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제품·서비스로 인류에 공헌”
19일 주총 마지막 공식석상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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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삼성 프레스 콘퍼런스’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고(故)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삼성전자 제공] |
고(故)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삼성전자가 다시 리더십의 한 축을 잃는 공백 상태를 맞게 됐다. 지난 19일 이사회에서 전영현 대표이사 부회장(DS부문장)과 함께 투톱 체제를 구축한 지 불과 6일 만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사즉생’을 강조하며 독한 리더십을 주문한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이를 전면에서 실행할 최고 책임자를 잃게 돼 침통한 표정이다. 당분간 엄숙한 분위기 속에 조직과 직원들을 추스르고 대내외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리더십 구축을 과제로 안게 됐다.
2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한 부회장은 인하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88년 삼성전자 영상사업부 개발팀에 입사했다. 30년 넘게 TV 부문에만 몸 담은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TV 전문가로 꼽힌다. 삼성전자가 2005년부터 19년 연속 글로벌 TV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는 것 역시 한 부회장의 공헌이 크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브라운관 TV 시절부터 PDP TV, LCD TV, 3D TV, QLED TV에 이르기까지 자사 TV의 변천사를 모두 지켜본 한 부회장을 삼성전자 TV 사업의 ‘살아있는 역사’로 기억한다.
그는 2013년 부사장으로 승진하며 TV 개발을 총 지휘하는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개발실장을 맡았다. 차별화된 제품 개발을 통해 글로벌 TV 시장 1위의 위상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2017년 사장(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에 올랐다.
당시 삼성전자는 한종희 신임 사장에 대해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을 통해 삼성전자 TV 사업에서 ‘제2의 도약’을 이끌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TV 사업을 이끄는 동안 우직하고 성실한 경영 스타일을 인정받으면서 2021년 12월 정기 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동시에 모바일과 가전, TV 등을 모두 아우르는 신설 조직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을 맡았다.
매머드급 조직의 수장이 된 그는 이때부터 TV뿐만 아니라 생활가전, 모바일, 네트워크 등 4개 사업부를 모두 짊어지며 반도체를 제외한 삼성전자의 모든 상품을 총괄하는 사령탑이 됐다.
이재용 회장이 사법 리스크로 발이 묶인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사업을 대표하고 이 회장의 메시지를 대내외에 전해왔다.
아울러 부회장이 된 이후에도 사내에서 직원들과 격의 없는 소통을 하며 소탈한 행보를 이어갔다. 2022년 4월 DX부문 임직원 소통을 위해 열린 타운홀미팅 ‘DX커넥트’에서 자신을 ‘부회장님’, ‘대표님’ 말고 ‘JH’로 불러달라며 적극적인 소통 의지를 보였다.
한 부회장의 보폭도 이를 기점으로 넓어졌다. 202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2’의 기조연설자로 처음 이름을 올리며 전 세계 미디어 관계자들과 거래선 앞에서 글로벌 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이때부터 올 1월 ‘CES 2025’까지 4년 연속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무대에 올라 기조연설을 통해 삼성전자의 제품이 만들어 갈 미래 모습과 비전을 직접 소개해왔다.
한 부회장은 CES뿐만 아니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등 주요 글로벌 행사 때마다 개막 첫 날이면 삼성전자 전시관 입구에 장시간 선 채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거래선들을 일일이 맞이하며 국제 무대에서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얼굴로 활동해왔다.
한 부회장은 올 1월 CES 이후에도 줄곧 해외 사업장과 거래선을 만나기 위해 강행군을 펼쳤다. 한 달의 절반 가까이 해외에 체류하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인상과 공급망 이슈 등 쏟아지는 현안 대응에 총력을 기울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부회장의 마지막 공식석상 모습은 지난 19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볼 수 있었다. 주주총회 의장인 한 부회장은 주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지난해 경영성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어려운 환경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 인류사회에 공헌’한다는 회사의 경영철학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기존 사업은 초격차 기술 리더십으로 재도약의 기틀을 다지고, AI 산업 성장이 만들어가는 미래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로봇·메드텍·차세대 반도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겠다”며 주주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당부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이사회에서 전영현 부회장을 대표이사로 선임하며 한 부회장과 함께 2인 대표이사 체제를 복원하고 부문별 사업책임제를 확립했으나 6일 만에 한 부회장의 사망으로 당분간 1인 대표이사 체제로 운영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이날 오전 10시45분 ‘대표이사 변경’ 공시를 통해 한 부회장의 사망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전영현 대표이사 체제로의 전환을 알렸다.
김현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