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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체(cultural lag)는 기술이나 도구와 같은 물질적 문화의 빠른 변화속도를 사회의 법과 제도, 규범과 같은 비물질적 문화가 따라오지 못해 발생하는 간극(gap)을 의미한다. 1922년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필딩 오그번(William Fielding Ogburn)이 소개한 이 현상은 자본과 인력을 통해 변화를 가속화할 수 있는 물질적 문화와, 사회구성원의 이해와 합의를 통한 점진적 변화만이 가능한 비물질적 문화의 본질적 차이에 기인한다.
인터넷과 모바일에서 최근 인공지능까지 새로운 산업과 서비스가 빠르게 등장하고 고도화되는 사회에서 문화지체 현상은 이미 많은 영역에 걸쳐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해결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혁신적이고 파급력 있는 산업의 등장은 많은 사회구성원의 권리와 이익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사회적 영향과 효과를 분석하고 민주적 절차와 방법으로 법과 제도를 개선하고 조정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시간에 쫓겨 이러한 절차를 충실하게 거치지 않고 무리하게 추진된 법과 제도는 개선이 아닌 개악이 될 수도 있다. 이를 다시 조정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규제샌드박스 제도는 문화지체 현상 하에서 혁신적인 산업과 서비스를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서 등장했다. 2015년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이 처음 도입한 이 제도는 아이들이 푹신한 모래사장(sandbox)에서 다치지 않고 자유롭게 뛰어놀듯이 사업자들이 일정한 조건에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 검증 및 출시할 수 있도록 일부 법령이나 규제의 적용을 면제한다. 이를 통해 사업자들은 현행 법과 제도에 위축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고, 정부와 규제 당국은 해당 상품과 서비스가 사회와 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과 효과를 관찰하고 평가하면서 법과 제도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다.
국내 규제샌드박스 제도는 행정규제기본법 및 개별 분야별 법령에 근거를 두고 운영 중이다. 행정규제기본법은 신기술 서비스 및 제품에 대해서 규제 특례 관계법률을 마련하고 이를 근거로 각 유관부처가 국민에 대한 위해성, 편익, 사후책임 확보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규제의 적용을 면제하거나 완화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법 제19조의3 제4항). 이에 따라 현재 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등에 관한 특별법(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산업융합 촉진법(산업통상자원부 소관), 금융혁신지원 특별법(금융위원회 소관) 등 다양한 법률에 근거해 유관부처들이 실증특례, 임시허가 또는 행정적극해석 등의 방식으로 규제샌드박스 제도를 운영 중이다.
지난 8월 19일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가 발표한 123대 국정과제에서 인공지능, 과학기술 및 혁신금융 등을 포함한 혁신경제 육성과제들은 그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례 없는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는 현행 법령과 제도와의 필연적인 간극으로 인해 좌절되거나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규제샌드박스의 모래사장에서 사업자들이 문화지체 현상을 극복하고 혁신의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노태영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