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뜰리에 에르메스, 김아영 신작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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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2025). [아뜰리에 에르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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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2025). [아뜰리에 에르메스]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건설회사 엔지니어였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쿠웨이트로 떠나서, 1982년에 돌아왔다. 그리고 1984년 사우디 아라비아로 떠나, 걸프전이 발발한, 1991년에 돌아온다.”
짙은 개인사를 읊조리는 작가의 목소리 너머로 아버지가 어린 작가의 품에 안겨온 ‘낯선 세계’가 펼쳐진다. 물 한 모금이 기름 한 방울보다 더 귀했던 땅. 두 차례의 석유파동이 몰아친 1970~1980년대 중동이다.
관람객은 작가의 기억과 꿈이 겹치는 그곳에서 이내 미지의 장소에 닿게 된다. 작가의 아버지가 몸담았던 회사가 만든 사우디 아라비아의 ‘알 마터 주택단지’다. 지금은 중산층 이상 사우디인·시리아인·레바논인 등이 사는 고급 거주지지만, 1990년 걸프전 당시에만 해도 이라크의 침공으로 터전 잃은 쿠웨이트 난민들이 거주했던 임시 공간이었다. ‘한양 아파트’라는 본래 이름이 사라지고 오랜 기간 ‘쿠웨이트 아파트’로 불렸던 이유다.
그렇게 내면 깊숙한 곳에 흩어져 자리한 작가의 미시사가 세계사적 격변과 맞닿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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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작가. [연합] |
올 한 해 뉴욕, 런던, 베를린, 홍콩의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를 여는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46)의 영상 신작 ‘알 마터 플롯(AI-Mather Plot) 1991’ 이야기다. 10년 전, 작가가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서 공개한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2015) 연작을 재구성한 신작이다.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공개된 이 작품은 최근 세계 무대에서 뜨겁게 주목받고 있는 그를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제 내래이션을 전면에 드러내는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가족과 일상적으로 감정적인 소통을 하진 않아서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과정이 저로서도 도전적이었다”고 전했다. 28분 분량의 영상으로 구성된 신작에서는 세계 경제를 지배했던 연도별 원유 가격 그래프, 포항 앞바다에서 석유 탐사의 헛된 꿈을 꾸던 한국 정부, 알 마터 주택단지 현장 답사 중에 작가가 만난 우거진 공중정원, 거주민들이 기억하는 각양각색의 기억 등 방대한 단서들이 작가의 가족사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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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김아영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 [연합] |
일견 개별적으로 보이는 사건과 기록의 나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근대주의 권력을 가능케 한 ‘석유’라는 연결 고리가 있다. 석유를 매개로 지정학적 분쟁과 원유 자본주의, 식민주의 이주, 난민 문제 등 여러 첨예한 문제를 끄집어 낸 서사가 얽혀 있다는 뜻이다. 작가는 “석유는 고대로부터 엄연히 존재해 왔으나 오직 근대에 이르러 에너지원으로 재발견되면서 폭발적으로 근대의 저류로 작동했다는 점에서 기이하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서 한 개인의 존재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묻게 된다. 개인의 기억이 어떻게 역사적 진실과 만날 수 있는지, 원유 자본주의가 초래한 갈등이 인간 윤리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기억과 역사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 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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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작가. [아뜰리에 에르메스] |
전시 주제인 ‘플롯, 블롭, 플롭’(Plot, Blop, Plop)은 ‘구획, 방울, 퐁당’이라는 의미를 지닌 언어유희다. 단어가 가진 중의적인 의미를 곱씹어 보는 것도 이 전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작가는 특히 석유와 역청을 둘러싼 서사 구조로써 플롯이 가진 다층적 의미에 대해 강조했다. “플롯은 중세시대 영국에서 장원의 영주들이 영지를 구획해 소작농에게 할당하는 영역의 기준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후 다이어그램, 지도, 기하학적, 평면도, 분류도 등을 뜻했다. 16세기 후반에는 마침내 음모와 계략의 의미까지 끌어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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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 작품이 설치된 전경. [김아영 작가] |
지난달 국내 작가 처음으로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오는 5월 뉴욕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한다. 지난달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막했고, 5월 개막하는 런던 테이트모던 25주년 기념 소장품전에선 작가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가 상영된다. 10월엔 홍콩 M+미술관 외벽에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11월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PS1 분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뉴욕 퍼포마 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도 공개한다.
한편 작가에게는 ‘디지털 아티스트’, ‘혁신의 아이콘’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왔다. 게임 엔진과 자율주행의 핵심인 라이다(LiDAR) 스캔, 3차원(3D) 모델링, 생성형 인공지능(AI) 등 기술을 작업 과정에서 활용한 것이 특히 부각되면서다. 이에 대해 그는 “저는 디지털 세대 이전의 작가”라며 “특화 분야는 디지털 네이티브나 CG 전면화가 아닌, 가장 오래된 매체인 영상”라고 정정했다. 이어 그는 “사진을 전공해 필름 카메라를 사용해왔다. 그래서 광학식 렌즈가 기반인 미디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며 “저는 전통적인 광학적 이미지와 탈광학적 이미지를 마구 충돌시키면서 거기에서 오는 고양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 1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