로 나눠진다. 정통사극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당대의 삶과 의식 등 시대적 상황을 현실감 있게 반영한다면, 퓨전사극은 역사에 풍부한 상상력을 가미해 탄력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역사왜곡 논란에서도 자유로운 허구의 인물을 창조한다.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은 모두 필요했다. 역사적 고증과 대중적 재미 사이에서 어떤 걸 더 중요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정통과 퓨전으로 나눠지기 때문에 두 사극 스타일 모두 효용가치를 지녔다.
하지만 상상의 나래를 지나치게 펼치다 보니 진짜 역사를 가리게 되고, 정보과잉이 오히려 진짜 역사를 보이지 않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정통사극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특히 정통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당대의 삶과 의식 등 시대적 상황을 현실감 있게 반영하므로 국민들의 역사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조상들의 과거 모습을 통해 국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고, 통합과 화해의 비전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사극의 흐름도 많이 달라졌다. 누가 정통사극을 만들고, 어디서 방송할 것인가? 만들면 사람들이 볼 것인가? 다플랫폼 시대, 숏폼 강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거 방식으로 정통사극을 만들기는 어려워졌다. KBS1 ‘용의 눈물’(1996~1998)은 159부작, KBS1 ‘태조 왕건’(2000~2002)은 200부작으로 2년 가까이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다 KBS1 ‘대조영’(2006~2007)은 134부작, KBS2 ‘대왕세종’(2008) 86부작, KBS1 ‘정도전’(2014) 50부작, KBS1 ‘징비록’(2015) 50부작, KBS1 ‘장영실’(2016) 24부작, KBS2 ‘고려거란전쟁(2023~2024) 32부작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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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KBS 정통대하사극 ‘장영실’ |
정통사극은 블록버스터형보다는 중간 사이즈로~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 양상은 그 어느때보다 심각하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진영이 서로 날을 세우고 있어 대화마저도 쉽지 않다.
정통대하사극은 우리 역사를 통해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잘못된 과거는 현재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다.
현실이 불안하고 전망이 불투명할 때에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정통사극을 통해 시청자로 하여금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찾아보게 했다. 그런 시청자 심리가 ‘현상’으로 나타나야 드라마도 뜬다.
어려운 때일수록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준 ‘불멸의 이순신’이 그렇고, ‘용의 눈물’도 9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대권신화(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경쟁한 15대 대선)와 성공신화에 물들었던 시대적 도움을 받아 시청률을 크게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 KBS의 정통사극 방식으로는 한계가 생긴다. 그렇다면 정통사극은 어떤 식으로 부활되어야 할까?
상상을 부추기는 퓨전사극이 재미를 추구하면서 역사 이야기 자체로 돌아와버리면 대중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이런 정통사극은 ‘역사가 스포일러’라는 틀안에서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일부 역사 다큐 마니아들은 이런 스타일의 정통다큐를 시청하겠지만 보다 넓은 대중성 확보는 쉽지 않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은 “정통사극이 블록버스터형으로 만들기에는 현실적으로 제작비 등의 제약이 따른다. 80년대 MBC에서 방영된 시즌제 대하역사극 ‘조선왕조 5백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 스토리를 강화하거나, NHK, BBC처럼 세트 활용 비중을 높이는 방법 등이 있다”고 말한다.
‘조선왕조 5백년’은 김무생, 이정길, 한인수, 고두심 등의 선 굵은 연기를 볼 수 있었고, 최수종과 최진실이 막내 배우로 참가했다.
KBS에서 정통사극은 지속적으로 방송하고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막대한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 소소하게 정통사극을 만들 수도 있다. 설령 시청률이 조금 덜 나와도 역사를 조망하는 콘텐츠를 공영방송에서 계속 방송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KBS에서 2023년 방송된 ‘고려거란전쟁’은 양규의 흥화진 게릴라 전투,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을 엄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압도적인 영상미로 그려내며 방송 초반부터 기세를 끌어올렸다. 게다가 최수종, 지승현 등 명품 배우들의 우리 역사의 틈새까지 채운 호연은 정통 사극에 목말라했던 시청자들을 주목하게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제작비 문제가 따른다. KBS는 창사 이래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현종(김동준)과 강감찬(최수종), 양규(지승현), 강조(이원종) 등 많은 인물들을 부각하려고 하기보다는 기획부터 어느 곳에 포인트를 맞춰야 할지를 감안해 한 사람, 또는 두사람에게 집중하는 게 낫다.
숏폼 강세 시대, 정통사극도 숏폼, 또는 OTT로 제작 가능
최근에는 드라마도 숏폼 형태가 빠른 속도로 퍼져가고 있다. 숏폼 드라마의 유행은 휴대폰으로 ‘숏츠’를 보는게 익숙해지면서 콘텐츠가 짧고 빨리 소비되는 유행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작자 입장에서는 제작비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장점이 매력적이다.
요즘 드라마 제작사들은 히트 콘텐츠를 만들어도 적자를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숏폼 드라마는 소자본 제작으로 해외에 진출할 수 있다. 따라서 숏폼 드라마는 산업적으로도 급성장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
2024년 12월 숏폼 드라마 플랫폼 탑릴스에 공개된 서스펜스 로맨스물 ‘나쁜 남자의 사랑법’은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등 해외에도 큰 반응이 나왔다. 회당 분량은 1분30초 정도 되며 총 80부작이다. 아직까지는 숏폼 드라마가 초기여서 로맨스, 코미디, 판타지, 미스터리 등의 장르가 주로 제작되고 있지만, 사극 등 다른 장르로도 충분히 확장될 수 있다.
숏폼 드라마가 2분짜리 100부작으로 제작된다면 총 분량은 200분(3시간20분)이다. 정통사극을 숏폼으로 제작한다고 할 때, 4분짜리 100부작으로 제작하면 총분량은 400분(6시간40분)이 된다. 총 400분 분량의 사극을 지상파에서 50분짜리 8부작으로 내보는 것과 4분짜리 100부작으로 방송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숏폼으로 제작하면 TV 드라마보다 훨씬 간단한 형식으로 몰입도를 올려 집중하게 만들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건 2시간짜리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이 OTT용 시리즈물을 제작했을 때의 효용가치와 유사하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시즌1과 시즌2를 연출했던 영화감독 황동혁은 “OTT 시리즈물은 영화보다 길이가 조금 더 길어졌다는 부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는 모노톤으로 끝까지 가야 하는데, 시리즈물은 매회 톤을 달리 해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고 밝힌 바 있다. 아마 지상파에서 사극을 연출했던 감독이 숏폼으로 사극을 제작한다면 힘들면서도 이와 똑같은 매력을 느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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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에서 2023년 방송된 정통사극 ‘고려거란전쟁’ |
KBS의 대하사극 제작에 관련된 생각
KBS는 정통대하사극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제작비에 대한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공영방송이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대하사극을 방송해야 한다는 신념은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김영조 KBS 드라마 센터장은 지난 2월 13일 ‘KBS 드라마 간담회’에서 “한국 드라마 콘텐츠 시장은 빠른 속도로 글로벌화되고 있지만, 방송국과 드라마 제작사는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KBS는 다른 상황들과도 맞물려 타사보다 더욱더 어려운 상황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KBS 드라마는 차별화된 다양한 상품으로 찾아갈 것이며 그 첫 번째 결과물은 시트콤이라고 했다. 힘든 일상에서 휴식과 위로를 제공하기 위해 30분짜리 시트콤 ‘킥킥킥킥’과 ‘빌런의 나라’를 방송한다고 했다. 단막극도 숏폼의 시대에 발맞춰 30분짜리 단막극을 선보이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는 대하사극 계획을 발표하지는 않았다. 아직 시나리오가 정해지지 않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후보들중에서 취사선택해 정통대하사극 방송 일정을 밝히겠다고 했다.
김영조 센터장은 “KBS 대하사극은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사실성에 입각해 자료(사료)를 기반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료가 부족하다면 학자들의 자문을 통해 그 시대 그 인물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하는 세미나를 거쳐 제작한다”고 말했다.
김영조 센터장은 2016년 KBS 정통대하사극 ‘장영실’을 연출했다.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천거와 도움에 힘입어 15세기 조선을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국으로 만들어내는 천재 과학자 장영실(송일국)의 일대기를 담았다. 장영실은 노비로 태어났지만 종 3품에 이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왕의 가마를 잘못 만들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된 후 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장영실 일대기가 듬성 듬성 비어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철학’이다. 김영조 센터장은 “‘장영실’은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에 기반해 스토리를 짰다. ‘장영실’이라는 사극은 ‘과학’ 때문에 한 거다. 학자들과 함께 조선과학사를 검토했고, 15세기 당시 서구와 중국의 과학은 어떠했는지를 조사하면서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는 그 과정을 보여주었다”고 밝혔다.이어 “앞으로도 KBS 대하사극은 인기와 시청률을 위해 퓨전사극이나, 여성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판타지 사극을 방송할 수 없다”면서 “KBS에서 대하사극을 방송하면 국민들이 진짜라고 믿는다.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스토리, 자료가 부족하면 ‘철학’으로 보충할 것이다. 그 ‘철학’도 ‘현재 국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다”고 설명했다.
정통대하사극을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용으로 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00% 한국 제작진이 참여하는 오리지널 시리즈도 좋지만, 현재로서는 제작 가능성이 그리 높지않다.
‘파친코’처럼 미국드라마로 제작되어도 좋다. 골든글로브상과 에미상을 휩쓴 디즈니+ ‘쇼군’은 미국드라마지만 일본 제작진, 일본 배우들도 참가했다. 이 경우는 영어로 된 원작이 있으면 제작이 수월해진다. ‘쇼군’은 제임스 클라벨이 1970년대에 쓴 동명 역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17세기 일본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정치적 암투를 그려냈다. 일본 국민배우 사나다 히로유키가 연기한 요시이 토라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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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종영한 JTBC 하이브리드 사극 ‘옥씨부인전’ |
하이브리드 사극, 관점사극의 등장
정통사극의 대척점에 퓨전사극이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사극들이 제작되고 있다. 기존역사는 그대로 두고 관점을 달리해 바라보는 일종의 관점사극이다. tvN X TVING 오리지널 드라마 ‘원경’은 기존 역사를 그대로 두고 관점을 달리한 사극이다. 이방원은 사극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인물인데, 그 시대를 다루면서도 이방원이 아닌 중전인 원경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나타난다. 이렇게 하면 역사속에서 조명하지 못했던 인물을 끄집어내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관점사극은 역사에 완전히 허구를 덧붙이는 퓨전사극과는 다르지만 역사왜곡의 위험이 있다. 실제 ‘원경’에서도 역사왜곡 논란이 발생했다. 원경왕후에 현대적 감수성을 입혀 진취적인 캐릭터를 만들려고 하다가 ‘역할’을 과하게 설정했다. 종반부에 원경이 공부와 정치에 뜻이 없는 양녕대군 대신 학문을 논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충녕대군을 선택하는 장면은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또한 원경과 이방원의 운명 같은 첫 만남을 그린 연모지정 로맨스인 프리퀄 ‘원경: 단오의 인연’ 2부작은 사료가 없어 거의 작가의 상상으로 쓰여졌다.
따라서 관점사극에서 사료가 빈약하다면 그 틈새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를 세심히 해야 한다. 가령, 1인칭 시점이 아닌 전지적 관찰 시점으로 바꾸어 중요한 해석과 추리를 던지는 스타일을 가미해볼 수도 있다.
KBS 사극도 블록버스터 한계를 극복하고, 늘상 다뤄온 인물과는 다른 한 사람에게 집중해 진짜 역사를 보여주는 관점사극을 제작할만하다.
퓨전사극과는 다른 사극중 또 다른 변화는 하이브리드 사극이다. 퓨전사극은 실제 역사속에서 가공인물을 집어넣는다. 하이브리드 사극은 역사속에 상상을 입히는 게 아니라 아예 상상속에 역사를 가져온다. 이유는 더욱더 현재성을 입히기 위해서다.
MBC 사극 ‘군주’(2017)는 양수청이라는 조직으로 조선 팔도의 물을 사유화해 국정농단을 하는 조선 편수회의 수장 대목(허준호)과 맞서 싸우는 왕세자 이선(유승호)의 이야기다. 조선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인물들은 오히려 현대적 캐릭터다. 지난 1월 종영한 JTBC ‘옥씨부인전’도 조선 시대라는 설정만 있는 하이브리드 사극이다.
노비 출신인 구덕이(임지연)가 외지부 옥태영의 삶을 살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가족과 이웃, 노비들을 지키는 이야기다. 현대 변호사, 정의감 넘치는 변호사, 노동자 권익을 보호하는 여성 변호사의 이야기를 과거라는 외피를 입혀 전개한다.
이처럼 사극들이 다양한 형태를 띠며 발전하고 있지만 대하사극 하나 없는 나라는 문화강국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K-콘텐츠로 글로벌화를 다져나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