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에 반발하며 美 공연 취소
국내에선 5월 1일 예술의전당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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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마스트미디어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전 음악이 단순한 오락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을 향한 배려와 평등, 연민 등의 가치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사람을 하나로 모으고 영혼을 만지는 인간적인 수단이죠.”
독일 출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59)가 최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반발, 이달 21일 시작 예정이었던 미국 투어를 전면 취소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친(親)러시아 행보와 공무원의 대량 해고, 트렌스젠더 정책 등을 우려해서다.
내한을 앞두고 최근 한국 기자들과 화상으로 만난 그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미국에서 확산하는 공포, 유럽에 사는 내 삶을 고려할 때 그곳에서 공연을 지속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느꼈다”고 밝혔다.
그의 결정은 지난 2월 사흘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협연한 뒤 나왔다. 그는 앞서 지난달 28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미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공포영화를 보는 어린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순전한 분노를 느낀다. 이런 기분을 품고 계속 (미국에서 연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가는 정치가가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며 이번 결정을 정치적 입장으로 해석되는 것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테츨라프의 행보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음악가가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메시지이자 개인적 가치에 대한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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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마스트미디어 제공] |
테츨라프는 “음악의 장점 중 하나는 특정한 사상을 직접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수많은 음악이 자유와 개인의 가치를 이야기한다”고 강조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할 생각으로 만들었지만, 그가 황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악보 앞에 쓴 헌사를 지웠죠.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고 자신의 곡에서 자유, 평등의 가치를 상징으로 삼았던 작곡가였어요. 현재 미국에서는 이런 가치들을 찾을 수 없어요.”
테츨라프는 이번 투어를 비롯해 내년 4월까지 뉴욕 카네기홀 등에서 예정된 총 22회의 공연을 완전히 지웠다. 테츨라프 뿐만 아니라 헝가리 출신 ‘피아노 거장’ 언드라시 시프도 미국 공연을 취소했다.
테츨라프는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서) 민주주의가 배신당했다고 느낀 것처럼, 우리도 현재 미국의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배신당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정치 상황, 진보냐 보수냐 이런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분명히 했다.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간적인 문제죠. 음악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연민을 나누고, 영혼을 탐구하는 가장 인간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대에는 음악이 사회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거나 음악을 정의와 인류애의 관점에서 바라보길 원한다고 해서, 그걸 정치적이라고 보지 않아요. 그건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이에요.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전하는 도구니까요.”
테츨라프의 보이콧은 ‘행동하는 음악가’의 목소리에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는 1988년 미국에서 처음 공연을 한 이후 해마다 평균 20회가량 현지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그는 미국 연주 때마다 연주료의 32%를 세금으로 낸다. 그는 “음악가로서 나의 삶에서 미국은 큰 부분을 차지해 왔지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그곳에서 공연하고 세금을 내는 것이 양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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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마스트미디어 제공] |
그는 1990년대 초반 쇤베르크 협주곡 연주로 주목받아 베를린 필하모닉, 드레스덴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상주 음악가로 활동해 왔다. 2017년 바흐 무반주 앨범이 황금 디아파송상, 2018년 버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 앨범이 그라모폰상 협주곡 부문 등 각종 음반상을 휩쓸었다. 2019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 한국 관객에게도 높은 인지도를 가진 음악가다.
테츨라프는 “한국에선 어디서든 환영받는 느낌을 받는다”며 “서울시향 상주 활동을 하는 동안 리허설과 연주 후 바로 떠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의미 있는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이번 공연(5월 1일, 예술의전당)에선 요제프 수크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네 개의 소품’,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3번’,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신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등을 선곡했다. 피아니스트 키벨리 되르켄이 그의 음악에 힘을 싣는다.
테츨라프는 “수크는 자기만의 길을 꿋꿋이 이어갔던 작곡가지만 많이 조명받지 못했다. 이번에 수크의 곡을 첫 번째 곡으로 선택해 좀 더 조명해 보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대다수 바이올리니스트와 달리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네리 등 고(古)악기가 아닌 현대 악기를 사용한다. 이전까진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사용했지만, 현재 쓰는 악기는 슈테판 페터 그라이너가 2002년에 제작한 바이올린이다. 테츨라프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고악기와 현대 악기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지금 내 바이올린보다 더 좋은 소리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있다면 기꺼이 그걸 선택할 것”이라며 “지금의 악기는 깊이 있는 소리부터 밝은 소리까지 다양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다. 나와 가장 잘 맞는 악기라 선택했다”고 했다.
그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다. 테츨라프는 “작곡가의 이야기를 내 감정과 연주를 통해 전달한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내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은 모든 것을 동원해서 최대한 아름답고 완벽한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진실한 연주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삶은 대부분 기능적으로 움직이고,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클래식 공연장에 와서 관객들이 함께 앉아 ‘이게 정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구나’, ‘이게 우리를 연결해 주는 것이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이 있어요. 공연이 끝났을 때, 관객들의 마음이 변하는 걸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작곡가가 기쁨, 슬픔, 눈물, 웃음 등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들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 그것을 위해 저는 연주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