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김의성부터 신예 강해림까지 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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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연구원 출신 스타트업 대표 창욱(하정우)이 회사의 명운이 걸린 계약을 앞두고 로비 골프의 세계에 발을 담그게 된다. [쇼박스] |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여종업원이 있는 자리에서 훌렁 바지를 벗는 대기업 사장. 스타트업 대표가 어렵게 얻은 10분간의 브리핑을 번번이, 대놓고 메뉴 소개를 빙자해 끊어버리는 레스토랑 주인. 20대 여성 프로골퍼에게 스킨십을 하려고 치근대는 남성 고위 공무원. 남자 배우에게 등을 긁어달라는 중년의 여성 정치인. 닳고 닳은 그런 인간 군상들 속에서 과연 초년병 시절의 ‘염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
감독 하정우가 내놓은 신작 ‘로비’에서 배우 하정우가 연기한 주인공 윤창욱은 내면의 파고를 넘나든다. 4조 원짜리 국책사업을 따야만 자기 회사 직원들에게 월급도 주고, 회사를 존속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경쟁사 대표 손광우(박병은 분)가 하는 로비에 무방비한 상태로 당할 수 없다. 관건은 계약 결정권을 쥔 1급 고위공무원 최 실장(김의성)과 친해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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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사업 계약의 의사결정권자 넘버원 조 장관(강말금)과 최 실장(김의성)의 기싸움이 벌어지고…창욱은 최 실장에, 창욱의 라이벌 광우(박병은)는 조 장관 쪽에 각각 접대를 준비한다. [쇼박스] |
최 실장은 업무 방식이 FM(정석대로 원리원칙에 입각한) 스타일이라고 정평이 난 인사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듯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다 방법은 있다. 최 실장이 프로골퍼 진세빈(강해림)의 열광적 팬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창욱은 ‘드라이버 입스’(근육이 경직돼 평소 하던 동작을 제대로 못 하는 현상)가 온 데다 스폰서쉽도 만료돼 입지가 불안정해진 진 프로를 찾아가 스폰서쉽 제안과 함께 최 실장을 위한 접대 골프 참여를 간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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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악역’ 김의성이 ‘로비’에서도 검은 속내를 가진 최 실장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쇼박스] |
최 실장, 진 프로, 창욱 외에 최 실장과 오랜 세월 라포(Rapport)를 형성한 박 기자(이동휘)가 합류하며 4인 라운딩이 완성된다. 처음엔 그저 점잖은 진 프로의 팬인 줄 알았던 최 실장은 창욱과 박 기자의 입에 발린 소리에 익숙해지며 점점 긴장이 풀리자 검은 속내를 거침없이 내보인다. 3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진 프로에게 “탱고를 가르쳐 주겠다”며 들이대질 않나, 자꾸만 내기를 걸어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자고 하질 않나. 여기에 민망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진실게임도 하자고 종용한다. 최 실장 입안의 혀처럼 움직이는 창욱과 박 기자는 이런 뻔한 수작을 저지하기는커녕, 진 프로를 더욱 고립시키고 희희낙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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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골프를 위해 모인 4인방[쇼박스] |
‘로비’는 하정우표 맛깔나는 티키타카 대사의 향연이 돋보인다. 로비 골프를 하겠다 해놓고 번번이 최 실장보다 잘 쳐버리는 창욱의 골프 실력으로 관객들을 피식피식 웃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웃음 코드는 이 영화를 코미디 장르로 분류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를 진지한 눈으로 보면 어느새 냉소조차 간신히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로비’ 속 인간 군상들은 사회적 갑을관계를 빠릿빠릿하게 파악하고, 이에 따라 행동한다.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면, 곧바로 상대에게 ‘네가 내 아래에 있음’을 행동과 말, 뉘앙스를 통해 또렷이 확인시켜 준다. 영화 속 장면들은 한때 피해자이기도, 방관자이기도, 때론 가해자이기도 했던 관객 각자의 과거 경험에 불쾌한 방식으로 침투한다.
진 프로는 라운딩 중간쯤 창욱에게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며 차갑게 말한다.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20대 선수 생활을 보냈던 그가 처음으로 스스로 길을 개척해 보려다 가장 궁색한 자리로 굴러떨어진 상황은 퍽 씁쓸하다. 아직 말간 티를 못 벗은 강해림의 얼굴을 크게 클로즈업하면 마치 인간 사회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함부로 발을 디딘 어린 사슴이 사냥당하는 이미지가 겹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미 닳고 닳은 사람이 사슴의 맑은 눈망울을 되찾는 일은 가능할까. 마지막 홀, 창욱은 소원 들어주기 내기가 걸린 그 홀에서 진 프로와 최 실장의 공을 바꿔 치기 하며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듯하다. 공을 바꾸는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친 숲속의 사슴이 아니었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겠지만, 이 영화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창욱은 스타트업을 처음 시작했던 그때의 ‘염치’와 원천기술에 대한 ‘자존심’을 되찾았을까. 관객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극장을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