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망명객이 뿌린 씨앗, 일본경제 꽃피우다[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히가시오미시 햐쿠사이지 [출처 야후재팬 화상]



백제 지배층, 일본으로 집단 망명

“도래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시가현이며, 그 다음은 긴키, 호쿠리쿠, 시코쿠 지역이었다” 일본 도쿄대학교 오하시 쥰 교수는 2021년, 인간 유전자 게놈 분석을 통한 현대 일본인의 혼혈 분포를 지역별로 판독하여 그 결과를 위와 같이 발표했다. 그의 연구결과는 한반도 출신 도래인들이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 북부에 더 많이 상륙, 분포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는 것이어서 역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시가현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오미국(近江)으로 불렸는데 일본 최대 호수, 비와호를 품고 있으며 일본 열도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은 이곳에 한반도 출신 도래인의 유전적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글에서는 시가현 곳곳에 정착하여 뿌리 내린 백제계 도래인들이 이 지역에 남긴 흔적과 그것이 일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역사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 사이메이/덴치천황’에 따르면, 660년 9월 백제의 최고위급 관료 귀실복신은 승려 종각을 사이메이천황(즉위 655~661년)에게 보내 백제가 당과 신라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백제 의자왕은 포로가 되어 당에 끌려갔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백제 수복을 위한 구원병 파병과 일본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백제 왕자 여풍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여성 천황 사이메이의 아들로서 국정을 관장하고 있던 나카노 오에노오지 황태자는 여풍장에게 병사 5000여명을 대동시켜 백제로 출병시켰다.

그러나 일본 측은 군산 앞바다 일대에서 나당연합군과 맞싸우다 참패를 당해 퇴각한다. 이를 ‘백촌강 전투’(663년)라고 부른다. 이때 백제 왕족과 귀족 등 백제 사회 지배층 4000~5000여명은 퇴각하는 일본 병선을 타고 집단 망명길에 올랐다. 사이메이천황과 나카노 오에노오지 황태자가 국력을 총결집하여 백제에 구원군을 파병하게 된 데에는 본인들이 백제계 왕족 혈통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본 역사서에 직간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백촌강 전투 참패의 파장은 컸는지 권력 내부의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구원병 파병에 반대하던 토착 호족 세력들에 의해 수도 아스카 지역 곳곳에서 방화가 일어났다. 여기에 당과 신라 연합군의 보복으로 인한 일본 침공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나카노 오에노오지로서는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는 중대 결단을 내린다. 667년 내부 저항세력이 많은 아스카에서 내륙에 위치한 오미국으로의 천도를 단행하면서 전문 지식과 선진 기술을 보유한 백제 망명자들을 이곳에 대거 이주시켰다. 그리고 이들의 힘을 빌려서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한 반전을 꾀했다. 그는 오미국 천도가 완결된 이듬해에 천황에 즉위한다. 그가 덴치천황(즉위 668~671년)이다.

이토추종합상사 창업자, 이토 추베에 [출처 야후재팬 화상]


백제계 도래인의 터전, 오미국

덴치천황은 백제 왕족 여자신과 좌평 귀실복신의 아들 귀실집사 등 남녀 700여명을 오미국 동부지역 가모군에 정착시켰다. 이어서 인근의 간자키군에도 남녀 400여명을 이주시켜 농경지를 무상 분배하고 3년간 식량을 무상 공급해주는 혜택도 부여했다. 그는 귀실집사를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후미노 츠카사노가미’(識頭)라는 직책에 임명하는 등 백제 망명자들에게 인사상의 우대조치도 취했다. 이들 백제계 도래인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군소 씨족으로 분화되면서 주로 오미국 동부 지역에 정착하며 뿌리를 내린다.

오늘날 그들의 발자취가 시가현 곳곳에 남아 있는데 동부 지역 이누가미군 도요사토 마을의 아직기 신사는 일본에 한자와 논어를 전해준 백제 출신 아직기와 왕인 박사와 연관된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히가시 오미시에 소재한 햐쿠사이지(百寺)는 쇼토쿠 태자가 백제 승려 도흔을 위해 건립한 절로 알려져 있다. 이 절은 오미국 상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는 곳이라고 한다. 백제 왕족 여자신을 모신 사당은 시가현 남부 오츠시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한 도래인으로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백제계 씨족으로는 아직기의 후손인 아마토노 아야 씨족, 왕인박사를 선조로 둔 가와치노 후미 씨족, 유미즈키노 기미를 선조로 하는 하타 씨족 등이 있다. 천자문 등 문자를 도입한 아직기와 왕인의 자손들은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료집단으로, 유미즈키노 기미의 후손 하타 씨족은 기술자 집단으로서 일본사회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하타 씨에서 분가하여 동부 에치군에 정착한 에치 하타 씨족들은 고품질의 모시와 삼베를 만들었다. 이 제품들은 도쿠가와막부의 에도시대에 들어와서는 오미상인들에 의해 일본 전국 각지에 팔려나가는 인기 품목이 되었다고 한다. 에도시대 후기에 창업한 일본 굴지의 종합상사 이토추상사의 이토추 베에 창업자도 이곳에서 생산, 제작한 모시와 삼베를 구매하여 외지에 내다판 오미상인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오미국 동부 지방은 ‘도래인의 터전’으로 불렸다.

오미상인 [출처 위키피디아]


시바 료타로 “오미상인은 도래인 출신이다”

조선시대의 보부상을 연상시키는 오미상인은 일본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오미국 동부지역 출신 행상을 지칭한다. 막대 저울 한 개를 어깨에 걸쳐 메고 일본 전국, 심지어 베트남까지 진출하는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며 장사 수완을 발휘한 상인집단이다. 이들은 ‘오사카 상인’ ‘이세 상인’과 더불어 일본 3대 상인으로 손꼽히며 에도시대 유통경제를 견인한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의 장사 수법은 자기 지역에서 제조, 생산한 삼베 모시 등 의류품과 모기장 등 잡화류를 에도, 동북 지역에 내다팔고 이 지역들에서 원재료를 구매해 오사카, 교토에 되파는 방식이었다. 오미상인들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복식부기를 고안하고 현대 체인점에 흡사한 방식의 영업망을 전국에 구축하며 유통혁명을 일으켰다.

오미상인의 출신지는 주로 오미국 동부 가모군, 간자키군, 에치군, 이누가미군 등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계 도래인들의 정착지와 일치한다. 그래서 저명한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는 “오미상인은 상인적 소질을 지닌 도래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라며 오미상인이 한반도 출신 도래인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오늘날 시가현 출신의 대표적인 기업 이토추상사와 마루베니가 아직기 신사가 있는 이누가미군 도요사토 출신이어서 흥미롭다. 창업자의 사위로서 도요타자동차 그룹을 반석에 올려놓는데 초석을 다진 도요타 리사부로도 이누가미군 히코네 출신이다.

오미국으로 대거 망명한 백제계 도래인들의 활약상이 오늘날 현대 일본경제를 꽃피우는데 일정 부분 자양분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이점에서 일본의 백제계 이민자들에 대한 과감한 포용정책과 일본인들의 이런 똘레랑스 정신이 오늘날 일본 번영의 초석이 되었다는 점을 필자는 높이 평가하고자 한다. 개방과 포용은 번영을 약속한다는 교훈을 일본 오미국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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