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만에 내한 ABT “시식메뉴 같은 공연…교황 기리는 의미 담았다”

오는 24∼27일 GS아트센터에서 개관 공연
발레리나 서희 “입단 20년…자존감 준 시간”
재피 감독 “성별·인종 아우르는 다양성이 핵심”


ABT 수석 무용수 서희 안주원, 솔리스트 박선미 한성우 [GS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수석 무용수 서희입니다. 저를 소개할 땐 늘 이렇게 말하는데요. 그때마다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동양인 최초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수석 무용수 자리에 올라 어느덧 입단 20주년을 맞은 무용수 서희가 이렇게 말했다.

올해로 창단 85주년을 맞은 미국 국립발레단 ABT는 러시아 마린스키와 볼쇼이 발레단, 파리오페라발레단과 함께 세계 최정상 발레단 중 하나로 꼽힌다.

서희는 지난 2004년 ABT 스튜디오 컴퍼니에 입단, 2005년 메인 컴퍼니의 수습 단원이 됐다. 그는 GS아트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나 “눈 깜짝할 새에 20년이 지났다”며 “지난 20년은 제게 자존감을 준 시간이었다. 20년간 한 가지 일을 한 장인처럼,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한 길을 걸어갔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준 자존감이 크다”고 말했다. 서희는 올해 뉴욕에서 입단 20주년 기념 공연을 연다.

서희는 지난해 유니버설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관객과 만났지만, ABT로 한국을 찾은 것은 무려 13년 만이다. ABT는 이번에 70명의 무용수를 포함해 총 104명의 대규모 인원이 내한, 오는 24~27일까지 GS아트센터의 개관 공연을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난다. 고전을 비롯해 20세기를 대표하는 안무가 조지 발란신을 시작으로 컨템퍼러리 무용계에서 주목받는 안무가 카일 에이브러햄까지 다양한 시기의 작품을 나흘간 이어간다.

ABT 무용수 출신으로 발레단 역사상 최초의 여성 예술감독인 수전 재피는 1996년 ABT의 첫 내한 공연 이후 30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그는 “고전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망라해 솔리스트부터 코르드발레(군무 단원)까지 뛰어난 무용수들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ABT 코르드발레 서윤정, 수석 무용수 제임스 화이트사이드, 이저벨라 보일스톤, 예술감독 수전 재피, 경영 감독 베리 휴슨, 수석 무용수 서희 안주원, 솔리스트 박선미 한성우 [GS문화재단 제공]


베리 휴슨 경영 감독도 “국내 관객에게는 이번 공연이 테이스팅 메뉴(여러 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메뉴), 식당의 맛을 조금씩 맛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특히 휴슨 감독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을 언급, “교황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분이다. 교황을 기리는 의미를 담은 무대를 선보이겠다”고 했다.

ABT에는 현재 19개 국가에서 온 다양한 무용수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 무용수는 서희를 비롯해 한국인 남자 무용수 최초로 수석이 된 안주원, 솔리스트 한성우·박선미, 코르드발레 서윤정 등이 ABT에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서희는 “(ABT에) 후배들이 많이 들어오는 게 큰 기쁨”이라며 “처음엔 선생님이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누나, 언니가 돼 서로 도와줄 수 있어 기쁘다. 이 친구들도 나처럼 후배들을 격려하고 도울 것이라 생각하니 항상 감사하고 대견하다”고 했다.

안주원은 “미국에서 봤을 때 멋지다고 생각한 작품, 국내 관객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작품을 가져왔다”며 “국내 팬들의 반응이 기대된다”고 했다.

수전 재피 감독은 다섯 명의 한국인 무용수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한국인 무용수들이 ABT와 함께하고 있다. 한국인 무용수는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가진 무용수”라며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예술성도 훌륭하다. 무모할 만큼 열심히 하는 진취적 태도와 열정, 예술성은 한국인 무용수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지점”이라고 했다.

ABT의 스타 무용수로 2022년 러시아 마린스키 수석 무용수 김기민과 갈라 공연으로 한국을 찾았던 이저벨라 보일스톤은 “남편이 한국인이라 한국은 내게 더 특별한 곳”이라며 “한국 사람들은 따뜻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 한국 가족에게 공연을 선보일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저벨라는 이번에 제임스 화이트사이드와 함께 2인무 ‘네오’(Neo)를 선보인다.

ABT 수석 무용수 서희 [GS문화재단 제공]


ABT는 창단 이후 줄곧 다양한 인종과 젠더, 배경을 지닌 무용수와 창작가, 스태프와 함께 독창적 미학을 구축해 온 발레단이다. 주요 발레단으론 흔치 않게 흑인 여성 수석 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를 임명했고, , 2024년 여성 안무가 헬렌 피켓의 전막 발레 ‘죄와 벌’을 초연하기도 했다. 특히 동시대 감성과 맞지 않는 고전 발레 레퍼토리의 장면과 스토리를 수정하는 등 ‘시대의 변화’를 적극 수용한다.

재피 감독은 “예술 세계에서 오랫동안 남성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면서 “ABT는 여성의 목소리, 여성 안무가나 여성 아티스트, 유색 인종의 레퍼토리 작업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물론 백인 남성의 안무가를 초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며 “백인 남성, 여성, 유색인종 예술가가 매년 함께하는, 그런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한국 공연에선 1947년 ABT에서 세계 초연한 조지 발란신의 ‘주제와 변주’를 비롯해 미국을 대표하는 두 예술가 트와일라 타프와 작곡가 필립 글래스의 협업작 ‘인 디 어퍼런트룸’, 카일 에이브러햄의 ‘머큐리얼 손’, ABT 무용수 출신 안무가 제마 본드의 ‘라 부티크’ 등을 선보인다. ‘인 디 어퍼런트 룸’은 1980년대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여성 안무가의 작품이다.

서희는 “‘주제와 변주’는 무용수들이 비행기를 타고 와 바로 선보이기엔 어려운 작품이나 ABT엔 의미 있는 작품이고, ‘라 부티크’는 ABT 단원을 너무나 잘 아는 안무가가 만들어 모든 동작이 무용수들의 손에 딱 맞는 글러브 같은 작품”이라고 귀띔했다.

재피 감독은 “개인적으로는 (고전과 현대 등) 다양하게 섞여 있는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며 “작품 간 긴장감도 형성하고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효과를 줄 것”이라고 했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