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 7년 만에 무대 복귀·류주연 연출과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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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의 어머니’로 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오는 배우 김선영 [국립극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주한 아침. 자신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신문을 바라보다 이내 표정을 바꾼다. 아홉 살 아들과의 등교 전쟁이 시작된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다”는 아들과 “학교에 가라”는 워킹맘 엄마의 팽팽한 줄다리기. 아홉 살의 흔한 투정이 아니다. 제이슨은 이야기 한다.
“사람들이 무섭단 말이야.” 엄마 브렌다가 숨을 한 번 삼키고 아들의 눈을 보고 말한다. “엄마가 보고 있을게. 넌 멈추지 말고 걸어만 가.”
브렌다를 연기하는 ‘그의 어머니’ 김선영의 얼굴에 복잡다단한 감정이 묻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아홉 살 아들의 등교 미션을 완료하면, 강간범 아들(매튜)의 어머니로 돌아갈 시간.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엔 ‘성범죄자 엄마’로 겪는 풍파가 밀려온다.
10대 아들이 하룻밤에 세 여자를 강간했다. 단 하루 사이에 가족의 세계는 파괴됐다. 처참한 상황 속에 분노와 울분, 그리고 억울함이, 여기에 아주 가끔 시답잖은 농담까지 비집고 나온다. 세상의 비난이 쏟아져도 엄마의 목표는 하나. 형량이 낮은 청소년범죄로 아들의 판결을 이끄는 것이다.
“이 여자가 겪는 갈등, 아들에 대한 비난과 연민,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 숨겨진 비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싶어 무언가 끈을 잡고 싶은 마음, 자신을 향해 욕을 한 사람들에 대한 억울함…. 나열하면 여러 감정과 생각이 몇 페이지에 있을 텐데 아직은 공부 중이에요.” (김선영)
배우 김선영이 7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다. 2018년 ‘낫심’ 이후다. 1999년 공연예술아카데미 9기로 만나 연극 ‘경남 창년군 길곡면’으로 호흡을 맞춘 류주연이 연출을 맡은 국립극단 연극 ‘그의 어머니’(4월 2~19일, 국립극장 달오름)를 통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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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의 어머니’로 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오는 배우 김선영 [국립극단 제공] |
오랜만의 복귀이나 김선영에게 무대는 낯설지 않다. 1995년 ‘연극이 끝난 후에’를 통해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응답하라 1988’(2015) 출연 이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존재를 각인했다. 김선영이 이끄는 극단 나베는 2024년 창단 10주년을 맞았다. 업계에서 김선영을 따라다니는 수사는 ‘연기주의자’. 류주연 연출가는 그에 대해 “이성과 감성을 모두 균형 있게 겸비한 배우이자 엄청난 노력형”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김선영에게 끊임없는 고민을 안기고 있다.
그는 “연극은 결국 문학이고 대본에 답이 있는데 정답은 알 수 없어서 대본을 하염없이 보고 또 보며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며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것”이라며 웃었다.
답을 찾는 과정이 쉽지 않은 것은 연극의 복잡다단성에 있다. 연극은 ‘도덕적 딜레마’와 대립을 그려온 극작가 에반 플레이시가 자신이 자란 캐나다의 한 동네에서 실제로 벌어진 성범죄 사건을 모티프로 극본을 썼다.
가해자 부모가 주인공이 된 연극 안엔 다층적 감정들이 쏟아진다. 부모가 가지는 “맹목적 사랑의 한계치와 부모가 세상의 비난을 받아들이는 모습, 세상이 범죄자 가족을 대하는 방식, 이 과정에서 어머니가 느끼는 감정,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의 내적 갈등”이 연극의 주요 단면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류주연 연출가는 “요즘 시대는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 가해자의 고통은 아주 난처하다”며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하기 힘든 난처함으로, 그 심리를 파헤치는 것만큼 재밌는 것이 없다. 예술은 상상하기 힘든 지점까지 쫓아가 파헤치고자 하는 심리와 맞닿아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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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의 어머니’의 류주연 연출가와 배우 김선영(왼쪽부터) [국립극단 제공] |
그 심리를 보여줘야 할 몫은 김선영이 짊어지고 있다. 그는 “한 달 동안 같은 대사를 했는데 지금 이 시점에 보니 내 감정과 판단과 브렌다의 것과 같지 않았다고 느끼게 된다”고 했다.
“아들(매튜)에게 하늘을 찌를 듯한 증오를 쏟아내는 대사가 있어요. 단 다섯 줄의 대사를 한 달 반 동안 연습했죠. 연습하는 과정에서 저도 아들을 연기하는 배우도 상처를 입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증오였을까, 그 안엔 좌절과 슬픔, 비참함 등 수많은 애정이 있는데 증오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더라고요. 숨어있는 많은 감정을 찾아가고 있어요.” (김선영)
연습을 진행할수록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매일 아침 여섯시에 잠이 든다. 그는 “이 여자를 괴롭히고 소용돌이 치는 감정, 도무지 꺼내지지 않았던 죄책감을 찾아가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며 “하도 잠을 못자 임플란트를 해야할 것 같다”며 웃었다.
연극은 오직 집 안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고통스런 사건이 일어난 뒤 ‘집’이라는 공간에 갇혀 온갖 고통과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관객이 들여다본다. 폐쇄적 공간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맞닿아 관객에게 끔찍한 고통을 전이한다. 류주연 연출가는 “이 연극에 반전은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범인이 아니었다’는 식의 클리셰는 없다. 짓눌린 고통은 치고 받는 대사와 감정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가해자를 다루는 설정은 다층적 스펙트럼을 갖게 해요. 가십에 대한 비판, 모든 사람이 가진 이기적 측면, 그것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드러내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 쌓여있는 가해자 가족의 온갖 감정이 담겨있죠.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냐’는 질문도 하고요. 이 작품에 대해 처음엔 그것들 하나를 메시지로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그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류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