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허제 수습 ‘입김’에 은행·소비자 멘붕

금리 내리라면서 ‘운용의 묘’ 요구
부동산 정책오판 불만 은행이 감수
대출 상담 소비자 피해 확산 우려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은행도 대출금리를 내리는 것이 정설인데 가계부채 관리를 다시 강화하라고 하면 은행으로서는 대출금리를 올리는 것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한 시중은행 은행장)

지난 한 달간 토지거래허가구역(토허제) 해제와 재지정이라는 정책 번복이 나타나면서 은행권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당국이 대출금리를 낮출 때 됐다고 강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남 집값 상승 이유로 가계대출 관리 강화를 재차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에 은행들은 즉각적으로 주담대와 전세대출의 문턱을 높이는 방안부터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부 은행의 경우 유주택자에 대한 대출 취급 제한을 해제한 지 한 달여 만에 다시 규제를 도입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의 강력한 입김에 은행권이 움직이고는 있지만 난감한 기색이 역력하다. 은행으로서는 기준금리 인하에 맞춰 대출금리를 낮추면서도 대출 취급을 제한해야 하는 ‘상충된 미션’을 받아 들게 됐다. 은행들은 금융당국이 ‘운용의 묘’를 발휘해달라며 자율관리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때마다 관련 규제를 바꿔가며 압박하고 있어 일관성 있는 대출 관리가 어렵다고 토로한다.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은 서울 일부 지역에 한해 유주택자의 주담대를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날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된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와 용산구에 있는 주택을 대상으로 주담대를 막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나은행은 서울 내 조건부 전세대출을 제한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NH농협은행이 21일부터 서울 지역의 조건부 전세대출을 차단하기로 한 데 이어 하나은행까지 이러한 추세에 합류하면 주요 은행에서는 서울권 조건부 전세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조건부 전세대출은 임대인의 소유권 이전, 선순위 근저당 감액·말소 등의 조건과 동시에 대출로 갭투자에 주로 활용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은행권의 이러한 즉각적인 움직임은 금융당국의 메시지가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금융당국은 지난 17일 주요 은행을 불러 모아 가계부채 점검회의를 열고 최근 대출 확대 흐름을 지적했고 이틀 뒤인 19일 자율관리 강화 추진 계획을 밝혔다. ‘자율관리’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자체 규제 도입을 통한 대출 억제를 압박한 것이다.

최근 가계부채 급증은 부동산 정책 실패에 기인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진단이다. 성급한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가 시장을 자극했다는 데 이견이 적다. 정부와 서울시도 정책적 오판을 시인했다. 그러나 금융당국도 책임을 피해 갈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크다. 가계대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부동산의 주요 정책 결정에 있어 협의의 파트너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가계대출이 불어나고 나서야 수습에 나선 탓이다. 디딤돌 대출 등 정책대출 금리 추가 인상 가능성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서민·실수요자에 대한 금융 지원을 막는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는 만큼 금융당국은 시중대출 관리에 힘을 쏟을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연초부터 대출금리를 인하하라고 압박해 온 금융당국의 대출 관리 강화 주문에 은행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금리가 내려가면 대출 수요가 늘어나는 당연한 논리를 거슬러 대출 취급을 조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출을 통한 내 집 마련을 계획해 온 금융소비자의 피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갭투자를 투기 수요라고 규정했지만 전세를 낀 주택 매입은 서민의 주거 사다리로도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정부가 가계대출 관리를 강화하라고 하는데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는 범위에서는 대출을 타이트하게 막기 어렵다”면서 “대출은 상담부터 실행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는데 규제가 시시각각 바뀌면 고객 입장에서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고 은행 신뢰도도 떨어진다”고 말했다.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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