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창설 베를린필 카라얀 아카데미
2024년 입학한 한국인 단원만 다섯 명
음악에 진심인 음악 덕후들의 집합소
경쟁ㆍ완벽주의 벗어나 좋은 음악 배워
![]() |
베를린필 카라얀 아카데미의 한국인 재학생 김성경(오보에), 조예지(호른), 김혜진(하프), 김민주(바순) (왼쪽부터) [베를린필하모닉 제공] |
[헤럴드경제(베를린)=고승희 기자] “4악장 다섯 번째 마디에서 오보에 솔로 시작하잖아. 호른 솔로는 오늘 두 마디야.”
‘음악 덕후’들이 모인 자리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장장 40분에 달하는 교향곡이 낱낱이 분해된다. 자신의 악기가 아니라도 모든 파트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기본.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미래의 오케스트라 음악가들의 얼굴엔 오만 감정이 찾아온다. 김민주는 “베를린필 멘토 선생님들은 봐도 봐도 신기하다”며 웃는다. 베를린필의 4대 상임지휘자이자 종신 예술감독(1955~1989)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이 주도, 1972년 설립한 세계 최초의 관현악 연주자 양성 기관인 카라얀 아카데미의 풍경이다.
이곳에 한국인 학생이 부쩍 늘었다. 최초의 한국인 단원이 나온 1993년 이후 32년간 총 20명이 카라얀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현재 카라얀 아카데미의 총 재학생 31명 중 5명이 한국인이다.
사이먼 뢰슬러 카라얀 아카데미 예술감독은 “독일과 유럽엔 굉장히 뛰어난 한국인 연주자와 성악가들이 있다”며 “시기마다 다르지만 카라얀 아카데미에도 한국인이 늘고 있는 추세다”라고 했다. 시기마다 한국인 학생의 숫자는 다르나, 현재의 분포에선 달라진 분위기가 읽힌다.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네 명의 한국인 단원 조예지(28ㆍ호른), 김민주(26ㆍ바순), 김성경(25ㆍ오보에), 김혜진(24ㆍ하프)은 “같은 악기를 다루며 롤모델이었던 음악가와 선배들의 영향으로 카라얀 아카데미에 오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 |
카라얀 아카데미에 2024년 1월 입학한 바순 연주자 김민주 [베를린 필하모닉 제공] |
우상 같던 스승과 선배 연주자들이 앞서 걷던 길은 고스란히 이정표가 됐다.
호른 연주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같은 길을 가게 된 조예지는 “스스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베를린필이라고 생각해왔고 연주를 들을 때면 늘 가동의 깊이가 달랐다”며 “옆에 앉아 연주를 듣고,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배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지원했다”고 말했다.
오보에를 연주하는 김성경은 “롤모델이던 한이제 언니와 함경 선생님이 카라얀 아카데미를 거쳤기에 무조건 시험을 보게됐다”고 했다. 오보에 연주자인 함경은 2014년, 한이제는 2018년 카라얀 아카데미에 입학해 2년 과정을 마쳤다.
카라얀 아카데미는 대학원처럼 정해진 수업이 있는 것도, 학점을 취득해야 하는 것도 아니나 상당 부분 비슷한 과정의 수업이 짜여있다. 일대일 멘토 수업을 비롯해 “연주자로서 무대 공포증을 극복”(김민주)하는 멘털 트레이닝, 댄스 수업, 외부 음악가 초청 수업을 듣는다. 멘토 수업은 베를린필의 단원들이 맡는다.
![]() |
카라얀 아카데미에 2024년 9월 입학한 하프 연주자 김혜진 [베를린 필하모닉 제공] |
여기에 오케스트라의 인턴쉽 과정도 겸한다. 세계 최정상 악단 베를린필과 정기 연주회 무대에도 서는 일이다. 대개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많을 때는 두 번까지 연주회에 선다. 대편성 곡을 연주할 수록 선발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카라얀 아카데미에서 딱 한 사람만 뽑은 악기 파트는 여지 없이 ‘등판’이다. 김혜진은 “하프가 두 대 있는 곡은 항상 들어가게 된다”며 “매주 새로운 프로그램에 매주 멋진 지휘자와 호흡을 맞춰나가고, 지휘자마다 다른 해석과 지휘 방법을 보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말했다.
아직 ‘프로의 세계’에 발을 딛지 않은 학생들에겐 모든 순간이 ‘최고의 경험’이나, 그만큼의 무게가 따라온다. 카라얀 아카데미를 거쳐 현재 도이치오퍼 부수석으로 활동 중인 한이제(30)는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학생이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음악의 세계를 넓혀간다는 것이 굉장히 영광스러우면서도 힘든 경험이었다”며 “아직 그럴 만한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발을 맞춰야 했기에 엄청난 압박과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성장의 기쁨을 만나게 됐다”고 돌아봤다.
현재 카라얀 아카데미에 몸담고 있는 단원들도 같은 마음이다. 조예진은 “학생 때는 경험하지 못한 압박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학교에서만 연주를 해왔기에, 프로 오케스트라의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부담과 압박을 느꼈는데 점차 멘털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경도 “멘토인 수석 선생님께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이 크다”며 “새로운 곡을 만날 때 처음엔 악보를 읽는 데에만 한 달 정도 걸렸는데 일 년간 경험을 하다 보니 점차 습득하는게 빨라지고 멘털도 강해졌다”고 입을 모았다.
![]() |
카라얀 아카데미에 2024년 3월 입학한 하프 연주자 김혜진 [베를린 필하모닉 제공] |
카라얀 아카데미로 지원하는 학생들은 전 세계에서 모인다. 한국인의 경우 일찌감치 유학을 나와있던 중 지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학을 마친 뒤 베를린으로 향하게 되는 경우가 다수다. 카라얀 아카데미와 더불어 대학원 석사를 병행하는 단원도 적지 않다. 정답이 없는 음악 세계에서 저마다의 해답을 찾으려는 미래 세대 음악가들의 열망이 소용돌이 치는 곳이 바로 카라얀 아카데미다. 아카데미 학생들과 실내악 연주회를 가졌던 베를린필 상주음악가 조성진은 “배우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한 친구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음악도시’와 최정상 악단에서 운영하는 카라얀 아카데미의 레슨은 한국 음악교육과는 다른 지향점을 바라본다. “음표 하나 틀리지 않는 완벽한 연주”보다는 “좋은 음악”을 기준으로 삼아 ‘나만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것을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학생들의 변화는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
한이제는 “독일에 와서 놀랐던 것은 테크닉이나 완벽한 연주에 기준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었다”며 “대신 자기만의 음악, 소리의 수준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김민주 역시 “한국의 경우 콩쿠르에 나가 하나의 음이라도 틀리면 입상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독일에선 그 부분이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느꼈다”며 “그보다는 다른 음악성, 보다 좋은 음악을 더 높이 평가해 음 하나 하나를 틀리지 말아야겠다는 스트레스와 압박에서 벗어나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 |
카라야 아카데미 출신 오보에 연주자 한이제 도이치오퍼 부수석 [본인 제공] |
이곳에선 음악은 ‘취향의 차이’이지 어떤 것을 ‘최고’라고 줄세우기 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 관점을 배운다. 한이제는 “등수로 매겨지는 음악이 아니기에 타인이 아닌 나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며 “진정성을 가지고 개성을 갖춘 나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우열을 나누는 음악, ‘완벽한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는 강박 앞에서 위축됐던 학생들에게 카라얀 아카데미의 멘토들이 강조하는 것도 ‘대담한 자신감’이다. 조예지와 김성경은 “한국에선 한 번도 지적받은 적이 없었는데 선생님께선 늘 자신감을 강조하신다”며 “독일어로 ‘mutig’이고, 대담한 자신감과 용기를 강조한다”고 했다. 음악은 ‘경쟁’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이유가 없고, 그저 올곧게 ‘나의 음악’으로 향하라는 것이 멘토의 조언이다.
베를린필이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은 카라얀 아카데미에서부터 시작된다. 음악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중시하되 이를 하나로 모아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정수’를 들려주는 악단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흡수한다. 이들이 곧 ‘베를린필’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이어갈 자산이다. 실제로 베를린필 단원의 3분의 1 이상이 카라얀 아카데미 출신이다. 1호 한국인 학생이었던 홍나리는 베를린필 최초의 한국인 정단원으로 1995년 입단했다.
비단 베를린필에만 향하는 것은 아니다. 아카데미를 거친 학생들은 유럽 전역의 오케스트라로 뻗어간다. 뢰슬러 감독은 “카라얀 아카데미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높은 예술적 수준을 미래에도 지속하기 위해 설립했다. 더불어 2년의 과정을 통해 젊은 음악가들의 역량과 재능을 끌어내 다른 오케스트라에도 자리잡아 독일과 유럽 전역의 예술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 |
카라얀 아카데미 호른 연주자 조예지 [베를린 필하모닉 제공] |
카라얀 아카데미에서의 시간은 성장과 동시에 각성의 계기다. 노아 벤딕스-발글레이 제1바이올린 악장을 비롯해 스타 플레이어이자 대학 교수로 활동 중인 단원들이 즐비한 세계 최정상 악단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미래 세대’ 음악가들이 오늘을 살아내는 자극이자 동력이다.
한이제는 “그렇게 대단하고 뛰어난 사람들은 연습도 안하는 줄 알았는데, 매일의 연습 루틴을 가지고 있다. 학생이었던 나보다 더 연습을 많이 한다는 것에서 굉장히 놀랐다”며 “무엇보다 음악을 대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 그 마음으로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깊은 영감이 됐다”고 돌아봤다. 김민주 역시 “밖에선 볼 땐 엄청 멋진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연주가 없을 땐 여유로운 날들을 보낼 것 같았는데 연습 만으로 너무 바쁜 일주일을 보내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며 “무엇보다 연습의 농도가 짙고,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보여주는 노련미가 충격적이다”라며 웃었다.
1년의 시간을 보내니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카라얀 정신’을 체득한다. 최고의 가치는 ‘음악’, 삶의 모든 것은 음악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진정성과 음악만을 향한 열정이 ‘카라얀 정신’의 근간이다.
“음악적 지식의 범위가 정말 넓어 심포니면 시포니, 오페라면 오페라까지 자신의 파트가 아니라도 무슨 악장 몇 마디에 누구 솔로가 있는지 빠삭해요. 그러니 저 역시 자연히 음악을 더 듣게 도고, 히스토리를 찾아보게 되고요. 여기가 정말 음악 덕후들의 집합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민주)
“리허설은 물론 평소 연습 때조차 저렇게 온몸을 불사르며 연주할 수 있구나 싶어 늘 놀라게 돼요. 단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카라얀 정신이라는 것은 ‘음악에 대한 진심’인 것 같아요.” (조예지)
![]() |
백스테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