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를 만난 85분…“‘레퀴엠’은 신을 향한 베르디의 인간적 질문” [고승희의 리와인드]

로베르토 아바도ㆍ국립심포니
“베르디의 신을 향한 인간적 질문”


로베르토 아바도 지휘자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베르디 ‘레퀴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 유명한 ‘진노의 날’은 등장하지도 않았지만, 성스러운 현이 음악의 시작을 알리자 청중은 이내 알아차렸다. ‘베르디 전문가’인 로베르토 아바도와 만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레퀴엠’(3월 9일). ‘거대한 죽음’이 할켜 폐허가 된 세계를 가로지르는 선율이었다. 남겨진 자의 빈 가슴을 훑어내리는 현의 울림 위로 음표들이 경건하게 내려앉았다. 기도문 같은 합창이 성스럽게 죽은 혼을 달래고 산 자를 어루만진다.

“제겐 베르디가 전형적인 이탈리아 로마 가톨릭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이 곡을 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로마 가톨릭 신앙도 그 신앙이 자리한 국가에 따라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이죠.”

지휘자 로베르토 아바도(71)는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베르디의 ‘레퀴엠’은 오페라가 아니라 성악을 위한 종교 음악 작품”이라고 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퀴엠(죽은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은 아바도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만남을 통해 하늘로 띄우는 한 편의 성가가 됐다. 공연엔 소프라노 카롤리나 로페스 모레노, 메조소프라노 김정미, 테너 안토니오 폴리, 베이스 박재성, 국립합창단이 함께 했다.

로베르토 아바도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해 예술의전당이 올린 오페라 ‘노르마’ 당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로 처음 만났다. 엄청난 호평을 받았던 첫 공연 이후 두 번째 만남인 만큼 클래식 애호가들의 관심도 쏟아졌다. 이들이 만난 ‘레퀴엠’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85분의 공연은 1분 1초도 한 눈 팔 겨를 없이 이어졌다. 긴 시간을 쉼없이 달린 뒤엔 진정한 ‘자유’를 만나게 됐다.

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거룩하고 장엄한 대서사시다. 아바도가 지휘한 베르디 ‘레퀴엠’엔 어떤 삶의 기나긴 여정이 실렸다. 기쁨도 슬픔도 많은 찬란한 삶이 장장마다 스몄다.

로베르토 아바도 지휘자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베르디 ‘레퀴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아바도는 “베르디의 ‘레퀴엠’에는 인간이 신에게 던지는 두 가지의 중요한 요청이 담겨있다”고 했다. 하나는 ‘구원’(‘저를 구원해주십시오’), 다른 하나는 ‘영원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는 “베르디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의 ‘레퀴엠’은 거대한 물음표로 끝난다”며 “베르디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할 만큼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 점이야말로 베르디를 매우 인간적으로 만드는 요소”라고 했다.

한없이 투명하고 경건한 모레노의 음성으로 시작된 ‘레퀴엠과 키리에’를 지나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는 금관이 폭풍처럼 진노(‘디에스 이레:진노의 날’)한다.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빛’을 달라는 간절한 기도 뒤로 ‘온 천지가 잿더미 되는 그날’을 극명한 대조로 그려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이 어우러져 이윽고 찾아올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두려움은 팀파니의 거친 타격과 포효로 배가된다.

이날의 연주는 선명하고 명료한 현악과 광포한 금관이 맹렬히 달린 날이었다. 저릿한 금관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그 사이로 합창이 밀려오다 이내 메조 소프라노 김정미의 솔로로 ‘가엾은 나’를 돌아본다. 바순의 아르페지오로 불안이 더해지니 음악은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가 스민다.

아바도가 네 명의 솔리스트에게 당부한 것은 가사 해석이었다. 그는 “보컬 음악에선 가사가 음악의 표현을 이끄는 경우가 많고, 때때로 가사가 음악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모레노의 맑고 청아한 음색, 김정미의 짙은 호소력, 테너 안토니오 폴리의 풍성한 색채, 베이스 박재성의 단단한 저음이 쌓이고 쌓일 때 삶의 아름다움과 죽음의 묵직함이 교차됐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솔로 파트도 인상적이었으나, 네 명의 성악가는 듀엣으로 서로에게 서로의 소리를 포갤 때 아름다움은 극치를 이뤘다. 모레노와 김정미가 합창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 메조 소프라노와 테너, 베이스가 섞이는 ‘영원의 빛’은 성악 앙상블의 정수를 보여줬다.

로베르토 아바도 지휘자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베르디 ‘레퀴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공연의 백미는 단연 ‘저를 자유케하소서(리베라 메)’였다. 풍성하고 깊은 소리를 끌어내듯 팔짱낀 채 늑간을 압박해 소리를 토하는 모레노는 “주님, 저 두려움의 날”이라는 가사가 시작되자 두 팔을 벌리고 진성과 가성을 오가며 호소했다. 휘몰아치는 선율은 이지러짐 없이 이어지고, 절정을 향해 가다 숭고한 생과 사를 돌아보며 탄식으로 마무리한다. 모든 소리가 멈춘 뒤의 정적까지 고스란히 음악이었다. 왼손을 펼친 채 세상을 멈춘 아바도가 만든 의도적 공허가 객석에 비로소 자유를 건넸다. 죽은 자를 위로하고 산 자를 치유하는 음악이었다.

그의 손이 서서히 내려가자 관객들의 참았던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터져나오는 함성에선 오늘을 치유받은 사람들의 카타르시스가 담겼다. ‘최고’의 베르디 ‘레퀴엠’이었다는 성찬이 쏟아졌다.

연주를 마친 아바도는 “우리 연주가 좋은 평가를 받아 정말 기쁘다. 한국 관객들의 따뜻함과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는 뛰어난 연주력과 음악적 역량은 물론이고, 특히 개방적인 사고, 유연성, 그리고 새로운 길을 탐색하려는 호기심이 큰 강점이다. 두 번의 멋진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우리가 함께 음악을 만들 기회가 온다면 기쁠 것 같다”며 소감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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