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효심 간직한 ‘효찰’ 화산 용주사…사도세자 잠든 융·건릉 [정용식의 사찰 기행]

(65) 경기 화성 용주사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경기 화성 용주사 전경



부모님의 은혜는 깊고도 무거워 보살피고 사랑하심을 잊을 때가 없으시다. 단 것은 뱉어 아이에게 먹이시고 쓴 것은 당신이 삼켜도 찡그리지 않으신다. 애정은 무거워 숨길 수가 없고 은혜는 깊어 슬프다. 아이의 배가 부르기만을 바라실 뿐 당신의 시장함은 개의치 않으신다.

불설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經)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 듯해 괴로워하던 정조대왕은 우연히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의 보경(寶鏡) 스님을 만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였기에 정조도 처음엔 불교를 멀리했지만 부친의 넋을 위로하고자 하는 효심에 절을 세울 것을 결심, 병자호란 때 폐사된 갈양사 터에 용주사를 중창하고 왕찰로서 역할을 하게 했다.

세월 지나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지라. 다섯 살 때 박힌 가시 못 빼고 있는디 손등에 박힌 가시는 빼면 되지만, 가슴에 박힌 가시는 뺄 수 없지라. 젊은 울 엄니 30년 전 외출하고 아직도 안 오고 뭐한가 모르것지만 왠지 이 가시는 뺄 수 없을 것 같소. 엄니, 30년 넘은 가시를 아직도 못 빼고 있소. 싸게 오셔서 가시 좀 빼 주쇼 엄니… 세월 지나도 잊히지 않는 것이 있지라.

도신 스님 시 ‘엄니’

수덕사 교구장 도신 스님은 8살 때 출가해 수십 년 수행 생활을 해도 5살 때 헤어진 엄니를 못 잊어 ‘엄니’라는 애틋한 시를 썼다. 일반적으로 효 사상은 유교의 중심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불교도 붓다로부터 효 사상이 출발하고 있다.

팔정도와 육바라밀의 기본 윤리에 기반한 부모에 대한 봉양과 보은을 기본으로 해 독자적인 효 사상이 정립된 것이다. 용주사를 ‘효’의 근본 사찰이라고 한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효찰 용주사


용주사 경내 모습


용주사는 산속이 아닌 도심지 화성특례시 송산동 화산(108m) 평지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이 절은 신라 말기인 문성왕 16년 854년에 갈양사(葛陽寺)라는 이름으로 염거화상이 창건했다. 염거화상은 도의국사에 이어 신라 말 5교9산 중 하나인 ‘가지산문’의 제2대 조사이다. 고려 광종의 신임을 받은 혜거국사가 중흥을 일으켜 왕실의 원찰이 돼 국가적 축원 도량으로 발전시켰다는 기록도 있지만 갈양사는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됐다.

조선 시대 대표적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제22대 정조 임금은 보경 스님의 ‘부모은중경’ 설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즉위 13년을 맞던 해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불리는 이곳 화산으로 이장해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수원화성과 행궁을 만드는 대대적인 역사를 벌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0년 폐사된 갈양사 터에 절을 새로 중창해 능침(임금의 무덤) 사찰로 삼아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살아생전 못다 한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했다. 정조는 절의 낙성식 전날 밤 꿈에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해 절의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명명했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이후 용주사는 정조대왕의 효성이 깃든 효심의 본찰(本刹)로서 불심과 효심이 함께하는 수행처로 자리 잡게 됐고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중심 사찰 중 하나로 성장해 경기 남부의 절과 암자를 관할하는 본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열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가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를 말한다. 또한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가 네 번째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는 다섯 번째요.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것이 그 여섯 번째이고,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은 일곱 번째 은혜이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를 말하고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것이 아홉 번째 은혜,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가 열 번째이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효행박물관 내 불설대부모은중경 경판


정조대왕의 효심을 일깨운 보물 ‘불설대부모은중경 경판’을 비롯해 왕실 하사품 등 정조의 효심과 각종 불교 문화유산을 보존 전시하고 있는 성보박물관 이름이 ‘효행박물관’이다.

효행박물관 앞 5층 석탑


용주사 초입에 있는 효행박물관 입구에는 홍살문이, 좌측에는 고려시대 탑이라는 5층 석탑이 있고, 우측에는 1981년 조성한 ‘부모은중경탑’이 세워져 있다.

효행박물관 앞 부모은중경탑


정조대왕은 용주사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해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여섯 번의 제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비, 정조의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왕후(정조 왕비)를 차례로 모시고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이렇듯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됐고 2020년 누전 사고로 또다시 전소돼 복원했다.

홍살문


왕실의 능(陵)·원(園)·궁전·관아 등의 입구에 경의(敬意)를 표하는 의미의 붉은 칠을 한두 개의 기둥을 세운 홍살문이 있는데,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 입구에도 세워져 있다. 이는 용주사 호성전에 사도세자와 정조대왕 등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를 지내 왔기 때문이다.

용주사 호성전


이러한 제사는 일제 강점기 때인 1907년을 끝으로 중단됐다가 2008년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했다.

호성전 내부 법당


이는 정조대왕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한 뜻을 계승한 효찰 대본산으로서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해 우리나라 효 문화를 선양하고자 한 것이었다.

용주사와 수륙대재


용주사 수륙대재 모습


정치적인 격변기엔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이 많이 생기고 이러한 영혼들은 물과 육지를 떠돌아다닌다. 나라와 백성은 물론, 수륙 곳곳에 떠도는 넋들을 위로하고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해 국가 차원에서 진행했던 불교 의례가 ‘수륙대재’(水陸大齋)이다. 이러한 불법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수륙대재는 우리나라에선 고려시대인 970년 갈양사(葛陽寺)에서 최초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폐사된 갈양사 터에 새로 중창한 용주사는 정조의 효심에 의해 중창된 왕찰로서 조선 후기에는 유일하게 국가에서 행하는 수륙대재를 지내는 곳이 됐다.

용주사 수륙대재 모습


숭유억불의 조선 건국 초기에도 민심 수습 차원에서 떠도는 고혼(孤魂)들을 위로하고 천도했던 수륙대재는 국가의 후원을 받아 실행된 유일한 불교 의식이었다. 진관사 수륙재를 비롯해 조선 초기의 여러 수륙재 의식이 지금에도 전해지고 있으나 용주사에서는 유일하게 고려시대 의식절차에 따른 수륙대재를 복원하기 위해 2017년부터 봉행 행사를 하고 있다.

용주사 주지 성효 스님(맨 왼쪽)과 정원주 조계종 중앙신도회 회장(헤럴드·대우건설 회장, 맨 오른쪽)


2024년 가을 이슬비가 내리는 와중에 진행된 용주사 수륙대재를 지켜보며 잠시 과거로 되돌아갔었다.

최근 경기 화성 용주사를 방문한 정원주 조계종 중앙신도회 회장(헤럴드·대우건설 회장, 왼쪽 두번째)과 정용식 헤럴드 상무(맨 오른쪽).


조선과 고려의 의식절차 차이를 알 순 없지만 수륙대제는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으로써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며 한국 전통 불교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어 계승돼야 할 불교 의식이다.

용주사는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는 100여 사찰을 거느린 제2교구 본사로 오랜 역사와 문화재 그리고 수행의 전통을 간직한 사찰이다.

천왕문


주차장에 내리면 초입에 ‘용주사’ 현판이 붙어있어 일주문처럼 보이는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이 먼저 맞이한다. 여기를 지나면 홍살문, 그리고 실제의 일주문인 독특한 형태의 ‘삼문’이 나온다.

삼문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마치 양반집 대문처럼 동서에 옆문과 중앙에 대문이 각각 있고 좌우에 행랑이 있어 삼문이라 부른다. 이는 조선 왕실 사찰의 건축양식으로 용주사가 사도세자 현륭원의 제사를 위해 지어진 절이기 때문이다. 삼문 네 기둥의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높고 큰 석재의 초석인데 정면에 ‘용주사’(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고 네 기둥에는 ‘용주사불’(龍珠寺佛) 네 글자를 첫 글자로 하는 4구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용반화운 주득조화 사문법선 불하제중’(龍蟠華雲 珠得造化 寺門法禪 佛下濟衆)

(용이 꽃구름 속에 서려 있고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네. 절 문에 이르러 법선을 행하며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해학적인 모습으로 버티고 서있다.

용주사의 대웅전과 동종


천보루 앞마당 5층 석탑


삼문을 지나면 천보루 앞마당에 효행박물관 앞 5층 석탑과 비슷한 또 다른 5층 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석탑에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사리병에 담아 안치돼 있다고 해 ‘세존 사리탑’이라고도 불린다.

1790년 창간 당시 지어진 2층 누각 천보루(天保樓)는 높은 석조기둥 위에 목조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이는 궁궐 건축과 유사하다고 한다.

천보루 안쪽에는 ‘홍제루(弘濟樓)’라는 별호가 붙어있다.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 이름이 안쪽에는 ‘홍제루(弘濟樓)’라는 별호가 붙어있다. 풀어보면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天保樓)’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하는 곳(弘濟樓)’이라는 뜻이 된다.

대웅보전


천보루를 통과하면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 깊은 대웅보전이 보물로 지정돼 있고 법당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진 ‘삼세여래 후불탱화’가 있다.

용주사 대웅보전 내부에 봉안된 삼세여래 후불탱화. 조선 중기 최고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대웅보전 앞 계단을 올라 왼쪽을 향하면 범종각이 있고 마주 보는 오른쪽에는 법고각이 있다.

범종각


범종각에 있는 범종은 고려 초기의 것이나 신라시대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

용주사 고려 범종


드물게 보는 큰 규모라고 하는데 용주사의 유일한 ‘국보’다. 연꽃과 비천상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시방칠등각


대웅전 뒤편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이름의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이 있다.

시방칠등각 내부 법당


시방(十方)이란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하고 칠등(七燈)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므로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지만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음을 볼 때 삼성을 모시는 삼성각(三聖閣)이다.

전강대종사 사리탑


대웅전 뒤편 호성전과 지장전 사이에 7층 규모로 커다란 ‘전강대종사 사리탑’이 조성돼 있다. 전강 영신 스님(1898~1975년)은 경허 스님·만공 스님의 법맥을 이은 선승으로 근현대 용주사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절의 모습은 창건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는데 1986년에 신축했다는 중앙선원이 ‘전강대종사 사리탑’ 뒤로 넓게 자리하고 있다. 침체된 선종의 맥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천보루. ‘난치병 어린이 돕기 기금 마련 주지 스님과 함께하는 1080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난치병 어린이 돕기 기금 마련 주지 스님과 함께하는 1080배’를 매월 둘째 넷째 주 토요일에 대웅전 앞마당에서 진행한다는 플래카드가 유별나게 눈에 들어온다. 1080배를 하려면 족히 세 시간은 계속 절해야 하는데 재가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용주사 초입 휴식공간인 ‘카페 화산’


용주사 초입에 방문객들의 휴식 공간인 ‘카페 화산’에는 성효 주지 스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해 잠시 들렀다.

카페 화산 내 성효 주지 스님이 직접 그린 그림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해서 한참을 보았지만 그림 속의 심오한 뜻을 범인(凡人)으로선 다 이해하긴 어려웠다.

융릉과 건릉


화성 융릉과 건릉 안내도


용주사는 정조 대왕과 사도세자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해 절에서 걸어 25분 거리에 있는 융릉과 건릉을 찾았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현판과 함께 넓게 조성된 공원이다.

융릉


입구 매표소에서 500여m 들어가면 융릉이, 그 반대편으로 600여m 가면 건릉이 나온다.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장조)의 묘를 시내에 있는 조그만 언덕 같은 화산에 옮겨 현륭원이라고 했고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여기에 합장하면서 ‘융릉’으로 승격했다.

건릉


그리고 자신(정조대왕)도 왕비(효의왕후)도 함께 가까운 곳에 합장해 묻혔는데 이를 ‘건릉’이라 한다.

융릉은 정자각과 일직선이 아닌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다.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융릉’이나 정조가 묻힌 ‘건릉’이든 왕조의 묘는 홍살문에 정자각, 수라각, 비각 등 똑같은 주변 분위기이지만 사도세자의 융릉은 정자각과 일직선이 아닌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다.

건릉


사도세자는 답답한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기에 묘 앞만이라도 아무것도 없기를 바라서 그랬다고 한다.

융릉 비각의 표석


융릉의 비각에도 2개의 표지석이 있었는데 아들 정조가 ‘현릉원’으로 승격해서 새운 비와 고손자인 고종이 ‘융릉’으로 격상시킨 표석이다.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지만 아들과 고손자에 의해 왕으로 신원이 회복됐다.

건릉 표석


정조라는 성군을 아들로 둔 훌륭한 어머니였지만 20세에 남편(사도세자)을 보내고 51년을 홀로 궁에서 보냈던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쓴 비운의 여인인지, 아니면 남편(사도세자)을 죽인 노론 가문의 딸로서 권력 지향적인 냉혹한 여인인지 역사는 되묻고 있다.

삼문 인근에 위치한 ‘혜경궁 읍혈록 문학비’


용주사 삼문 옆 잔디밭엔 ‘혜경궁 읍혈록 문학비’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죽어서까지 아버지의 곁에 묻히고자 했던 정조의 효심이 주는 애틋함이 엿보이는 ‘건릉’ 가는 길은 우람하게 쭉쭉 뻗은 소나무가 숲을 이룬 노송길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온다.

융릉 앞에 있는 용의 여의주에 해당한다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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