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집가고 싶은데” 금발꼬마 표정서 다 드러났다…예술계 난리난 까닭[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삶의 무기가 되는 그림
148. 귀스타브 쿠르베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일부 확대), 1849~1850, 캔버스에 유채, 315x668cm, 오르세 미술관


강한 주관, 강한 자존감…
‘공공의 적’에서 혁명가로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일부 확대), 1849~1850, 캔버스에 유채, 315x668cm, 오르세 미술관


두 아이는 매장식이 지루합니다.

흑발 꼬마는 고개 돌려 딴청을 피웁니다. 뒤에 선 금발 꼬맹이도 옆 어른만 쳐다봅니다. “언제 끝나요?” 이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참는 듯합니다. 성가대원 꼬마들만 그럴까요. 나름의 역할을 맡은 어른 상당수도 같은 마음인 듯합니다.

추도문을 읽는 교구 목사부터 담담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저 늘 해왔던 업무기에 하는 모습입니다. 붉은 천을 두른 장례 보조사는 목사에게 눈치를 줍니다. 빨리 말을 끊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땅을 판 인부, 얼굴 가린 운구인, 함께 고개는 숙였으나 지루한 얼굴은 그대로인 몇몇 추모객…. 다소 사무적인 모습입니다. 이들도 의뢰만 아니었으면, 또는 고인이 동향만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겠지요. 심지어는 딸려 온 강아지마저 벗어날 궁리만 하는 듯합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1850, 캔버스에 유채, 315x668cm, 오르세 미술관 누구나 알만한 위인은 없다. 명징한 교훈 내지 가르침도 없다. 딱히 감동적인 장면도 아니다. 그래서 더 비범하다.


1849년, 프랑스 동부 오르낭.

막 서른이 된 귀스타브 쿠르베는 그의 고향인 이곳에서 그릴 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인근에 살던 먼 친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림 속 모습은 당시 사자(死者)에 대한 매장식을 찾았을 때 본 풍경의 재조합입니다. 그러니까, 쿠르베는 당시 보통 사람에 대한 보통 장례식 장면을 그린 겁니다.

그런데요.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 때문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이로 인해 화단 또한 크게 뒤집어집니다. 지금 봐선 크게 특별한 건 없어보이는 이 그림이, 당시로는 예술계를 흔든 희대의 문제작이었던 겁니다. 꽤 ‘솔직’하지만 단지 그뿐, 기술적으로 탁월하게 잘 빠졌다곤 보기 힘든 이 작품은 어떻게 폭탄이 될 수 있었을까요. 강한 주관으로 공공의 적이 된 사람, 그러나 뿌리 깊은 자존감으로 모두를 감탄하게 한 화가. 지금부터 쿠르베의 삶과 대표작을 분석합니다.

세상의 ‘격변’
그러나 예술은…


자크 루이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1785, 캔버스에 유채, 329.8×424.8cm, 루브르 박물관 “적을 물리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노라!” 이 그림은 애국심을 자극한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 1819, 캔버스에 유채, 491x716cm, 루브르 박물관 기나긴 표류 끝 드디어 구조선을 발견한 순간. 그 감동의 장면을 담은 것이다.


우선 쿠르베의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을 탐구하기에 앞서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요. 그때 프랑스 미술계의 분위기입니다.

예술 수도로 불린 당시 프랑스 파리의 화가들은 사람 그리기를 꺼렸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 살아 숨 쉬는 보통 인간을 화폭에 담는 걸 싫어했습니다. 의미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짚은 의미란 무엇일까요. 교훈 또는 감명이었습니다. 그 시절 미술의 큰 두 줄기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기법이었습니다. 신화나 역사 속 신과 영웅, 혹은 과거 극적 사건을 묘사하는 데 열을 올린 사조들이었지요. 특히나 신고전주의는 명징한 묘사, 낭만주의는 풍부한 색채를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렇게 해 전자는 교훈 내지 가르침, 후자는 감명 또는 울컥함을 안기고자 했지요. 정리하면요. 둘 다 옛 순간을 ‘이상적으로’ 표현해 울림을 끌어내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파도, 1870, 캔버스에 유채, 80x100cm, Museum collection Am Rmerholz


그러나 그림은 이처럼 옛 세상에 주목하고 있는 한편, 화폭 밖 현실 세계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당장 <오르낭의 매장>이 그려지기 1년 전인 1848년에는 세계 곳곳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우선 파리의 시민 중심 세력이 루이 필리프 1세에 맞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끝내 왕조를 타도한 후 제2공화국을 세웠습니다(프랑스 2월 혁명). 평범한 사람들이 거대 권력을 무너뜨린 겁니다. 이는 유럽 땅 전역이 출렁일 만큼 큰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그해 프로이센 왕국의 베를린, 오스트리아 제국의 빈 등에서도 같은 류의 혁명이 터졌으니까요. 지금껏 왕조와 신분제 등 구(舊)체제에만 갇혀있던 각계각층 인사가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상보다는 현실, 왕과 귀족보다는 시민의 힘에 따라 움직이리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추하면 추한 대로”
‘낭만주의 매장’ 선언하다


귀스타브 쿠르베, 절망하는 남자, 1843~1845, 캔버스에 유채, 45x54cm, 개인소장


쿠르베.

예술계에서는 그가 시대의 흐름을 잡았습니다. 단신의 몸으로 총대를 멥니다. 우리 예술계도 이에 맞춰 변해야 한다! 이제라도 현실과 민중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옛 감성을 고집하는 살롱전(展) 심사위원, 고리타분한 평론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날 생각 없는 예술가들. 유독 예술계는 이런 격동 시기에도 기를 쓰고 변화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습니다. 바닥이 좁은 만큼 괜히 튀었다간 밉보일 수 있다는 마음도 깔려 있었을 테지요. 쿠르베는 이런 판을 깨는 도끼로 나섰던 겁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일부 확대), 1849~1850, 캔버스에 유채, 315x668cm, 오르세 미술관


다시 <오르낭의 매장>을 보겠습니다.

이 그림은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기에 외려 폭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신도 없고, 요정도 없기에 되레 파괴력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한 농민이 죽었다. 동네의 마흔여섯 명 주민이 모여 이를 추모했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오르낭의 매장>은 실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집중합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쿠르베의 이처럼 솔직한 표현에는 사실주의(Realism)라는 이름표가 붙게 되는데요. 보통 사람의 현실을 보기 좋게 꾸미지 말고, 최대한 진실에 맞춰 재현하자는 것. 더는 윗선 입맛에 맞춰 뜬구름만 잡지 말고, 우리네 실제 사회를 냉정하게 직시(直視)하자는 것. 이것이 사실주의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민을 주인공으로 둔 <오르낭의 매장>에는, 알고보면 이러한 혁명적 발상이 깃들어있는 셈이지요. 크기도 가로 길이만 무려 6.6m. 작정하고 그린 겁니다. 제대로 발칙하게, 한껏 도발적으로요.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1586~1588, 캔버스에 유채, 480x360cm, 산토토메 성당 그림에선 예수와 성모 마리아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홀리’한 작품.


과거 16세기 화가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보세요.

1312년, 신앙심이 기로 유명했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식을 그린 그림이지요. 성 스테판과 성 어거스틴이 천상에서 내려와 직접 그를 묻었다고 하는 전설이 담긴 작품입니다.

이런 식의 장엄한 묘사만 보다가 <오르낭의 매장>을 보면… 정신이 얼얼해지겠지요.

그림을 접한 보수 성향의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가 주제에 아름다움이 아닌 추함을 옹호하는 것인가.” 쿠르베의 응수는 이랬습니다. “추하면 추한 대로 그려야 한다. 그것도 아름다움이니까.” 그런가 하면, 쿠르베는 그의 답을 듣고 말을 잃은 이들에겐 선언하듯 또 한 번 외쳤습니다. “이 그림은 그런 점에서 <낭만주의의 매장>이다!”라고요.

몇백 번의 작은 충격?
단 한 번의 큰 충격으로


귀스타브 쿠르베, 검은 개와 함께 있는 자화상, 1842~1844, 캔버스에 유채, 69x77cm, 프티 팔레


고집불통 반군, 답 없는 반항아, 파리에서 가장 오만한 인간….

쿠르베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갈 길을 갑니다. 조롱과 핍박 따위에 방향을 틀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스를 수 없는 미래가 올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붙들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당장의 평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문제로 삼지 않는 순간,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는 듯이요.

몇백 번의 작은 충격보다 단 한 번의 큰 충격이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것.

쿠르베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꼿꼿한 자존감으로 무장한 그는, 그저 또 다른 폭탄만 준비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또 다른 ‘폭탄’들
도발을 이어가다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1854~1855, 캔버스에 유채, 361x598cm, 오르세 미술관 왼편의 사냥개와 함께 있는 사냥꾼은 당시 나폴레옹 3세를 떠올리며 그렸다는 말이 있다.


쿠르베의 비범한 그림 두 점을 더 소개합니다. 하나는 <화가의 작업실>, 또 하나는 <잠>입니다.

<화가의 작업실>부터 보겠습니다. 확실히 만만치 않아보이는 이 그림은 쿠르베의 사실주의 예술관을 보여주는 상징화로 꼽히기도 합니다. 먼저 왼쪽을 짚으면요. 신부와 상인, 인부와 거리 여인 등 당시 서민 모습이 다수 그려져 있습니다. 그다음은 오른쪽입니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작가 샤를 보들레르, 평론가 샹플뢰리와 미술품 수집가 등이 있습니다. 모두 쿠르베의 진격을 응원한 사람들입니다. 한가운데 앉아 붓을 든 쿠르베는 민중의 진솔한 삶이 보이는 쪽으로 자세를 잡았습니다. 가장 솔직한,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와 강아지에게는 아예 곁을 허락했습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일부 확대), 1854~1855, 캔버스에 유채, 361x598cm, 오르세 미술관


그가 그리는 건 풍경화입니다. 앞으로는 자연을 담은 풍경화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뜻이 녹아있습니다. 즉, 나는 앞으로도 서민만 보겠다. 든든한 응원군을 뒷배로 둔 채 계속해 이런 그림을 그리겠다…. 일종의 선언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쿠르베와 바짝 붙은 나체 여인은 그 자체로 진실을 뜻한다고도 하지요. 그가 대놓고 외면한다는 점에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의미한다는 분석도 있긴 합니다.

쿠르베는 <화가의 작업실>을 1855년 국제박람회에 출품하는데요. 전시를 거부당하고 맙니다. 여전히 보수적이었던 주최 측은 그림의 너무 큰 크기를 문제로 삼았습니다. 글쎄요. 쿠르베의 발칙한 작품이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도 컸을 겁니다. 쿠르베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박람회장 근처에 자비로 가건물을 세웁니다. ‘사실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문제의 이 그림과 함께 자기 작품 40여점을 전시합니다. 기가 막힌 대응이었지요.

귀스타브 쿠르베, 잠, 1866, 캔버스에 유채, 158x224cm, 프티 팔레 검붉은 머리를 한 앞쪽 여자는 조안나 히퍼넌으로 보인다. 동료 화가 제임스 휘슬러의 애인이자, 쿠르베 본인 또한 이성적 감정을 품은 모델이었다.


쿠르베는 규범과 관습을 놓고 거듭 도발을 이어갑니다. 이번에는 <잠>입니다.

금발과 검붉은 머리의 두 여인이 엉킨 채 누워있는데요. 나체로 잠든 둘 사이에선 야릇한 분위기만 피어오릅니다. 쿠르베는 동성 연인을 주제로 두고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무렵 프랑스 문학에서야 종종 동성 연인 주제를 다루긴 했지만, 캔버스 위에선 사례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있다 한들 크기를 대폭 줄이든, 굳이 남성 또는 하인, 동물을 함께 그리는 식의 인위적 연출에 공을 들였습니다. 쿠르베는 그 불문율을 또 깹니다. 사실적인, 너무도 사실적인 가로 2m 이상의 동성 누드화를 고고한 역사화 선보이듯 내놓았습니다. 이 또한 당장의 뻣뻣한 기성 화단에 대고 던지는 폭탄이었습니다.

어느덧 유명인사
국가 훈장까지 거부하고


귀스타브 쿠르베,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1854, 캔버스에 유채, 132×150.25cm, 파브르 미술관 알프레드 브뤼야스는 실제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다. 자신의 컬렉션은 몽펠리에의 파브르 미술관에 기증했다.


“야만인.”

“끔찍한 사상의 소유자.”

<오르낭의 매장>을 공개한 후부터 쿠르베에게는 이런 능멸 어린 말도 따라붙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이 그림은 쿠르베가 부친 답장이었습니다. 말끔한 외모, 고급스러운 외투와 지팡이로 스스로를 꾸민 왼쪽 남성은 알프레드 브뤼야스입니다. 고개 숙인 하인, 날렵한 강아지가 이 신사의 기품을 더해줍니다. 뒤편에는 마차도 보입니다. 브뤼야스가 이를 타고 가던 중 급하게 내렸다는 점을 강조하는 장치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부자임이 분명한 브뤼야스는 왜 갑자기 땅을 밟을 수밖에 없었을까요.

앞에 선 이 남자, 쿠르베 때문입니다. 쿠르베는 허름한 나그네 행색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 치켜든 고개와 여유로운 표정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거만해보일 만큼 당당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는 점을요. 당장 처지는 이처럼 남루하지만, 결국 모든 부와 명예는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게 될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눌러 담은 작품입니다.

귀스타브 쿠르베, 박람회에서 돌아온 플래지의 농부들, 1850, 캔버스에 유채, 208.5×275.5cm, Musee des Beaux-Arts et d‘Archeologie de Besancon


사람들은 쿠르베의 그치지 않는 기행에 차츰 흥미를 보입니다.

양보와 타협 따위 없는, 그렇기에 저 혼자 세상을 따돌리는 듯한 모습에 서서히 스며듭니다. 변치 않는 주관은 어느덧 매력이 됩니다. 꺾이지 않는 확신은 언젠가부터 대중을 끌어당기는 강한 힘이 됩니다. 쿠르베가 굴하지 않자 결국 세상이 바뀝니다. 어느덧 쿠르베는 1870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자로 선정될 만큼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쿠르베 본인이 훈장 받기를 거부했지요. 그토록 거리를 뒀던 기성 화단에 재차 펀치를 날린 셈입니다. “저 사람은 진심이었어.” 사람들은 또 한 번 그에게 환호했습니다.

인생도 그의 그림만큼
‘리얼리즘’ 같았다


귀스타브 쿠르베, The Sleeping Spinner


1819년 오르낭에서 부유한 농가의 자식으로 출생한 쿠르베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배웠습니다.

1846년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을 여행한 그는 그곳에서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페터 파울 루벤스, 렘브란트 반 레인과 프란스 할스 등 옛 거장의 그림을 봅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바람이 불기 전, 그렇기에 서민 삶을 그리는 데 더 열중할 수 있었던 이들의 작품에서 울림을 얻습니다. 그리고 곧 계란이 바위를 깬 혁명의 시대(1848년 혁명)를 온몸으로 겪고, ‘공공의 적’이 됐다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로 살아가는가 했지만….

소용돌이는 또 한 번 불어옵니다.

1871년, 쿠르베가 쉰두 살의 원로 화가가 된 무렵. 혁명의 빗줄기가 프랑스를 재차 적십니다. 시민과 노동자 계급 주도의 사회 민주주의 운동이 벌어집니다. 이들은 파리 시청 광장에서 새로운 조직의 탄생을 선언합니다. 시민이 세운 자치 정부, 이름은 파리코뮌(Commune of Paris)이었습니다. 쿠르베도 파리코뮌에 이름을 올립니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 등 문화시설을 관리하고, 그간 권위주의로 점철된 살롱의 재조직 등 임무를 맡습니다. 다만, 쿠르베는 과격해지는 코뮌을 보고 차츰 거리를 뒀다고 하지요.

귀스타브 쿠르베, 상처받은 남자, 1866년경, 캔버스에 유채, 79.5×99.5cm, 벨베데레


코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정부군은 코뮌을 두 달 만에 무너뜨리는 데 성공합니다. 순식간에 패자가 된 코뮌 가담자는 하나둘 죄수복을 입게 됩니다. 쿠르베 또한 체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처형장으로 끌려가지는 않습니다. 코뮌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이 받아들여진 겁니다. 하지만 혁명 기간 방돔 광장(Place Vendome)의 조형물 파괴를 주동했다는 혐의에선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쿠르베 본인은 나름 억울함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결국은 배상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쿠르베는 천문학적 금액 앞 파산 위기를 맞습니다. 그가 택한 길은 스위스 망명이었습니다. 그렇게 1873년 조국을 떠난 그는 4년 후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당시 나이는 쉰여덟 살이었습니다.

조롱과 비난 뒤 영광, 그리고 몰락….

쿠르베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피하지 않고 받아냈습니다. 그의 삶은 정해진 비극도,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는 동화도 아니었습니다. 그 또한 본인의 그림만큼이나 사실주의적 삶을 산 겁니다.

쿠르베의 동력은 강한 자기 확신이었습니다.

그것이 꾸준함, 아울러 실천력과 어우러지면 어떤 업적을 남길 수 있는지도 증명했습니다. 쿠르베의 끝은 좋지 않았지만, 끝에서부터 이뤄진 시작은 다시 찬란하게 반짝였습니다. 현대 미술, 나아가 ‘현대적’ 시선을 갖게 된 모든 이가 그에게 빚을 지게 됐으니까요. “쉽게 가지 않고, 대체 왜 그렇게까지 모나게 하는지 모르겠다.” 당장 이런 비웃음을 사는가요. 그 지점이 소소한, 어쩌면 위대한 변화의 시작점일지도 모릅니다.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이 코너는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현대미술의 여정, 김현화, 한길사

근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지혜정원

Gustave Courbet, Grillet, Thierry, Koenemann

귀스타브 쿠르베, 송어, 1872, 캔버스에 유채, 52.5x87cm, Kunsthaus Zrich 쿠르베가 망명길에 오를 무렵 그린 그림. 낚싯바늘에 걸린 채 육지로 끌려온 상태지만, 눈빛은 여전히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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