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사도 관련 캠페인서 손떼
구글 등 빅테크도 상황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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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증권거래소를 마주하는 위치로 자리를 옮긴 ‘겁 없는 소녀상’ [로이터] |
미국 뉴욕 맨해튼 남쪽, 뉴욕증권거래소 인근에는 ‘돌진하는 황소상(Charging Bull)’이 자리하고 있다. 월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 조각상 앞에 2017년 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그해 3월 7일, 새로운 작품이 등장했다.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황소와 마주 선 ‘겁 없는 소녀상(Fearless Girl)’이다. 이 소녀상은 남성 중심의 금융권과 기업 경영진에 더 많은 여성 리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청동 조각상이다.
그런데 이 소녀상이 등장한지 8년 만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날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폐기하면서, 소녀상의 후원사였던 글로벌 투자회사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도 관련 캠페인에서 손을 떼고 있기 때문이다.
14일 로이터통신과 미국의 미술 전문매체 아트넷 등에 따르면,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는 최근 발표한 올해 투자 지침에서 ‘이사회 구성원의 최소 30%를 여성으로 할당할 것’이라는 기존 가이드라인을 삭제했다. 대신 ‘우리는 지명위원회가 가장 효과적인 이사회 구성을 결정할 최적의 위치에 있다고 믿는다’는 모호한 문구가 추가됐다. 이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구글, 메타, 아마존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이 잇따라 DEI 프로그램 폐지·축소를 선언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 소녀상은 첫 등장부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월가의 상징인 황소상을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황소상은 조각가 아르투로 디 모디카가 1989년 별다른 허가 없이 설치한 게릴라 성격의 작품으로, 금융시장의 힘과 경제적 낙관주의를 상징해왔다. 때문에 소녀상을 놓고 월가의 남성 중심 문화를 비판하는 강력한 상징이라는 해석과 함께, 단순한 기업 마케팅 도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결국 2018년 12월, 소녀상은 뉴욕증권거래소를 마주 보는 위치로 이전해야 했다.
기업의 위선 논란도 소녀상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소녀상이 공개된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의 모회사인 스테이트 스트리트 코퍼레이션이 직원 임금 차별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500만 달러(약 66억 원)를 지급한 사실이 밝혀졌다. 여성·흑인 직원이 백인 남성 직원에 비해 낮은 급여를 받아왔던 것이 문제였다. 또 여성 리더십을 강조하며 상장지수펀드(ETF)인 ‘젠더 다양성 지수(SHE)’를 운영하면서도, 정작 회사의 고위 경영진에서 여성 비율은 18%에 불과했다.
여기에 조각가 크리스틴 비르발과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 간의 저작권 분쟁까지 더해졌다. 작가는 여성 평등을 알리는 취지로 소녀상의 복제 조각상을 제작해 판매했고, 후원사는 이를 문제 삼았다. 결국 양측은 지난해 봄 합의에 도달했지만 이후 소녀상 관련 공식 웹사이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