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 후 두 대군 간 일어난 비극
국립국악원에선 정악 ‘보허자’ 공연
가사 없는 3장, AI가 노랫말 새로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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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왼쪽 사진),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연습실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행악과 보허자’ 공연 일부를 시연하고 있다. [국립창극단 제공·연합] |
#1. “꿈을 꾸었네, 봄에 들었네.”(국립창극단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 중)
조선 최대 비극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7대 왕 세조(수양대군)와 그의 권력욕에 의해 희생된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손아랫동생인 안평대군. 형제 사이에 드리워진 비극적인 이야기에 상상을 쌓아 세상에 나왔다. 국립창극단의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다.
극본을 쓴 배삼식 작가는 “계유정난 후 27년이 지난 때를 기점으로, 어느 봄날 안평이 꾸었던 꿈을 토대로 이야기를 썼다”며 “수양과 안평을 중심에 두고 정치적 입장을 다루고 싶지 않았다. 딸 무심과 안평의 애첩 대어향의 이야기를 역사적 개연성에서 출발해 상상을 더해봤다”고 말했다.
#2. “상망기차원 제단봉헌지영속 왕은달어태평성세(相望祈此願 祭壇奉獻志永續 王恩達於太平盛世·서로 바로 보며 이를 기원하리라. 제단에 올리는 정성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왕의 은혜는 태평성세에 달리리라).”(‘보허자’ 3장 중)
‘인공지능(AI) 문장가’의 힘을 빌려 ‘보허자’의 노랫말이 되살아났다. 효명세자(1809~1830)의 한시 350편, 정약용과 김정희의 한시 100여 편을 학습한 AI가 이제는 누구도 쉽게 쓰지 않는 한시를 지었다. 선율만 남고 창사(唱詞·노랫말)는 없었던 ‘보허자’ 3장을 복원한 국립국악단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을 통해서다.
올 봄, 두 편의 ‘보허자’가 관객과 만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같은 제목을 한 전혀 다른 공연이다. ‘허공을 걷는 자’라는 의미의 보허자(步虛子)는 주로 왕이 행차를 마치고 돌아온 뒤 베푸는 잔치에서 연주된 궁중 연례악 중 하나다. 조선시대 임금의 무병장수와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연주됐다. 도교의 영향을 받은 송나라 음악이 고려시대에 들어와 발전, 신선이 높은 직위의 상선을 알현하며 그의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모습에서 유래했다. 창극에서는 말의 의미를, 정악에서는 선율을 가져왔다.
창극, 다시 쓰는 수양과 안평의 이야기
먼저 창극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20일까지·국립극장)는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과 유배돼 사사당한 안평대군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태어난 작품이다.
계유정난 이후 어느 시기를 살아간 안평대군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 그간 재탄생한 수양대군 콘텐츠와는 다른 점이다. 배삼식 작가는 무덤, 비문 등 안평대군의 죽음을 증명할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 상상력을 가미했다. 노비로 전락했다 면천돼 돌아온 안평대군의 딸 무심, ‘몽유도원도’를 그린 화가 안견이 안평대군의 흔적과 재회하는 과정이 창극에 담긴다. 연극계의 떠오르는 연출가 김정이 처음으로 첫 창극 연출에 도전했다.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인 김준수가 안평대군, 이광복이 수양대군을 연기한다. 두 사람 모두 복잡한 감정과 기존과는 다른 캐릭터 해석, 시적인 언어와 어려운 음악으로 인해 “계속해서 허공을 걷는 기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준수는 “대사를 입으로 뱉으면서도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고심이 깊다”며 “숙제처럼 많은 것을 담은 작품이어서 연습할 때도 제목처럼 허공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광복은 “내면의 마음을 표현하는 독백이 많아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며 “특히 음악이 그 어떤 창극보다 역대급으로 어려워 잘 소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다.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는 기존 국립창극단의 작품과는 다른 작창과 음악으로 매만졌다. 한승석 음악감독이 작창과 작곡을 모두 책임졌다. 국립창극단의 ‘작창가 프로젝트’ 첫 프로젝트 당시 발군의 재능을 선보이며 발탁된 장서윤이 한승석 음악감독과 함께 작곡에 참여했다.
한승석 감독은 “시를 읊는 듯한 관조하는 노랫말로 이뤄진 대본이라 전통 판소리의 복잡한 시김새를 입히는 것이 마치 한여름에 두꺼운 겨울 외투를 입은 듯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며 “단순한 음의 흐름 안에 드라마와 이면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작곡)했다”고 말했다. 그간 창극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양금, 생황, 칠현금, 25현 가야금, 단소, 소금 등의 악기를 적극 활용해 조선시대 궁중의 모습을 음악으로 담아냈다.
이번 창극은 ‘아비, 방연’ ‘이날치전’에 이어 선보이는,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팩션’ 창극이다. 유은선 예술감독은 “기존 작품을 번역하거나 각색하는 것도 좋지만, 한국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삼석 작가는 개막을 앞두고 “우리는 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꿈속을 노니는 듯한 가벼운 삶을 바란다. 하지만 결국 겨울처럼 무거운 현실에 발이 묶여 있다”며 “극중 인물이 꿈꾸는 삶의 가벼움과 현실의 무게가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습을 통해, 순수하고 본질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는 의도를 밝혔다.
AI가 가사를 되살린 한시 ‘보허자’
국립국악원의 정악 ‘행악과 보허자-하늘과 땅의 걸음’(14일까지·국립국악원)은 조선 왕실의 행차 음악을 무대에 그대로 옮겼다.
행악은 왕실이 행차하거나 관찰사, 사신 등의 행렬에서 연주한 곡을 일컫는다. 공연에서는 왕이 궁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과정에 따라 곡을 구성했다. ▷궁을 나설 때 연주하는 ‘출궁악’(여민락만) ▷행차 중 연주하는 ‘행악’(취타·대취타) ▷궁으로 돌아올 때 ‘환궁악’(여민락령) ▷환궁 이후 베푸는 연향에서의 ‘연례악’(보허자)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AI를 활용해 보허자의 3장을 복원했다는 점이다. 총 세 악장으로 구성된 ‘보허자’는 1·2장만 가사가 남아있다.
AI로 창사 작업을 한 박진형 아트플랫폼 유연 대표는 “1·2장의 가사와 3장에 나올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해 효명세자의 한시를 학습한 라마3 모델에 입력, 이를 토대로 한글 가사를 생성한 뒤 챗GPT를 통해 한자시를 만드는 방식으로 창사를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재탄생한 한시의 주제는 2장의 가사 내용을 참고해 왕의 장수와 백성의 태평성대, 나라의 영속으로 선정해 내용을 지었다. 창작된 가사를 70여 명의 가객이 부르며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