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두뇌에서 AI칩까지…中 ‘반도체의 꿈’ 막후설계자

화웨이 팹리스 자회사…91년 사내부서로 출발
2023년 화웨이 출시한 스마트폰 AP 설계
한때 엔비디아 꺾고 세계 4위 팹리스로
‘딥시크’ AI 추론모델에 쓰여 기술력 재조명


지난해 11월 출시된 화웨이의 신규 스마트폰 ‘메이트70’ 시리즈.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한 자체 칩 ‘기린(Kirin) 9010’과 ‘기린 9020’가 탑재됐다. [로이터]


2023년 8월 중국 화웨이가 깜짝 출시한 신형 5G 스마트폰 ‘메이트60 프로’는 곧바로 파란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애국소비 성향이 강한 중국인들은 화웨이가 내놓은 신작에 열광했다.

본격 판매를 개시한 9월 화웨이는 드디어 중국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 아이폰을 꺾고 1위를 탈환했다. 3년 만의 일이었다. 1인당 1대만 사도록 제한을 할 만큼 메이트60 프로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사실 화웨이는 2019년 5월부터 시작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무차별 때리기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앞세워 부활 조짐을 보이자 미국도 이를 심상치 않게 바라봤다.

무엇보다 메이트60 프로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가 화웨이 자체 칩이라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로 인해 세계 최고 모바일 AP 기업인 미국 퀄컴으로부터 최신 프로세서를 조달하는 길이 막힌 상태였다. 그렇게 점차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던 화웨이가 미국의 숨막히는 견제를 뚫고 자체 5G 프로세서를 개발하며 반전을 쓴 것이다.

전 세계는 화웨이 부활을 이끈 ‘막후 설계자’ 즉 퀄컴의 자리를 대신한 칩 개발사에 주목했다. 메이트60 프로에 들어간 프로세서는 바로 화웨이의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자회사 하이실리콘(Hisilicon)의 작품이었다.

▶화웨이 부활의 ‘막후 설계자’로 급부상=당시 화웨이는 미국 제재 탓에 퀄컴으로부터 4G 프로세서만 사올 수 있었다. 2019년 5월 미국 행정부는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면서 미국산 반도체를 화웨이에 공급할 시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이로 인해 퀄컴은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을 선언했다. 5G 스마트폰 시장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는 상황에서 화웨이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빠르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화웨이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동안 예비 AP 공급처로 두고 있던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반도체 설계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미국도 화웨이의 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2020년 5월 화웨이가 설계한 칩을 위탁생산하는 것도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2차 제재를 가했다.

하이실리콘은 이때까지 세계 최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인 대만 TSMC에 주문해 칩을 생산해왔지만 미국 입김으로 이마저도 끊겼다.

하이실리콘이 자체 설계한 5G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기린(Kirin)9000S’ [하이실리콘 홈페이지]


그러나 하이실리콘은 기어코 5G 프로세서 ‘기린(Kirin)9000S’를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하며 화웨이의 화려한 복귀를 도왔다. 프로세서 양산은 TSMC 대신 중국 파운드리 SMIC의 7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세서 설계부터 양산까지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똘똘 뭉친 결과는 메이트60 프로의 흥행이었다. 중국이 꿈꾸는 ‘반도체 자립’에 더욱 속도가 붙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동시에 미국 제재의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도 커졌다.

기린9000S 칩을 장착한 5G 스마트폰은 이후 메이트60 프로에 이어 ‘메이트60 프로+’ 그리고 폴더블폰 ‘메이트 X5’ 등 총 4종으로 확장되며 화웨이의 시장 점유율 상승에 기여했다.

▶한때 세계 4위 팹리스…엔비디아 꺾고 전성기 구가=하이실리콘은 화웨이가 100% 지분을 보유한 팹리스 기업이다. 엔비디아처럼 별도의 생산시설 없이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한다. 주로 화웨이의 통신장비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설계해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이실리콘의 출발은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는 주문형 반도체(ASIC) 개발 조직인 내부 부서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4년 하이실리콘이라는 별도법인이 출범했다.

초기에는 통신 기지국이나 보안 장비, 가정용 라우터, 셋톱박스 등을 만들었지만 2009년 처음으로 휴대폰 칩인 ‘K3V1’을 출시하며 반도체 설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화웨이라는 든든한 모기업 덕분에 하이실리콘은 모바일 AP 시장에서 빠르게 입지를 구축했다.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2019년 스마트폰 AP 시장에서 하이실리콘의 점유율은 11.7%로 퀄컴과 미디어텍, 삼성전자, 애플에 이어 5위에 올랐다.

같은 해 글로벌 팹리스 매출 순위에서 하이실리콘은 퀄컴, 애플, 미디어텍에 이어 세계 4위에 등극했다. 1년 사이 매출이 28.2% 불어나며 엔비디아, AMD를 제치는 기염을 토했다.

2018년 화웨이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전략을 처음으로 공식화한 뒤 하이실리콘은 데이터센터를 겨냥한 AI 프로세서 ‘어센드(Ascend) 910’과 ‘어센드 310’을 출시했다.

2023년 출시한 하이실리콘의 AI 프로세서 ‘어센드 910B’의 경우 엔비디아의 첨단 AI 칩 ‘A100’과 유사한 스펙을 보여주자 중국 IT기업들은 수입이 막힌 A100 대신 하이실리콘의 대체품에 몰리기 시작했다.

▶美 제재에 주춤…딥시크 등장에 기술력 재조명=미국의 제재 이후 하이실리콘의 인력들은 중국 팹리스 후발주자 UNISOC로 이동했다. 하이실리콘의 점유율도 대만 미디어텍과 UNISOC이 나눠 갖기 시작하면서 영향력을 점차 잃어갔다.

그러나 올해 초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의 저비용 추론 AI 모델 ‘R1’의 돌풍은 화웨이의 반도체 굴기에 다시 한 번 불을 지폈다. 딥시크는 훈련단계에선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H100’보다 성능이 낮은 ‘H800’을 사용했지만 추론단계에선 하이실리콘의 ‘어센드 910C’ 2000개로 성능을 구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센드 910C는 두 개의 어센드 910B 다이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결합한 제품이다. 엔비디아 H100의 60% 수준까지 성능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업계는 미국의 지속적인 제재에도 하이실리콘이 엔비디아 칩과 맞먹는 수준의 성능을 구현하자 화웨이의 행보에 다시 주목하고 있다.

엔비디아도 최근 발간한 연간 보고서에서 반도체, 클라우드 서비스, 컴퓨팅 처리, 네트워킹 제품 등 4개 부문에 걸쳐 화웨이를 경쟁사로 언급했을 정도다.

화웨이는 이달 3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2025)에서 자사 부스에 딥시크의 AI 서비스를 소개할 만큼 양사의 ‘특수 관계’를 과시했다.

화웨이는 이번 MWC 2025에서 하이실리콘의 어센드 AI 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딥시크의 ‘AI 어플라이언스’도 공개했다. AI 어플라이언스는 기업과 기관이 AI 모델을 보다 쉽고 빠르게 익혀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딥시크 특화 서버’다.

현장을 방문한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화웨이가 얼마나 성장했나 보고 싶어서 갔는데 굉장하다고 느꼈다”며 “긴장하고 정신차리지 않으면 쉽지 않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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