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를 보고 관철동 시대 프로기사들이 떠올랐다[서병기 연예톡톡]

승부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26일 개봉하는 영화 ‘승부’는 바둑계의 전설 조훈현(이병헌 분)과 그의 제자 이창호(유아인 분)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바둑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둑을 아는 사람이 보면 초급 내지 입문 바둑 영화 정도다.

영화의 흐름은 ‘바둑황제’ 조훈련도 위대하며, 그의 제자인 ‘돌부처’ 이창호도 대단하다는 내용이다.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지지 않는다.

나는 90년대 초중반 바둑담당기자를 한 적이 있어 영화를 보니 자연스레 관철동 시대 한국기원 기사들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조훈현과 이창호는 실명대로 등장해 고증에 충실하려고 했다고 한다. 조우진이 연기하는 남기철 기사는 누구일까 하고 생각해봤다. 남기철 기사는 서봉수 명인, 서능욱,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 유창혁 기사 등등이 떠올랐다. 김형주 감독은 “남기철 사범은 여러 기사들을 조합해 창조한 인물”이라고 했다.

남기철 사범은 조훈현이나 이창호와 대국을 하면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 방향성을 제시하며 조언 아닌 조언을 하는 캐릭터라 아마 조훈현과 이창호의 라이벌이자 조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서봉수 명인이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거칠게 말하면, 이창호가 타이틀전을 본격적으로 따내기 전인 80년대 중후반의 한국바둑은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의 대결이었다. 조훈현이 8~9개, 서봉수가 1~2개 정도의 기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각자 대표적으로 가진 기전을 따 조훈현 국수(國手), 서명수 명인(名人)으로 불렸다.

이 때는 일본과 중국이 바둑 강국으로 버티고 있었다. 일본은 ‘우주류’ 바둑 창시자인 다케미야 9단과 ‘지하철 바둑’의 대가 고바야시 9단이 있었고, 중국에는 섭위평 9단이 최강자였다. 중국 이야기는 ‘승부’ 앞부분에 잠깐 소개된다. 당시 중국은 바둑을 (두뇌)스포츠로 여겨, 프로기사들을 태릉선수촌 같은 곳에서 훈련을 시킨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에도 나왔듯이 조훈현은 제1회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중국의 섭위평 9단을 꺾고 개선장군이 된다.

‘바둑황제’ 조훈현 국수와 이후 초스피드로 성장한 제자 이창호의 등장으로 한국이 한중일 바둑삼국지의 주도권을 잡아나간다.

1975년 전주 출생인 이창호는 9살 때 조훈현의 내제자(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며 바둑을 배우는 제자)로 들어간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되지 않은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사제대결이 시작됐다. 이창호는 야금야금 조훈현이 가진 타이틀을 가져오더니 1994년 정도가 되면 이미 조훈현의 모든 타이틀을 접수했다.

천하의 조 국수가 무관이라니. 이창호는 1992년 국제기전인 동양증권배에서 우승해 최연소 세계챔피언이 됐고, 1996년에는 제9회 후지쓰배세계바둑선수권대회마저 우승했다. 초기 응창기배 대회에서도 이창호는 크게 기여했다.

한 집에서 이 두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조훈현 국수의 아내인 정미화 씨(문정희 분)도 대단한 사람이다. 항상 두 사람을 차에 태워 대국장까지 보내준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특히 이창호가 남편의 이름 뒤에 붙어있는 ‘국수’를 가져갈 때는 얼마나 힘든 마음이었을까?

두 사람의 희로애락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정미화를 연기한 문정희는 섬세한 감정 표현으로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조훈현 국수라 해도 어릴 적부터 가르친 이창호와의 대결에서 계속 패하면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평정심을 잃었다. 하지만 조 국수는 절치부심,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무관을 탈출하며 바둑의 정상에 도전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 과정에서 체인스모커였던 조훈현 국수는 오랜 기간 애용하던 ‘장미’ 담배를 끊고 ‘카라멜’로 바꾼다.

조훈현 스승과 이창호 제자는 기풍(바둑 두는 스타일)이 서로 너무 다른 것도 흥미롭다. 영화에서도 조훈현은 자신과 바둑 두는 스타일이 판이하게 다른 이창호와 은근히 신경전을 펼친다. 결국 제자에게 “너 바둑을 찾아라”라는 말을 남긴다.

조훈현은 날카로움, 공격바둑, 쾌속행마형이라 ‘제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반면 이창호는 두터움, 기다림의 바둑, 내면바둑, 끝내기의 대가다. 그래서 강태공, 능구렁이, 돌부처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창호는 끝내기만으로 몇집을 얻어낸다.

필자는 이창호의 국내외 대국이 열리면, 검토실에 조용하게 와있던 이창호의 부친인 이재룡 씨와도 대화를 나누곤 했다. 전주에서 시계포를 한다는 이창호 부친은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았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금은방 봉황당 주인 최무성과 외모는 달랐지만 차분한 성격은 서로 비슷한 것 같았다.

이창호가 우승하면 인터뷰를 해야하는 데, 말을 잘 하지 않아 애태웠던 기억도 난다. 연예계에서는 배우 양동근을 인터뷰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초기 이창호는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검토실의 이재룡 씨에게 달려가 물어보면, 아버지는 바둑을 모른다고 했다. 이창호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처음 바둑을 배웠고, 전영선 사범에게 사사했다.

프로바둑계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다. ‘지는 바둑’은 주목하지 않는다. ‘이기는 바둑’이 살아남는다. 그러니 자신의 독특한 색깔의 기풍까지 가지고 한국, 아니 세계에서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9단은 위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두 기사로 분한 배우들의 연기도 볼만하다. 이병헌의 예고편 모습을 본 조훈현 국수가 ‘나인 줄 알았다’라고 했다고 한다. 대국을 하는 유아인의 옆모습이 순간적으로 너무 이창호 9단과 닮아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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